뺑글대리가 들여다본 고스톱의 세계(3편)

by 그루터기

■ 구석기시대(수원)

나는 약 8년간의 수험시절을 접고 늦게서야 밥벌이에 나섰다. 수원지점이 첫 발령지가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수사반장이라는 드라마에서 용의자들이 자주 애용하여 더 유명해진 ‘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사는 게 맞아’라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한국 통화로 500만 원을 모아서 다시 솔잎을 먹으러 가겠다고 수시로 다짐하곤 했다.


집도 절도 없어 오도 가도 할 곳이 없는 법적으로 엄연히 총각인 신입사원 3명이 직원합숙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모 유원지 인근 주공 아파트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자취라고는 하지만 회사 비용으로 가사도우미를 고용하여 식사는 물론 청소, 세탁, 다림질 등을 모두 해결해주었다. 하숙 수준의 쾌적한 생활이 가능했다. 주식비와 부식비, 전화료 정도는 수익자 부담의 원칙상 하숙생들의 몫이 되었다.


하숙생들이 꼬깃꼬깃한 코 묻은 돈을 모아 지점장 이하 지점 전 식구들을 초대하여 성대하게 집들이도 했다. 서울 강남 소재 점포들과 달리 지방 점포였다. 그 특유의 가족적인 분위기가 넘치는 대표 점포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끈적끈적한 동료애로 가득했다.


나는 일생일대의 과업을 달성하려 적지 않은 세월을 보낸 후 스물 대를 꽉 채워 중견 남사원으로 회사에 발을 들여놓았다. 여상 졸업예정자들인 초급 신입 여 직윈들과는 강산이 한번 변할 만큼의 연령차가 있었다.


어찌 보면 공무원 조직과 유사하여 여사원들은 나를 비롯하여 중견 남사원들에게 ‘선생님’으로 부르도록 회사에서 지침 아닌 지침까지 내렸다. 지점 내 크고 작은 행사 이후의 뒤풀이 장소로 합숙소는 최적의 여건을 갖추었다. 주말엔 미혼인 젊은 선남선녀가 자주 모이는 이른바 아지트가 되었다.


금융기관 최일선 창구에 자리한 직원들의 직함이 대리인 요즘과 달랐다. 당시는 초임 책임자가 대리였고 책임자 시험에 합격하고도 인사적체 등의 사유로 정식발령까지는 상당한 인고의 세월이 필요했다. 다른 일반 제조업체 대리에 비해 금융기관의 대리는 명실상부한 초급 책임자였고 본부조직의 ‘과장대리’와 달리 점포에서는 ‘지점장 대리’였다.


문제는 이런 막강한 대리들이 수시로 합숙에 드나들었다. 밥벌이를 늦게 시작한 나하 곤 연식 부문에서는 몇 개 차이가 나지 않았다. 담당 휘하 직원의 생사여탈권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리들을 하늘같이 모셔야 하나 나는 아예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행동으로 나오길 기대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리들도 나를 좀 껄끄러워하는 것이 쉽게 읽혔다. 저 친구는 평생직장에 들어온 것이 아니고 조만간 솔잎을 먹으러 다시 야인으로 돌아갈 것이라고들 여겼다.


대리를 비롯하여 그 휘하 졸개 직원들이 아지트에 집합할 경우에는 늘 고스톱판이 벌어졌다. 스물 즈음에 업계에 입문한 거로 계산하면 나도 대략 두지리 수의 구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회사 내에서는 철저히 문외한으로 위장을 했다. 이는 국가안보와 관련된 최고급 군사기밀 수준이었다.

3명의 하숙생 중 연식이 제일 오래다 보니 합숙 소장 역할은 당연해 나의 몫이었다. 일단 우리 집에 오신 손님이니 최소한의 접대는 해야 인사상의 불이익은 받지 않을 것 같은 눈치는 있었다.


