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도 78점이지요?”
“아이 또 떨어졌네. 이 것 참.”
내 앞자리의 응시자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나는 자동차 운전면허 필시 시험에서 이번에도 또 고배를 마셨다. 운전면허를 어서 따라고 지속적으로 집사람이 보챘음에도 차일피일미뤘다. 최근에 면허시험을 취득하는 대장정에 나섰다.
“용준아 너는 맥주병이야, 자전거도 탈 줄 모르고헤엄도 칠 줄 모르잖아?”초등시절 형이 늘 나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얼마 후 가까스로 이 맥주병에서 벗어난 기억이 새롭다.
나는 그동안 운전 면허와 승용차가 없는설움을톡톡히 겪었다. 업무용 승용차가 내 차지가 돌아오지 않을 경우 발로 뛰어야 하는 외부 영업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동료나 아래 직원에게 아쉬운 부탁을 하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그래서 이번에 아주큰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이 운전면허 첫 관문인 겨우 필기시험에도 두번씩이나 낙방을 했다. 나는 또 형이 말한 ‘맥주병’으로 다시 돌아왔다.운전을 아예 할 수 없는 데다 컴퓨터를 다루는 실력도 바닥이니 이는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전거 타는 법과 헤엄을 배웠음에도 도로 맥주병이 되었다.
사람의 생명과 재산 등 안전에 관련되는 것이라는 이유로 최근 운전면허 취득 시험을 대폭 강화했다. 종래 아예 없었던 주행 시험에다 응용 학과시험도 추가되었다. 내노라는 국가고시 시험에버금가는 틀이 갖추어진 셈이었다.
운전학원도 이원화되었다. 일반 학원과 달리전문학원은 경찰관 입회하에 학원 내 자체시험이 가능했다. 첫 관문인 필기시험을 너무 우습게 알았던 대가를 단단히 치렀다. 4지 선다형에다 이 정도면 80점은 넘어서겠지 하는안이한 판단 때문이었다. 처음 낙방을 한 후수입인지를 다시 구입하여 한 번 사용한 원서용지에 다시 추가로 부착했다. 수입인지를추가로 부착하고 다시 접수하러 길게 늘어진줄 뒤에 서다 보니 창피했고 자괴감마저 들었다.
“야, 그것 운전면허 시험도 공부를 하지 않으니
떨어지더라?”
나를 어릴 적에 맥주병으로 놀리던 형의 최근 이야기였다. 두 번째 시험일까지는 열흘의 여유가 있었다. 누구는 하루 아니면 한나절을 공부하니 거뜬했다는 주위 사람들의 성공기가 나에겐 무용담으로 들렸다. 10일 씩이나 남았는데 천천히 또 준비하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친구들과 약속과 고객 접대 일정을 뒤로 미루지 않고 본래 일정대로 진행했다. 그러다 보니 시험일이 또 금세 코앞에 닥쳤다. 몇 번의 술좌석에 동참하다 보니 그랬다.
나는 예전 국가고시를 준비할 때부터 남달리 책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그래서 이번 운전면허시험 준비에도 출판사를 달리하여 여러 가지 교재를 준비했다.
두 번째 시험에도 이 정도면 되겠지 하다 또 고배를 들었다. 가문의 수치라 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다.“아무래도 당신은 1종은 무리이고 2종으로 갈아타야 할 것 같아.”집사람은 나에게 염장을 질렀다. 필기시험 50문항을 모두 푼 다음 나는 가채점을 했다.이 정도면 80점을 넘어서겠지 하는 예상은 두 번이나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시험 종료 후엔 즉석에서 채점이 되고 합격여부도 화면에 올랐다.
전문학원에 등록 후 필기 수업도 수강하는 등나름 노력을 한 결과였다. 천신만고 끝에 세 번째 시험에선 우수한 성적으로 당당히 합격선을 넘어섰다. 80점을 초과하는 점수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선후배 변호사나 현직 법관이 운전면허 필기시험에 떨어진 경험이 있다는 것이 나에겐 면죄부가 되지 않았다. 또한 이를 변명이나 위로로 삼을 수도 없었다.
