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의 한가운데 엄청난 장대비가 쏟아지는 늦은 저녁이었다. 모처럼 전 직원이 모이는 회식을 했다. 두꺼운 돌 불판 위에 대패삼겹살을 부지런히 올렸다. 대전극장 통 인근은 가히 ‘삼겹살 골목’이라 해도 절대 무리가 아니었다. 대단히 게걸스럽게 모든 직원들은 폭풍흡입을 했다.
최근 지방투신의 부도 등의 영향으로 이탈되는
자금을 방어하는라 야근이 일상화 되었다.
게다가 저녁 늦은 시각이라 시장이 반찬이
이었고 쏟아붓는 장대비도 식욕을 돋우는데
한몫을 했다. 골목 전체가 삼겹살집으로
빼곡히 들어선 도심의 명물이었다. 주류
불문, 두주불사 하던 젊은 시절이다 보니 합숙소팀은 귀가 길에 2차는 방아간의
참새였다.
병맥주나 커다란 잔에 담아내는 생맥주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캔(깡통) 맥주만을 취급했다. 이렇게 독특한 주점은 이곳 대전은 물론 전국을 통틀어도 나는 난생 처음이었다. 나와 발령일이 비슷한 임계장은 최근 수령한 부임 여비의 대부분을 이곳에다 털어 넣었다. ‘영동 뜨근이’란 이름으로 간판을 내건 뼈다귀 해장국집도 퇴근길에 자주 들렀다. 뼈다귀보다는 우거지와 짙은 붉은색 국물이 일품이었다. 대전천변의 인동ㆍ원동 인근이었다.
장거리 외곽 법인 판촉 시 동행하여 항상 든든한 우군인 성 부장이었다. 늦은 시각까지 술과 고스톱판을 벌인 덕분에 항상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나는 조수석을 차지하여 드르렁대고 코를 심하게 골았다. 막후의 이런 이야기를 입사 동기 후임자에게 인계했다. 장거리 주행 중 코스 중간중간의 휴게소나 쉼터를 빌어 팔 굽혀 펴기 등 약식 운동도 했다. 자기 관리에 철저함을 보여주었다. 성 부장과는 지금도 서로 안부를 묻는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당시만 해도 공무원, 공공기관은 물론 일반 민간기업체들도 접대비 등 비용 집행 시 법인카드 의무 사용제도 시행 전이었다. 아니면 시행 중이라도 의무 사용 비율이 그리 높지 않아 고객 접대나 타 비용 집행 시엔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거래처 중 명실상부하게 거래규모나 기여도가 가장 큰 ●●공사의 담당자 접대 시엔 공사 직원들이 원하는 장소를 미리 물색하고 확정하여 당점 책임자에게 통보를 했다. 이 법인의 비중이 워낙 크다 보니 우리 점장의 인사권을 쥐고 있다는 우스개 소리도 나왔다.
이 공사 직원 단골 접대 장소 중의 하나가 대전시와 옥천 간 국도 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야트막한 산비탈의 능선에 자리 잡은 ‘참새구이집’
이었다. 나는 해당 거래처 담당이 아닌 관계로 이곳에 가볼 기회가 없었다. 상급 부장 2명의 옆구리를 집요하게 찔러댄 덕분에 드디어 그 유명한 맛집 행차에 성공했다. 대전 지점에 몸담고 있는 지금이 아니면 이런 기회가 쉽게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상급자를 설득하는데 많은 정성을 들였다.
50대 중후반 부부가 직접 재배한 배추, 무등으로 매년 꼬박꼬박 김장을 담갔다. 상추, 쑥갓, 고추, 양파, 부추, 마늘 등 기타 부식용 재료도 규모가 그리 커 보이지 않는 인근 텃밭에서 조달했다. 청정 무공해 음식만을 제공한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어린 시절 나의 고향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특이사항은 없었고 그저 평범한 농촌 풍경
이었다.
짙은 고동색의 투박한 개인별 뚝배기에 각자 원 하는 만큼의 벌거벗은 참새를 채웠다. 석쇠 위에 참새를 각자 올려 구웠다. 이른바 독립채산제처럼 할당받은 참새는 본인이 모두 책임지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일단 자주 맛을 볼 수 없는 별식이었고 식성이 좋다는 소리를 넘어 너무 게걸스럽다는 말까지 들어온 나로선 매우 만족했다.
이곳을 다녀간 이력이 있는 몇몇 직원들은 참새의 실제 정체는 ‘병아리’라며 다녀 간 다음날 심한 배탈로 호되게 고생을 했다는 말도 전했다. 나도 20대 이전에 이미 포장마차 등에서 병아리를 참새로 속여 판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좋은 맛집 기행이었다. 설령 병아리일 가능성이 높더라도 기회가 다시
온다면 기꺼이 한번 정도는 더 찾고 싶었다.
“부여 쪽 법인을 맡고 있는 박 과장, 오가며 보았을 텐데 ‘용봉탕 집’ 연락처 좀 구해오지, 모처럼 보양식으로 우리 책임자들 원기도 보충합시다.
그곳 현지에서 책임자 회식을 한번 하십시다”
점장의 제안이었다. 이리되어 득별 한 모임이 성사되었다.