맥주병 입구 아래 부분에 약 5 센티미터의 은색 띠를 두른 당시 공전의 히트상품이 있었다. ‘슈퍼드라이맥주’ 10병을 배달시켜 대접에 갈음했다. 고스톱판 인근에서 멀리 떨어진 빈방에서 두문불출하고 이른 시간 내에 자리가 파하기를 기다렸다. 밥벌이를 시작한 지 어언 12개월 될 즈음 나는 솔잎을 먹는 야인으로 돌아갈 수준의 통장잔고를 확인했다. 선후배들과 접촉하여 도서관과 몸을 뉠 수 있는 공간을 물색하기까지 했다.


3막 5장의 연극 공연에서 2막 1장 정도가 휘리릭 지나고 2장 정도가 열렸다. 꼭 발전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괄목상대할 만한 모습으로 변한 나를 무대 위에서 발견하였다. 고스톱 필드에서 철저히 아웃사이더였던 나는 아웃복서도 아닌 대단히 공격적인 인파이터로 표변해 있었다.


4박 5일간의 고스톱 축제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첫째 날 밤을 하얗게 꼴딱 세우고 나면 사무실에선 오전 내내 비몽사몽이었다. 업무와 손님 응대를 그럭저럭 했다. 오후 3시 정도가

되면 눈이 다시 초롱초롱할 정도로 체력이 회복되었다. 누가 먼저라고 순번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바람잡이 역할을 교대로 했다. 공람 용지를 결재판에 정성스레 끼워 당일 개장하는 야시장의 필드에 멤버로 참여하겠다는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누구누구도 인정했고요 이제 선배님만 인정하시면 오늘도 야시장 개설이 가능합니다”라고 하며 바람을 잡았다. 이 정도면 얼추 기네스북 등재 후보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야시장의 필드에서 선수들이 경기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한전에서 사전 예고도 없는 갑작스러운 단전 사태가 일어났다. 선수 둘이 나서서 인근 가게를 한참이나 수소문한 끝에 당시에 가장 굵은 크기의 양초를 넉넉히 구해온 덕분에 그날도 하얀 밤을 보냈다. 촛불 시위가 아닌 촛불잔치였다.


스키부대로 윌 남전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둔 후 같은 회사에 오랜 기간 근무했던 송차장 본인이 뻑한 3패를 다른 선수가 회수해 갈 경우 ‘제기랄, 신작로 닦아 놓았더니 문둥이가 지나가네’라는 전무후무한 명언도 남겼다.


그 이후 나는 필드에서 신작로 공사는 다른 선수에게 양보하는 문둥이가 되고자 많은 공을 들이기로 했다.


■ 신석기시대(자금부)

인과응보니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밥벌이를 시작한 지 채 2년이 되지 않아 나는 몸소 체험했다.

수원지점 시절 대리들은 물론 그 위의 상위 책임자들을 모시는데 소홀히 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윗분을 모시는데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뛰어난 선임 직원 대신 당시 어는 사원도 발령을 원치 않는 곳인 아오지 탄광 수준의 자금부 자금 과로 나는 전보발령을 받았다. 바야흐로 융 니오 사변(6.25)이 터진 것이었다.


오늘은 평일 오후 10시경에 퇴근을 할 수 있었다. 같은 과의 전입 선임인 동료 직윈들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들 좋아라 했는데 나만 표정이 굳어 있었다. 이 정도 시각의 마감이면 선방한 거라는 의미를 나중에야 알았다.


천호동 누나 집에서 여의도까지가 나의 출퇴근 코스였다. 버스 한 번과 전철 중간 환승 포함 두 번 이런 시스템이었고 만원 전철마다 배치된 푸시맨의 일거리가 많아 상당히 분주했던 시절이었다. 출퇴근 시의 혼잡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나서 늦은 밤까지 밥줄에 매달리다 보니 체중이 두 달 만에 7 kg이나 줄었다. 본의 아니게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이렇게 야근이 잦다 보니 아무래도 회사 본부 계좌의 최종 잔고 대사가 마무리되기까지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는 데는 야시장 개설을 통한 필드 경기만 한 것이 없었다.


