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지점 시대(3편)

by 그루터기


점 내 최고참 고령인 반부장은 평소 동료 간은 물론 부하직원 심지어 점장과의 대화에도 용어 선택부터 말투 등에 모두 거칠 것이 없었다.


내가 대전지점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점포 내 객장에서 반부장과 마주쳤다.

"야, 박 과장, 너 어른을 보면 인사를 해야지? 이 녀석아, 그렇지 않아?"

"예, 방금 전에 인사드렸습니다. 분명히 드렸습니다"

"인사 안 했어 어디서 말대꾸야? 눈알을 확 후벼 파버린다 “

반부장의 말은 거칠음을 넘어 엽기적이었다. 그 이유를 동료 직원에게 물었더니 웃으면서 본래 그러려니하고 넘기랬다.


오늘 오전 내 앞을 훅 지나면서 또 한마디 건넸다.

”박 과장, 혹시 술 마실 줄 아는가?

”아 예 좀 마십니다."

“그럼 이따 끝나고 술 한잔 사 줄 테니 남아.”

이번에도 동료 직원에게 이와 관련하여 재차 물었다. 반부장은 단골 밥집에서 술을 마시곤 한다. 김치찌개 2인분으로 식사와 함께 반주로 소주 1병을 비우는데 2시간여나 걸린다고 알려주었다. 그것이 그분의 평소 스타일이라 했다.


상사와 술 약속을 거절할 수 없는 나는 일과 후 반부장을 찾았으나 반부장은 이미 일찍 퇴근한 뒤였다. 다음 날 그걸 문제 삼아 내가 반부장에게 따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추석 명절에 귀향 열차 티켓을 구하기란 녹록지 않았다. 전대리가 귀띔을 해주었다. 반부장이 충분히 해결해줄 수 있으니 부탁을 하라고 코치를 했다. 고맙게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었다. 평소 두루 인맥이 두터웠다. 아마 TMO(군인 전용 티켓 발매소)를 통하여 해결한 것로 보였다.


반부장은 운전면허가 없기 때문에 외부 영업을 나갈 경우엔 지점 업무용 차량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승용차 운행이 충분히 가능한 민부장은 오늘도 업무용 차량 건으로 반부장과 또 한 번 부딪혔다. 다른 직원들이 보기엔 민부장이 양보하는 것이 순리였다. 세상엔 쉬운 문제가 많지 않았다.


반부장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어느 정도 자타가 공인했다. 가톨릭 관련 단체, 기관, 법인의 연고 자금을 핸들링하는 영업력은 있었다.


나의 고객 중 모 대학 음대 교수가 내점 했다. 반 부장의 딸이 다니는 학교였다. 부랴부랴 소개를 했다. 반부장은 자신이 평소 직원을 대하는 태도와는 딴판으로 교수에게 아주 깍듯이 예우를 갖추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고 ‘내리사랑’이란 말은 동서고금의 평범한 진리였다.


직원의 정년이 당시로선 55세였다. 아무리 안정적인 직장인 금융기관이라지만 정년을 채우기란 쉽지 않았다. 내가 대전지점을 떠난 지 오랜 세월이 지나 반부장은 정년에 회사를 떠나는 기록도 세웠다.


내가 본부 근무 시절 직전 근무지인 S지점 합숙소에서 처음 인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나의 고향을 밝히자 난 그곳과 같은 지역구가 연고인 방 부장이 별로라서 그쪽 출신 사람도 덩달아 좋아하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도 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반부장은 S지점을 거쳐 간 이력이 있는 전, 현직 직원 모임에 참석하여 여전히 소맥 폭탄주를 즐겼다. 건강은 끄덕 없어 보였다.


최근 희망퇴직한 책임자 우과장에게 인계받은 거래처로 충성고객이었다. 거래 규모도 적지 않았고 자금의 만기도 분산되어 있어 법인고객이지만 웬만한 충성 개인고객에 못지않았다. 담당 실무책임자는 D상고 출신이라 당점 한 부장과는 동문이고 거래관계를 넘는 막역한 관계로 발전했다. 거금 7억이 만기가 도래하여 이탈 가능성을 우려한 나는 점장에게 SOS 긴급구조 신호를 보냈다. 결국 점장, 민부장, 나 이렇게 이번 만기도래 자금의 인출을 최대한 방어하기 위하여 임시 특명팀을 발족했다.


