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첫 변곡점(5편 완)

고입 재수 시대

by 그루터기


우리 학원은 ●●고교 재수생 합격자 ●●●명

중 본 학원 출신 ○○○명이란 홍보 카피를 라

디오 광고에 쏟아부었다.


상급학교 배치 목적의 모의고사(배치고사)를 연 20번 치렀다. 지금은 좀 품위 있게 차트’라 하지만 꺾은 선 그래프로 학생 개인의 성적 흐름을 한눈에 쉽게 볼 수 있도록 한 장의 B 5

용지에 가로로 작성했다. 시험일, 취득점수,

석차, 지원 가능 학교, 최종 결정교 등 모든 자료

가 망라되어 있었다. 이는 이 학윈 자랑거리 중의 중요한 아이템이었다.


부모와 최종 면담 후 원장은 기분 좋습니다. ●●

학교 합격을 자신합니다. 둘 중의 하나의 멘트로 마무리를 했다.


길고 긴 어두운 터널 같은 여정의 성공 여부가

름 나는 결전의 날이 드디어 밝았다. 시험 전일 어머니는 선화동 시대를 마감하고 삼성동 시대를 연 자취방으로 급거 우리를 찾아 나섰다. 신흥동과 보건소를 왕복하는 26번 시내버스 노선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대전소방서 인근의 단층 슬라브 양옥 문간방으로 보따리를 바리바리 싸가지고 도착했다.


나는 어머니 누나와 함께 택시를 이용하여

결전장으로 이동을 했다. 문전옥답에서만 생

산되는,참기름을 바르지 않아도 천연산 윤기

가 좔좔르는‘아끼바리벼 흰쌀밥’을 이단으

로 된 찬합에 정성껏 담았다. 토종 국내산 고춧

가루를 듬뿍 뿌린 최고급 국산 한우 쇠고깃국

을 보온병에 하나 가득 담았다. 물론 나의 시험

합격을 기원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우황청심환

을 복용하지 않은 것은 도핑 테스트를 걱정해서

도 아니었다. 분주한 나머지 깜빡 빠뜨린 것이었

다.


“서울에서 300명 정도가 내려올 거로 예상한

것과 달리 그보다 적은 200명 정도밖에 내려

오지 않았다. 긴장하지 말고 평소 실력만 충분히 발휘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우리 학원 출신 응시생들은 한데 모은 원장의 일갈이었다. 근거가 좀 희박한 수치를 들어가며 나름 격려를 했다.


당시 서울, 부산, 대구, 굉주, 인천 이른바 5대 도시는 연합고사 합격자를 추첨으로 학교를 배정받는 평준화 지역이었다. 비평준화 지역 중 가장 인구가 많은 곳이 6대 도시인 대전이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원정 입학을 오는 사태가 생겨났다.


1 교시 시험을 마치자 응시자와 학부모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나아가 술렁거리는 분위

기가 역력했다. “예년 대비 문제가 너무 쉽게 출제되었다. 종래 최고의 합격선이었던 185/

200을 훌쩍 넘어 이번엔 아마 190점도 합격을 장담하기 어려워 보인다. 같은 말이지만 오답수 기준으로 10을 넘어서면 합격이 어려워 보인

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나머지 2교시 차를 마친 후 점심시간이었다.

아끼바리벼 쌀밥이나 쇠고깃국은 내겐 전혀 관심

밖이었다. 무려 스무 번이나 실시된 배치고사

에서도 문제의 난이도가 낮을 때보다 높을 때에 상대적으로 석차가 상위에 랭크되었던 나는 긴장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교시까지 치른 과목 중 정답 여부가 이슈가 되는 것들을 친구들과 체킹

한 결과 일단 현재까진 다행히 오답은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1교시 후에 박카스 한 명을 원샷한

것 말고는 식음을 전폐했다. 오후 시간에 잘 버티

어 보자는 각오를 다지며 정해진 시각보다 훨씬 이른 시각에 고사장으로 들어섰다.


드디어 오후 일정이 마무리되어 모든 시험은 종

료되었다. 모든 응시생들은 학원으로 이동하여 문제 풀이와 가채점에 협조하여 달라는 학원 측

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 각자 버스나 택시 등을 이용해 200여 명도 수용 가능한 강당에 가까운 강의실로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응시 순서대로 각각의 괴목 담당 선생님이 긴장

된 모습으로 교단으로 올라섰다. 양복 상의 안

주머니에서 실제 시험용지를 자신 있고 너무

나도 당당히 꺼냈다. 즉시 문제풀이에 들어갔다. 재주들도 대단했다. 모든 시험문제는 전혀 공개

하지 않는 것이 확고부동한 원칙이거늘 어떻게

된 것인지 모두가 의아해했다. 네트워크이나 아니면 응시생을 가장한 일용직을 교시마다 배

수로 여유 있게 고용했을까 등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했다.


