본부 주관 연수과정 중 대전지역에 근무경력이 있는 노조 간부를 우연히 조우했다. 깜짝 놀랄만한 정보를 들었다. 본인이 그 지역에서 근무하던 최근에 지역 연고가 있는 중고참 4급 책임자를 물색한 적이 있었단다. 나도 그 물망에 올랐으나 발령은 불발되었다는 것이었다. 향후 혹시 그런 일이 또 있게 되면 즉시 연락을 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출신 고교가 소속된 지역을 연고로 보는 게 당사의 지침이자 관행이었다. 이제 나는 해당 지역으로 발령이 임박한 거로 보여 위기감마저 느꼈다. 취업ㆍ결혼도 늦은 데다 자녀도 늦게 얻었다. 이른바 ‘지진아’가 된 기분이었다. 맞벌이를 하는 바람에 아이를 맡길 곳도 마땅치 않아 지방발령이란 나에겐 고난의 행군일 것이 뻔했다.
이윽고 나는 역대급으로 힘들었던 직전 점포 근무를 마무리했다. 다음 근무지로 대전지점으로 전보발령을 받았다. 지역본부 단위 발령이라고 했지만 본부 인사부에선 이미 특정 점포를 염두에 둔 것이라서 사실상 최종 발령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신입사원 연수를 마치고 첫 발령지를 어디로 할 인가를 상담했다. 대전지역을 고려 중인 인사책임자에게 당돌하게도 그 지역으로 가서는 아니 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들어가며 반박을 했다. 그래서 거주지에서 비교적 근거리인
수도권 신설점포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
바람에 대구가 연고지인 입사 동기가 대전
지점으로 첫 발령을 받는 덤터기를 썼다.
아직 만 4세가 되지 않는 아이를 둘러업고 경인선 송내 전철역에서 눈물로 집사람의 배웅을 받았다.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는 지방 근무지로 향해야 하는 발걸음이 가벼울 리가 없었다.
대전시내엔 2개의 점포가 있던 중 최근엔 하나의 점포를 추가로 개설했다. 대전지점은 그 후에 신도시 중심에 새로이 개설하여 승승장구하는 둔산지점 대비 영업 여건이 매우 어려웠다. 향후 지점 생활이 녹록지 않아 보였다.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집사람은 인천에 직장을 두었다. 나를 따라 대전으로 이사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내 고향 본가와 거리가 50여 킬로미터를 넘는터라 본가에서 출퇴근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은 독신자나 단신 부임자들이 모여 사는 합숙소 생활을 하기로 했다. 종래 2명밖에 기거하지 않았던 합숙소엔 이번 대대적인 발령 덕분에 상주인력이 6명으로 대폭 늘어났다.
직전까지 대전지점에서 근무하다 이번 기회에 신설점포 개설 준비위원으로 발령을 받은 입사 동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유선으로 대전지역ㆍ지점에 관해 개략적인 오리엔트를 받았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둘은 독대를 하고 저녁식사 기회를 빌어 보다 세부적인 정보와 코치를 받았다.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신입직원이 되었다. 새로운 지역ㆍ직원ㆍ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부담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마친 후 약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난 후 다시 보는 도시는 괄목하게 변하여 감회가 새로웠다.
첫 출근일에 지점장과 면담을 했다. 신상에 관하여 몇 가지를 확인했다. 개인 소유 승용차는 있느냐고 묻었다. 점장은 나에게 이미 맡기고자 하는 일거리를 생각한 것으로 보였다. 아직 차는 없다고 하자 그러면 업무를 줄 수가 없다고 했다. 최근에 운전면허를 땄는데 빠른 시일 내에 차를 구입할 것이고 현재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자신 있게 답변을 했다. 영업 내지 일에 대한 강한 의지의 표명으로 보았는지 반색을 했다.
책임자가 된 이후 영업점에서 직전까지 주로 어떤 업무를 하였느냐고 후속 질문을 이어갔다. 주로 ‘(법인) 판촉일’을 했다고 하자 페이퍼 워크가 주된 내용인 이른바 ‘판촉기획’이냐 아니면 ‘판촉 실행’이냐를 다시 물었다. 직접 발로 뛰는 ‘판촉영업 실행’이라고 대답 후 잔뜩 긴장한 나는 점장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폈다.
주로 머리로 짜내는 기획이란 대답을 기대하였는데 그와 정반대의 답변에 실망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점장은 또 한 번 더 반색을 했다. 자신이 쓰고자 하는 용처에 얼추 조건을 갖춘 책임자가 전입 온 것에 대한 안도감의 표현으로 보였다.
일단 점장과의 최초의 면담에선 무난한 데뷔를 한 것으로 보였다. 다음 내부 업무는 영업전략이 기본이었고 개인고객 관리에다 시내 법인 일부와 외곽 법인 일부 관리 등으로 업무분장을 받았다. 점장은 내게 외곽 법인의 개척에 방점을 두고 일정한 성과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지방 대형 거점 점포로 점장(1), 3급 이상(4), 4급(5)등 책임자와 남 여직원 기술직 등 45명 내외의 인적 구성이었다. 수탁고는 개인대 법인 각각 50%로 6,000억을 상회했다. 당시 채권형 수익증권은 장부가 시스템이었고 거의 확정금리 유사상품으로 간주되었다. 기업금융의 비중이 거의 없는 국민은행을 거래하듯 하는 개인고객 기반도 탄탄했다.
수도권 점포와 달리 2차 집단적 성격보다는 1차 집단의 성격이 강했다. 여직원들은 초급 책임자에게 절대복종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애시당초 채용 시부터 지역ㆍ학교 등을 안배하고 이후 연고지 순환배치 등으로 출신지역, 출신 고교ㆍ대학 등으로 이리저리 연결이 되었다.
지방 투신 부도와 퇴출 시대가 도래했다. 재무구조가 부실한 데다 투신상품은 은행 예금과 달리 예금자 보호를 받지 못하는 실적배당 상품이라는 메이저 중앙 일간지의 보도가 더해졌다. 급기야 대규모 자금 인출 사태가 벌어졌다. 영업 정지에 이어 퇴출까지 갈 태세였다. 이 영향을 당사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지방투신 대비 상대적으로 훨씬 그 규모가 크고 재무구조가 안정적인 점을 부각해 필사의 방어활동을 했다. 허구한 날 야근이 이어졌다.
신탁과 고유재산은 별도로 관리되고 고유재산에 관한 채권으로 신탁재산에 압류 등을 할 수 없기에 고객이 맡긴 신탁재산은 안전하다는 논리를 펴는 등 고된 영업활동의 연속이었다.
지방투신의 고객을 일부 흡수했다. 인근 상호저축은행이 문을 닫자 직원들의 인맥을 동원하여 고객정보를 캐내어 고객명단을 직원별로 배분하고 제법 자금 유치도 했다.
신도시인 둔산지점 대비 대전지점 권역은 구상권으로 이미 변두리 화가 상당한 정도 진행된 상태라 영업 환경이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둔산지점은 ‘돈산’이란 별칭처럼 영업기반이 날로 탄탄해져가고 있는 것이 쉽게 눈에 들어왔다. 채권 장부가 평가 시절이었고 이른바 예상(목표) 수익률 제시가 가능하여 둔산지점엔 심지어 ‘신규법인 개척용 우대금리 특판상품’까지 제공된 이력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