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속병 용기 시대(인천)
속칭 기계라고도 불리는 화투장은 48매에 불과했다. 이리저리 조합하다 보면 엄청난 경우의 수가 나온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한 확률의 범주에 들어올 수 있다.
같은 패를 두장이나 쥐고 있다 숙성기간이 지나서 던질 경우 쪽이 되거나 다른 선수로 하여금 뻑을 유도하는 경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유사한 사례로 여러 순번이 돌았는데도 선수들이 전혀 입질을 하지 않은 바닥 패는 뻑의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게 된다. 이에 나는 바닥 패에 들고 있는 패를 내리치면서 ‘이거 뻑인데?’하며 멘트를 날렸다. 이게 신통방통한 주문이 되어 예상이 제법 맞아떨어졌다. 이 뻑이 되는 찰나에 "어이 뺑글대리, 아이큐가 200도 넘나 보네." 하며 우호적인 추임새를 넣던 상급자도 있었다.
같은 패 네 장을 한꺼 번에 쥐게 된 경우를 '대통령'이라고 한다. 이때 여러 가지 보상안이 있다. 다른 참여 선수 중에서 한 명이라도 똥이나 비 3장을 흔들면 대통령에 취임은 했으나 보상은 전혀 받지 못한다는 것이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인천지점 지하실 고스톱 룰이었다.
평소 필드에서 수익률은 물론 승률도 별로 높지 않은 선수가 모처럼 선을 잡았다. 두어 박자 정도 쉬어 한참이나 망설이다 비 쌍피를 내던져 쪽을 만들어냈다. 순간 다른 모든 선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친구 아이큐는 측정 불가로 나왔다.
■ 청동기시대(영등포)
나는 명실상부한 금융기관 초급 책임자인 대리로 승진하여 영등포지점에 부임하는 조그마한 기쁨을 누렸다. 주간 5일 근무하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는 6일 근무제였다.금융기관에서 흔히 말하는
영업일 기준으로 1년은 대략 300일 내외였다. 사무실내 야간시장 개장일은 약 260일 수준은 족히 되고도 남았다. 초등학교 6년 개근상을 받았던 나는 옛 영광을 재현이라도 하듯이 휴가 기간을 제외한 야간시장 개장일에 개근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영등포시장로터리에 7층 빌딩으로 번듯하게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신사옥으로 이전하기 전인 구사옥은 임대건물이었다. 연식이 좀 오래되었고 사무실 내부 인테리어 역시 내세울 만큼 세련되지는 못했다. 오후 4시 30분에 정문 셔터를 내리고 금융기관에서 말하는 시재가 나오면 낡고 반으로 찢어진 국방색 군용 모포를 들고 영업점 양모 퉁이에 자리한 초라한 상담실로 우사인 볼트보다 빨리 달음박질하여 자리다툼을 했다.
선수로서 자리다툼은 물론 관객도 조금 더 좋은 로얄석을 차지하기 위하여 몸싸움이 벌어졌다. 로얄석은 웃돈이 붙은 암표가 돌아다닐 정도였다는 전설도 전해 내려 온다.
가끔 선약을 이유로 내가 경기 불참을 예고하면 상급자들은 뺑글대리가 있어야 재미있다며 꼬드김으로 나를 주저앉혔다. 영등포지점은 항상 불야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점 부임 후 1년이 지난 후 2개월정도는 이것저것 인정머리 없게 모두 뿌리치고 조기 퇴근힌 적이 있었다. 우리 집 큰애를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집사람을 챙기기 위한 부득이한 일이었음을 나중엔 다른 선수
에게 고백을 했다.
대부분의 영업점에선 매월 한번 정도는 책임자 회식을 했다. 식사 후엔 고스톱 야시장도 당연히 개설되었다. 고향 친구 모임에서 그 원조가 된 ‘고’라고 외치는 대신에 계속 판이 돌아가는 의미의 ‘원 뻉글’이라는 말을 내가 저작권자의 허락도 없이 무단 도용을 했다. 필드 위 선수들은 모두 배를 잡고 나뒹굴었다. 이래서 내가 ‘뺑글대리’에 취임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이제는 ‘뺑글부장’으로 격이 높아졌다. 이에 맞추어 뺑글이 또는 땡글이는 고스톱 게임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고스톱 애호가인 모 점장은 토요일 오후에 고스톱 목적의 책임자 회식을 소집했다. 계급이 깡패였다. 주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를 하는 것이 마땅해 보였다. 미리 예약이 된 고깃집에 먼저 도착한 점장은 특이하게도 양말부터 벗어젖히고 먼저 경기에 임하였다. 시간은 황금이었다.