짧지 않은 시간에 걸쳐 모든 문제 풀이를 마친 후 응시생들은 본인의 가채점 결과를 학원 측에

제출했다. 강의실 중간 좌석 즈음에서 초조하게

광경을 지켜보던 원장은 매우 상기된 얼굴로

제법 높고 넓은 나무 재질의 강단으로 헐레벌떡 뛰어올랐다.


먼저 전과목 만점자 손들어 보아라에 2명의 친구

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약간 떨리는 목소

리로 이어 거기 두 학생, 체력장도 만점인가?

예 맞습니다. 답변이 이어졌다. 자 모두 눈 감아

라! 평상시 늘 그랬듯이 부모님 은혜 등 효심에 관해 일장 훈시를 마친 후 ‘어머님 은혜’ 노래를 지휘봉을 인계받아 제창을 유도했다. 장내는 말

그대로 흥분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가채점을 마친 나는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주

르륵 흘러내렸다. 합격선이 15개 이내로 결정

되면 어떡하지, 고생하신 부모님은 물론 형제들

에게도 어떻게 낯을 들 거며 앞으로 내 인생 항

로는 어떻게 될까, 온갖 상념들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결코 순탄치 않은 인생 여정이 이어질

텐데, 두 번이나 엘리트코스 입문에 실패하는

건데 정말로 앞이 깜깜했다. 학력 학벌위주 사회

의 문제점을 언론 등에서 많이 지적하고 해결

책이 어쩌니 마구 떠들어 대던 시절이었다. 하

지만 현실에서 나는 나름 엘리트 코스의 첫 단

추를 끼우는데 재도했건만. 또 실패했다. 향후

인생 항로는 결코 순탄치 않을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형은 성공 학원 사무실까지 나와 입시지도 관

계자와 상담도 하고 합격선에 걸릴 경우 학령에

가운 자, 과목 우선 등 동점자 처리기준까지 따져가며 본인인 나 이상으로 걱정을 해주는 끔찍한형제애를 보여주었다


드디어 뚜껑이 열렸다. 합격은 190/200이나

191/200라는 말이 돌았는데 전자로 보였다. 200점 전과목 만점자는 9명으로 결론이 났다. 87/200의 득점에 그친 나는 또다시 실패의 쓴

잔을 들었다. 응시대상 학교를 최종 결정할 때 ‘합격을 자신한다’는 말 대신에‘기분 좋습니다’

라는 말을 들은 친구들의 합격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내가 응시했던 학교 재수생 합격자 ●●● 명 중 본원 출신이 ○○○명이라는 라디오 광고를 전해 들은 친척 누님은 저렇게 많은 합격자가 나왔는데 태준이는 당연히 합격했을 거라고 믿었단다. 역사이래 시험 문제의 난이도가 기록적으로 낮아 나에겐 결코 유리하지 않았고 꺾은선그래프로 표시한 성적의 흐름을 보면 편차가 좀 컸던 것도 우호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내 인생 항로에서 하나의 변곡점이었다.


내가 만약 당시 첫 단추를 잘 끼우는 데성공했

더라면 내 지금까지의 인생 항로는 분명히 달라

졌을 것이다. 그거야 인력으로 좌우할 수

없는 운명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렇게 글을 쓰고 있는 또 다른 항로도 그런

대로 괜찮은 것 아니냐고 스스로 토닥여 본다.


직업 덕분이기도 하지만 스마트폰에 저장

된 번호가 3,000개를 상회하고 회원수

350, 80, 40, 30명.... 크고 작은 단체 카톡

방에 참여할 수 있다. 고향, 고교, 대학 동문

동창 모임에서 많은 동기 선후배를 수시로

만날 수 있다. 나를 수시로 찾는 많은 사람

이 있고 나 또한 찾아 나설 수 있다. 무엇보다

변변한 내 글을 기꺼이 끝까지 읽고 전폭적인

응원을 보내주는 이가 있다. 이에 오늘도 나는 생활을 이 어가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번 주말엔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두 길을 함께 갈 수 없어서 한 길을 택하였다.

그것 때 문에 모든 게 달라졌다는 내용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란 시를

찾아서 다시 한번 음미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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