영업점 마감은 물론 본부 전부서 특히 운용부서의 거래 마감 후 잔고가 나와야 회사 전체의 잔고가 나오는 시스템이었다. 밤늦은 시각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팔자였다.


신석기시대의 단연 백미는 월약중의 이른바 ‘월약을 똘똘 말아내는 공정’이었다. 줄여서 ‘똘똘 말이 윌’이라 불렀다.

첫판을 1일부터 시작하여 12월을 마감하면, 그다음은 2월부터 12월, 다음은 3일부터 12월 이런 방식으로 11윌, 12월을 마감하면 오르막길과 정확히 반대 코스인 내리막길로 열심히 윌을 똘똘 말게 되는 것인데 이건 수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순열’이었다. 첫 번째 게임에서 선이 소위 스타트 월약을 정하게 되면 그 이후에 선이 계속 바뀌더라도 이러한 진행 경로 내지 등산코스는 아무도 변경할 수 없이 구속이 되었다.

1월부터 5월까지는 모두 기본 5점으로 인정했다.

이 똘똘 말이 월의 등산로 정상을 밟은 후 최종 출발점으로 다시 하산하는 등산로를 완주하면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이었다. 이 ‘똘똘 말이 월’은 나중엔 자금부에서 특허출원까지 검토했다.

자금부를 거쳐간 직원들만의 모임이 매분기 한번 정도 있었다. 그동안 체력과 실력의 변화를 점검하는 아주 중요한 자리였다.


바닥에 본인이 쥐고 있는 것과 짝이 맞는 패가 없는 경우 신석기시대에 맹활약을 했던 한 선수는 ‘나를 버려’라는 멘트를 주문같이 날렸다. 결국은 쪽이 되거나 뻑을 유도하는 의외의 좋은 결과를 얻었다. 이는 ‘내려놓다, 마음을 비운다’는 아주 깊은 뜻이 있는 철학적인 가치관과 맞닿아 있을 듯했다.


최종 승자가 결정되어 게임이 종료되면 점수 계산을 하고 현금 보상을 받았다. 세 패를 흔든

사실을 깜박 잊거나 광박, 피박을 미처 챙기지 못하여 예기치 않은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일단 최종 승자가 점수를 외친 후엔 번복은 인정하지 않았다. 때론 패를 얼른 섞어 부담을 줄이는 영약 한 선수도 있었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몰라도 경계에 실패한 자는 용서하지 못한다’는 명언에서 ‘경계’를 ‘계산’으로 바꾸었다. 계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자는 용서하지 못한다로 멋진 패러디 실력을 뽐냈다.


필드에서 경기를 최종 마무리한 뒤 손익을 계산했다. 손익이 플러스인 선수가 마이너스인 선수에게 일정한 범위 내에서 돌려주는 '리베이트라'는 인간미 넘치는 좋은 제도가 있었다. 리베이트 비율은 사전에 정하지만 대략 80% 내외였다. 많이 돌려받으려면 많이 잃으라는 우스개 소리도 생겨났다. 실제로 옳은 이야기인지는 따져 볼 일이었다.


같은 패 석장을 회수해 오면서 현물 공출에 협조해달라는 의미로 ‘한 장 썩’이라 외치는 바람에 나는 ‘한 장 썩’이 내 별칭이 되었다. ‘필드의 귀염둥’이라 치켜세워 준 고마운 입사동기도 등장했다.


평소 여유 있는 판돈을 보유하지 않은 선수가 필드에 입장하여 이른바 지급불능이 되었다. 제발 ‘가리’를 하지 말라고 경고를 주면 그건 크레디트이라고 들러대기도 했다. 고스톱의 광풍이 회사에 까지 불어 한 때는 고스톱을 공식적인 회사의 문화로 인정하자는 창의적인 발상도 내는 직원들이 많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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