모 메이저 항공사에선 투명한 최고급 화투를 자체 제작하여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아주 훌륭한 판촉물로 평가받을만했다.
초 중 말복날은 대부분 필드를 야외로 옮겨 경기를 이어갔다. 택시 기사들은 10만 윈 권 수표를 자연스럽게 주고받을 정도로 판의 규모가 컸다. 때론 개인택시까지 베팅을 하여 하룻밤을 새고 나면 차량의 소유자가 바뀌기도 했다. 이는 양대 명절 기간 동안 마작 놀이로 중국집 주인이 바뀌기도 한다는 전설에 버금갔다.
속임수로 가끔 8장 패를 들고서 작업을 하여 자뻑 등을 유도하여 게임에서 승리하고 많은 현금을 챙기는 경우도 있었다. 이른바 ‘작업’이나 ‘손기술이 들어갔다’고 불렀다.
사기도박은 도박죄가 아니라 사기죄였다. ‘우연한 승부에 의하여 재물의 득상을 다투는 것’이 도박인데 이 경우 승부를 조작하는 건 우연성의 결여로 사기죄로 보는 것이었다.
영업상 부득이하게 접대 고스톱 경기에 참여하는 일도 있었다. 상대방이 눈치를 채지 않고 자신의 실력으로 경기에서 승리하였다는 성취감을 안겨 주어야 제대로 된 접대가 되었다. 적당히 풀었다 당겼다는 해야 되는데 이 정도가 되려면 상당한 실력과 표정관리능력이 필요했다.
■철기시대(대전)
출신 고등학교 소재지를 연고지로 간주하는 회사의 지침에 따라 30대 말에 약 1년간 대전지점에 근무를 했다. 주 6일 근무인 당시 대전과 인천을 매주 왕복하는 주말 맞벌이 부부생활을 겪었다.
구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합숙소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대전 소재 타 점포의 직원도 같은 공간에서 생활을 했다. 상주 인력만으로도 고스톱 경기에 필요한 최소 인력을 이미 넘어섰다. 이른바 선수
층이 제법 두터웠다.
나는 오전 8시 전후 사무실을 나서서 오후 7시경에 복귀하는강행군을 했다.원거리에 자리한외곽
법인 영업에 매진했다. 주로 새마을금고나 신협을 대상으로 기존 고객 관리와 신규법인 개척이 주요한 나의 미션이었다. 일주일에 4 내지 5일, 하루에 250 내지 350킬로미터를 주행하는 고단한 여정이었다. 그야말로 힘든 외곽 법인 개척 영업이었다. 외부로 고객을 직접 찾아 나서서 자금을 유치한다는 것을 부각해 이른바 ‘앵벌이 영업’이라는 자조적인 용어도 등장했다. 내 보
금자리인 인천에 가야 하는 주말 말고는 거의 하루도 빠짐이 없이 필드에선 술을 곁들인 고스톱 야시장이 개설되었다.
고스톱의 승패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상대의 성향 파악과 필드에서의 행태 등의 면밀한 분석이 중요함은 물론이다.같은 패의 두장을계속 보유
하다가 어느 정도 숙성이 되었을 때 던지면서 ‘이거 한번 어떻게 대처하는가 볼 거야?’ 하는 나의 행태를 이미 파악한 선수가 “뺑글 과장님, 같은 패를 두 장이나 들었네요?”하는 예리한 분석에 나는 움찔했다.
이어 좌중엔 폭소가 터졌다.상대 선수가 바둑
이나 장기판에서 아주 예리한 수를 둘 경우와 같았다. 신의 한 수가 아닌 신의 일타를 휘둘렀을 때였다. 이를 보고는 '이야 독사다'하는 멘트를 자주 듣는 선수가 늘어났다. 어느새 합숙소는 독사들이 모여사는 지리산 뱀사골로 바뀌었다.
연일 계속되는 음주와 경기 참가에 잠자는 시간을 많이 양보한 나는 앵벌이를 지점 업무용 차량의 조수석에 앉아 코스 이동 간엔 탱크가 지나가는 수준의 코를 골아댔다. 이런 1급 기밀을 내 입사동기는 어는 새 실시간으로 파악했다.
전날 힘든 앵벌이와 음주 그리고 필드경기에 지친 탓으로 민방위 교육을 실내에서 받던 중이었다. 강당의 맨 앞줄에 자리를 잡은 나는 상체가 계속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럴 때마다 매번 양손으로 시멘트 바닥을 몇 번이고 짚어대던 해프닝도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저녁식사 후 일찍 잠자리
에 든 동료 직원을 필드경기에 참가시키려고 반강제로 한 쪽다리를 들고 질질 끌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