저녁 식사 대접을 하러 업무용 차량을 이용하여 거래 법인 인근 정육식당으로 들어섰다. 거래 규모 대비 좀 무리한 접대였다. 식당은 그나마 가성비가 좋은 곳이었다. 즐겁고 고무적인 분위기에서 1차를 마무리하자, 실무책임자는 업종을 달리하여 2차를 가자고 했다. 신협 이사장은 더 이상은 무리인 것 같고 우리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싫다고 만류를 했다. 하지만 책임자의 뜻대로 우리 일행은 2차 자리로 옮겨갔다. 1, 2차 접대를 모두 무사히 마무리했다.


시내로 돌아오는 업무용 차량 안에서 점장은, 내게 당해 법인의 규모를 묻고선 이번 접대가 너무 부담스러웠는지 자금을 그저 인출해주자고 했다.


점장은 민부장과 둘이서 따로 한잔을 더 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더니 자신의 고교 후배인 민부장에게 갑자기 질책을 해댔다.

“민부장, 난 네가 고교 후배라서 특별히 감싸고 돌 일이 없어. 제발 직원들과 잘 어울리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라. 일도 더 열심히 하고. 알았어?”


나름 점장은 합리적인 성품에 리더십도 있었다. 점장은 사리 분별력이 남달랐다. 합리적으로 지점을 이끌었다. 특정인을 편애하거나 다른 특정인을 폄훼하는 등 행동은 찾아볼 수 없었다. 늘 균형감각을 유지했다.


전 직원 또는 책임자 회식 자리에선 ‘원샷’이란 한 번에 술을 털어 넣으라는 뜻이 아나라 각자가 원하는 만큼 마시라는 의미라며 나름 정의를 내렸다. 누구에게든 억지로 술을 강권하지 말자고 했다.


“여러분은 민부장이 내 고교 후배라고 내가 무조건 감쌀 것으로 알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둘이 있을 때마다 민부장을 많이 나무라고 점포 내에서 타 직원들과 원만하게 어울리란 주문을 해댄다.”

고 부연까지 했다.


한때 서울 소재 대형 점포나 지방 대도시의 거점 점포는 지점 식구가 80여 명에 이르렀다. 업무 자동화, 점포 수의 증대, 거래 고객의 감소 등으로 점포당 직원 수는 꾸준히 감소했다. 그럼에도 내가 몸담고 있는 대전지점은 45명 내외가 유지되었다. 영업장과 객장으로 각각 2개 층을 운영했다.


점장실은 당연히 2층에 자리했다. 지점 살림 등을 도맡아서 하는 팀 또한 2층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점장은 오래전부터의 생각이었는지 본인의 업무용 책상 하나를 추가로 1층에 배치했다. 반부장을 비롯한 직원들의 업무활동을 가끔 실제 눈으로 가까이서 체킹 하겠다는 게 그 취지라고 밝혔다. 하지만 주요 타깃이 민부장이란 건 모두 쉽게 알 수 있었다.


민부장은 점장이 질책이나 지시를 할 때만 일단 이에 따르는 시늉을 했다. 그 이후엔 전혀 나몰라라 했다. 그래서 점장은 향후로 바로 코 앞에서 민부장을 직접 챙기겠다는 의중이었다.


“부장님, 제발 전화 좀 받아주세요.”

일선 창구 여직원의 절박한 요청이었다.

민부장은 예컨대 1선, 2선 창구에 밀려드는 고객들로 북새통을 이룰 경우 외부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대한 응대라도 적극적으로 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이에 민부장은 동료나 아래 직원에게 변명을 했다. 지나가는 소도 웃을 코미디였다.


“무슨 이야기야, 이곳 뒤쪽으로 걸려오는 전화는 거의 전부 내가 받고 있는데...”

이는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전화벨 시스템상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당시는 직원별 직통 번호제를 도입하기 이전이었다. 외부에서 대표전화로 전화를 걸어오면 몇 개로 나뉘어 동시에 또는 순차로 전화벨 소리가 울리게 되어 있었다. 제3선으로 따로 걸려오는 전화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본인이 변명을 해놓고선 그나마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인 줄은 알아차렸는지 순간 얼굴이 몹시 붉어졌다.


민부장은 점심시간 등을 핑계로 장시간 자리를 비기 일쑤였다. 설령 자리를 지키는 경우라도 고객을 응대하거나 전화 수신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를 개선키 위해 점장의 책상을 1층에 추가로 하나 더 배치한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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