운전전문학원에 등록하기까지엔 많은 애로가있었다. 오후 6시 반을 택했는데 사무실을 5시30분 정시에 나서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점장에게 사전에 허락을 구했다. 그 이후 타임을 택하면 귀가 시각이 너무 늦을 것 같았다. 점장의 승낙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다른 직원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같은 타임의 수강생들끼리 모이는 운전학원 동기들도 생겨났다. 학원의 기능 강사에게 우리같은 금융기관 직원처럼 결코 친절을 기대할 수없었다. 연배가 한참 위인 수강생에게도 거리낌 없이 ‘아무개 씨’라 불렀다. 제대로 된 조작을 못하면 심하게 호통도 쳤다.
T자, S자 코스, 전후 주차, 장내 트랙 주행,도로 위 주행 등을 익혀야 했다. 연습 중 수강생의 과실사고에 관해서 모든 책임은 자신의몫이라며 겁을 잔뜩 주었다. 주말엔 추가 비용을 부담하며 장내 주행 연습을 이어갔다. 그런데 나는 출발을 하자마자 꼭 5점씩 감점을 당했다. 아무리 원인을 찾고자 했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혹시 방향표시등이 꺼지지 않도록 조작봉을 일정시간 잡고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안전 벨트의 줄을 꼬인 상태로맨 것이 그 이유임이 밝혀 졌다. 기능 강사들은 이를 가르쳐 줄 아무런 의무가 없었다. 학원동기의 도움으로 어렵게 알아냈다. 잠깐 방심을 하다 보면 내가 운전 중인 차량은 장내 트랙의 구분 표시인 턱을 넘어 엉뚱한 곳으로 주행하는 사고도 쳤다.
“사고 날 뻔했어요. 차를 옆쪽에 세우세요. 불합격입니다.”도로 주행시험을 이어 가던 중이었다.입회한 경찰의 질책성 명령이 떨어졌다. 내가 기어 변속을 미숙하게 조작하던 중이었다. 운전면허 시험의 문턱이 이토록 높은 줄은 미처 몰랐다.나는 일찍이 음치, 몸치, 길치, 기계치 이 네 가지부문에서 정상에 오른 바 있었다. 이 운전면허 시험에서도 이를 유감없이 자랑했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도로 주행 시험에 드디어합격했다. 그 후 20문항이 출제되는 4 지선다형 응용학과 시험엔 재수를 하지 않고 한 번에통과했다. 드디어 명실상부한 공인 국가자격 시험에 합격했다. 세련된 디자인의 빛나는 면허증을 손에 넣었다. 드디어 나도 해냈다.
그 이후 정권이 교체되고 운전면허시험 제도는최고 권력자의 자상한 배려에 힘입어 대폭 간소화 되었다. 응용학과시험이 없어졌고 필기시험의 합격선도 10점씩 각각 낮아졌다. 결국 나는누구보다 비용을 많이 들였다.
게다가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거쳤다.지름길이나 보다 손쉬운 코스 대신 고난의 가시밭길을 선택한 지진아로 이미 낙인이 찍혔다. 이후 나는 대전지점으로 전보발령을 받았다. 이곳에선 내 이름으로 중고 승용차를 구입하여 발로뛰는 영업의 진수를 배웠다.
내가 어릴 적엔 자동차 운전 기능은 하나의 재능이었다. 운전사란 하나의 독립된 직업이었다. 하지만 이젠 기본적으로 모두 갖추어야 할 기능이 되었다. 이른바 대중화된 것이다. 컴퓨터를 다루는 재능도 마찬가지이다. 군대의 타자병이나 관공서 회사의 타이피스트란 자리가 없어진 지 오래다. 이젠 이런 기능이 없으면 아주큰 결격사유가 되는 세상이다. ‘변화에 빨리 적응하는 자가 최종 강자다’란 말이 딱 들어맞는이야기이다.
건강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시대이다. 좀 걷거나 뛰거나 해도 될 거리 또는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할 수 있음에도늘 승용차 신세를 고집한다고 집사람은 나에게 지청구를 해댔다.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르고 따낸 운전면허증에 합당한 예우를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얼버무렸다. 고향 동기 1박 2일 모임이나 경조사 때 친구들을 실어나르는 ‘달구지’ 역할을 지금도여전히 잘 해내고 있는 것으로 위로를 삼으련다.
“너는 왜 이렇게 고달픈 팔자를 타고났느냐”라고 이르던 어머니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