별주부전에 등장하는 거북이가 아닌 자라 요리였다. 모처럼 멀리 나들이 욌으니 확실하게 보양을 하자며 점장은 두 번 먹자고 했다. 중간 사이즈의 무쇠솥에 자라는 물론 대추 알밤
대파 고추 마늘 등 갖은 양념을 넣었다. 찹쌀 죽을 쑤는 것은 기본이었다.
충분히 소화를 시키기 위해 중간 타임엔 당연히
고스톱판이 벌어졌다. 술 마신 상태에서 운전은 절대 금물이니 나는 술잔을 일체 입에 대지 않기로 했다. 일일 운전병을 기꺼이 자처했다. 심한 가뭄에 체크무늬로 갈라지는 논바닥과 아주 유사했다. 중국 은나라 시대 갑골 문자에 빗대어 거북이 등짝에다 글씨를 쓰던 기억이 있지 않느냐고 내가 한마디 꺼냈다. 점장은 그런 농도 할 줄 아느냐며 웃어넘겼다.
자라 고기 닭백숙 찹쌀죽을 배가 터질 정도로 채워 넣었다. 나에겐 이 음식은 단 한 번의 체험이었다.
미꾸라지로 할 수 있는 요리가 이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처음 알았다. 추어탕, 통추어탕, 튀김, 숙회, 매운탕 등인데 매운탕은 그 푸짐한 양만큼이나 가격대도 부담스러웠다. 자주 들르는 단골을 대접하고자 1인당 뚝배기 하나씩 서비스를 주겠다고 주인장은 모처럼 큰 생색을 냈다. 이렇게 많은 걸 감당하지 못할 거로 보는 모양인데 이 정도쯤이야라며 후딱 모든 책임자는 뚝딱 해치웠다.
많은 세월이 흐른 최근 다시 이곳을 찾을 기회가 왔다. 문전성시는 여전했다. 명절 전후에도 멀리서 찾은 외지인이 부탁을 했다. 맛있는 음식을 좀 먹게 해달 하는 애원을 뿌리칠 수 없었다. 편히 쉴 날이 일 년을 통틀어도 몇이 되지 않는다고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무심코 내비게이션 말에 복종하다 보니 딸이 같은 상호로 따로 살림을 낸 분점에 도착한 적도 있었다. 식성이 그리 나쁘지 않고 토종 조선인 취향인 나는 이 집 음식과 궁합이 잘 밎아 향후 또 찾고 싶었다. 특히 시래기 맛은 발군이었다.
종합 건강검진 결과 대부분의 지표가 정상치를 벗어나 들쑥날쑥하는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나는 아마 이곳에 가지 않을 것이었다. 설령 가더라도 음식을 선별하여 먹었을 것이었다. 당시는 30대 후반이다 보니 아직 여유가 있는 시절이었다. 비계 부분이 전체의 1/3 내지 1/2 정도 차지하는 돼지고기 수육이 이 집 대표 음식이었다. 모두부를 얇고 비교적 넓게 썰어 양념을 듬성듬성한 두부무침도 있었다. 식사 마무리론 칼국수였다.
당시 연령대면 인생 전반부라 해도 결코 무리가 아닌데 이렇게 돼지수육을 전문으로 하는 곳은 처음이었다. 수육 조각을 통으로 한꺼번에 몇 장씩 겹쳐 먹더라도 충분히 소화를 시켜 몸에 부담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당연히 사양을 했으리라.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신장기능이 갑자기 추락한 나의 절친의 코멘트였다. 모 국립대 병원 전문의가 일렀다. 돼지고기를 꼭 먹고 싶으면 일반 삼겹살 대신 비계가 상대적으로 적은 목삼겹을 먹거나 아니면 수육을 푹 삶아서 기름을 쏙 빼고 먹으라고 했다. 이로 볼 때 비계란 것이 소화가 잘 되지 않을뿐더러 지방으로 몸에 축적이 되면 건강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걸 알았다.
출신 고교 지역을 연고지로 보는 회사의 방침이 바퀴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맞벌이만도 버거운데 주말부부가 되다 보니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6일 근무시스템에선 그나마 쉴 수 있는 주말이 1박 2일밖에 되지 않았다. 1개월치 열차 타깃을 한꺼번에 예매를 해야 했다.
대전역과 영등포역을 왕복했다. 집안 행사나 아주 이례적인 이벤트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승용차 이용은 자제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그나마 처가에 맡겼다. 매주 말 나의 동선은 간단하지 않았다. 대전역을 출발하여 영등포에서 경인선 전철을 갈아타고 인천시내 ●●역에 하차하여 다시 마을버스 신세를 지어야만 아이가 있는 처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이를 픽업하여 집사람 승용차로 최종 목적지인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에 겨우 도착이 가능했다. 편도 이동 시간만 적어도 4시간 전후였다. 정말 고달픈 인생살이의 연속이었다.
처가(외가) 생활에 익숙해진 아이는 때론 "아빠, 오지 마 대전으로 가"라고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어떻게 해서든 겨우 겨우 처가에서 우리 보금자리로 데려다 토요일 밤과 일요일 오전 정도라도 같이 보내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을 몰랐다. 아직 말이 유창하지 못함에도 이 건 의사 표시만큼은 확실하게 표현했다. 참으로 한 가정을 꾸리고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이 이리 쉽지 않은가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엄마와 외갓집에 있을 테니 아빠는 다른 곳으로 가든지 알아서 하라’는 이야기였다. 맞벌이도 쉽지 않은데 주말부부가 되다 보니 고생과 애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