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맥 선생과 복합기

by 그루터기

나는 금융기관 근무를 정년퇴직으로 마감했다. 최근 약 10년 동안 독특한 취미생활을 했다. 종이신문을 복사하여 활용하는 이른바 오프라인성 신문 스크랩이 그것이었다. 내가 퇴직을 한 후에도 이 독특한 취미생활을 계속 이어갔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이지만 복합기의 비싼 가격과 놓을 만한 공간 등이 문제였다.


나는 퇴직일 약 3개월 전 엄청난 사고를 저질렀다. 최신 사양의 고급 노트북을 장만했고 스마트폰도 최신식 접이 폰으로 바꾸었다. 이 사고를 치는 과정에 S 전자 매장을 자주 드나들었다. 오늘도 조그마한 볼일이 있어 정문을 들어섰다. 그 순간 입구에서 멀지 않은 10시 방향의 진열대에 놓인 물건에 갑자기 시선이 꽂혔다. 복사, 인쇄, 스캐닝, 팩스 기능을 모두 갖춘 복합기였다. 종래 영업점 사무실에서 나의 분부를 충실히 받들던 복합기 사이즈의 1/6 정도에 불과한 앙증맞은 물건이었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이동에도 커다란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고 가격대는 사무실 것의 1/5 수준에 불과했다. 이게 웬 떡인가 했다. 오늘 하루는 내가 이 복합기를 확보한 것만 해도 충분히 남는 장사로 보였다.


드디어 복합기가 내 사무실로 행차를 마쳤다. 책상 위 한편에 자신의 자리를 야무지게 잡았다. 출입문을 열치고 좀 먼발치에서 이놈을 쳐다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절친 선배와 간단한 호프 타임까지 가졌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는 말도 있었다. 이 보물덩어리를 들여놓은 지 보름이 지나지 않았다. 예기치 않았던 엄청난 일이 터졌다.


남들이 보기엔 별것 아닌 이번 일에 내가 혼자 호들갑을 떤 데 대한 죗값을 단단히 치르게 되었다. 토너가 부족하니 교체하라는 메시지가 적힌 팝업창이 불쑥 떠올랐다.“아니, 이 기계를 사용한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토너의 수명이 다 되었다니!”나는 혼자서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도록 어이가 없었다.


이 복합기의 토너는 대형 상품의 그것과 달랐다. 이력서 기준으로 1,500매 정도 복사를 하면 수명을 다한다. 게다가 토너의 가격은 자그마치 55,000원이었다.‘에이, 이런 사기꾼이 어디 있어?’나는 속으로 외쳤다. 너무 황당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결국은 이번에도 나는 보기 좋게 또 한 번 ‘낚인'’셈이 되었다. 재직 시절에 사용하던 복합기의 토너는 약 25,000매 인쇄가 정량이었다. 토너 가격은 10만 원이었다. 두 물건의 비용구조를 잠시 분석해 보았다. 내가 마련한 복합기의 토너 비용만을 따져 볼 때 10배나 비싼 가격이었다. 이거, 참으로 배보다 배꼽이 커진 상황이 되었다.


그 후 복합기를 구입한 지 한 달 정도 지났다. 이번엔 폐 토너 통을 교체해야 했다. 단가는 15,000원이었다. 설상가상이었다.이런 어마어마한 사건을 주위의 지인들에게 부끄럽게도 고백하고 의견을 물었다. 나를 제외한 보통 사람들은 이미 이 정도는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게 이런 것이지요. 그 회사는 복합기보다는 토너를 팔아서 수익을 내기 위한 것이지요. 이제껏 그것도 몰랐나요?”이런 냉정한 답변만이 돌아왔다. 정말로 나는 너무나도 잘 낚이는 숙맥이었다. 내가 최근까지 투입한 토너 비용을 따져 볼 때 벌써 복합기를 추가로 두 대나 더 들여놓은 셈이었다. 참으로 울화통이 터졌다.


이즈음 나는 금융상품의 완전판매를 위해 도입한 미스터리쇼핑 테스트에서 손님을 가장한 요원에게 자주 엮이곤 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런데 이번 복합기 사건에서 보기 좋게 낚였다. 나는 금융이란 부분에서 남보다 조금 더 알고 있을 뿐이었다. 지식은 몰라도 사회경험이나 지혜 등에서는 기초 수준에도 미달했다. 이제 자책을 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금융기관의 영업행위에 관해서 감독기관이 완전판매를 강조한다. 불완전 판매로부터 소비자를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각종 규제망이 매우 촘촘하다. 사실 실제 영업 현실과 감독기관이 요구하는 수준과는 간극이 매우 크다. 매각 상품의 위험도, 상품구조, 투자대상, 환매 절차 등에 관한 내용은 금융상품의 해당 투자설명서에 모두 들어 있다. 이 투자설명서의 내용을 빠짐없이 고객에게 설명하고 교부를 요구하는데 이는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감독기관으로서 면피를 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 보인다. 금융소비자가 민원 등 이의를 제기한 경우 감독기관은 금융기관 직원에게 강도 높은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현실이다. 무릇 불완전 판매는 금융상품에 한하지 않는다.


전자제품의 판매과정에서도 불완전 판매는 널려 있다. 이번 복합기 사건의 경우에 판매직원은 나에게 토너의 단가, 평균수명 등을 다른 복합기와 비교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런 전자제품의 판매와 관련해서도 완전판매의 기준과 그에 합당한 책임 등을 명문화하고 감시 감독하여 소비자의 피해를 배상하는 제도의 마련이 시급해 보였다.


토너에 관해서 사전에 설명을 하지 않은 것은 주요 설명의무에 위반한 것으로 보아 마땅하다. 당해 상품에 대한 매출 증대를 위한 마케팅 전략으로 돌리기엔 너무나도 소비자의 피해가 크다. 종래 사기꾼의 표적이 되기 쉬운 집단으로 공무원 퇴직자, 전직 교원 등을 자주 거론했다. 작금엔 금융기관 장기근속자도 이 범주에 새로이 편입되었나 보다. 이런 추이로 보면 나는 연말까지 이 작은 복합기를 4대나 더 들여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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