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번지 이야기(1편)

by 그루터기

초등학교 2 학년 초여름이었다. 사상 가장 큰 기상이변이 일어났다. 알갱이 크기와 수량면

서 압도적인 우박 사태 가 벌어졌다. 수업 중 내리기 시작한 우박은 수업과 청소를 마친 후

에도 그치지 않았다. 한참이나 기다렸다 교

실문을 나섰다. 우박은 여전했다. 폭우가 억

수같이 쏟아지는 하교 길에 늘 그랬듯이 우선 교문에서 가장 가까운 "초째 좀 빵"(첫 번째 가

게) 처마 밑으로 옹기종기 모여 쏟아붓는 우박

을 피했다.


8명의 대가족인 우리는 비 오는 날 우산 차지

가 돌아오지 않았다. 가랑비는 물론 빗줄기가 굵어지더라도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우산도

없이 거니는 사람"이 되었다. 가끔 운 좋게 여유

가 있어 할당이 되었다. 하지만 질긴 천 소재의 우산 지붕과 철재 우산살로 짜인 폼나는 우산

은 아예 기대를 할 수 없었다. 대나무 살과

붕이 비닐로 된 우산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비닐 우산으로 역부족이었다. 장마철에 내리

는 게릴라성 집중호우는 물론 비가 거친 바람

을 동반하는 경우였다. 우산 지붕이 뒤집어지

고 우산살이 부러지기 일쑤였다. 웬만한 경우

가 아니면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서는 것을 아예 포기했다. 동요 가사에서 등장하듯이 "빨간 우

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 이 자연스럽게 연 출되었다.


이래서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반갑게 맞이하곤 했다. 나는 이런 연유로 비를 구경하고 빗소리를 즐겨 듣고 내리는 비를 일부러라도 직접 맞아도 보는 이름하여 '비 애호가'가 되었다. 지금과 달

리 공해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던 당시 몸에 해롭다는 산성비 운운은 시기상조였다.

스무 살 전후엔 카세트 레코더용 공 테이프에 비

노래만을 녹음하여 오랜 기간 반복하여 듣고 다니기도 했다.


이 역사적인 사태에 등장한 우박을 머리 위에 정통으로 맞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팔

뚝 위에 접종하는 예방주사 통증처럼 따끔

따끔했다. 가끔 아주 월등하게 큰 덩어리를 맞

게 되면 억 소리가 절로 나왔다. 300번지 텃밭

흙벽 담 아래 띄엄띄엄 자라고 있었다. 그 구덩이를 출생지로 두고 담벼락을 기어오를

며 자라던 그 넉넉하게 너른 호박잎은 모두 커

다란 구멍 투성이로 바뀌었다. 거의 수확기에

이른 농토의 보리 군락은 예외 없이 죄다 쓰러

졌다. 걷이를 전혀 기약할 수 없어 완전한 '피농'

이 확실시되었다. 농민들은 모든 일손을 놓고 망연자실했다.


지금처럼 비닐하우스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가끔 볼 수 있는 비닐하우스

도 이 우박을 감당하지 못했음은 물론이었다.

아직 10대에 진입하지 못했다. 나는 당시 이 사태의 기록이 지금까지도 경신되지 않을 거라

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가끔 역사적인 기상이

변이 생길 때면 연세 지긋하신 분들의 증언을 곁들인 보도를 접했다. 나도 이젠 이런 역사적 증인으로 나서도 결코 부족하지 않은 연식이 되었다.


300번지로 돌아온 나는 노란 알루미늄 대야에 수정처럼 투명한 우박 덩어리를 하나 가득 담아

놓고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큰누나를 발견

했다. 마당에 쌓인 우박 덩어리는 대나무 마당

비로 힘들게 한쪽으로 쓸어 모았다. 자그마한

우박 산더미가 완성되었다.


‘초째좀빵’(첫 번째 가게)은 초등학교 정문에서 가장 가까이에 자리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

다. 65세 전후되는 노인부부가 꾸려갔다. 각종 학용품 과자, 빵, 주전부리 등을 취급했다. 지금

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대단한 고령자였다. 단신

인 주인장은 검은색 뿔테 돋보기를 착용했다. 그럼에도 시력이 썩 좋아지지는 않았다. 학교 정문에서 지근거리였기에 점심시간은 물론 10분밖에 되지 않는 쉬는 시간에도 필요한

물건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이 가게의 가

장 큰 장점이었다.


당시 화폐단위는 ‘원’이 기본이었지만 일부 ‘환’ 단위도 통용됐다.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은색 오 십환 동전이 그것을 확실히 말해 주었다. 10원 이하 낮은 단위 지폐를 동전으로 막 전환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환이 아닌 제대 '윈'기준의 일, 오, 일십 원 단위의 동전은 나중

에 등장했다. 종전에 발행되었던 일, 오, 일십 원

의 지폐는 한국은행에서 발행을 중단했고 유통

되는 지폐들은 회수 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보

다.


상대적으로 보기 힘들었던 이 1, 5, 10원권 지

폐가 문제였다. 당시 인쇄기술은 그리 발달하

지 못했다. 이 지폐를 물에다 일정한 시간을 담

불리게 되면 신통방통하게도 앞 뒤면이 손상

되지 않은 상태로 깔끔하게 쪼개졌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이렇게 감쪽

같이 쪼개진 지폐를 귄 종별로 서너 장을 들고

두세 명 친구들이 주로 야간에 초째좀빵으로 들어섰다. 당시 가게 영업장의 조명 시설은

보통 가정집에서 사용하는 용량인 30W 수

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형광등도 아닌 뿌

연 간유리 알전구 하나밖에 없었다. 2.0 시력

의 초롱초롱한 내 눈으로도 간유리 알전구 아

래에선 지폐의 진위여부를 확실하게 가려낼

자신이 없었다. 돋보기를 쓴고렁의 주인장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짓궂은 내 친구들은 본인들이 가진 지폐 액면의 정확히 두배에 해당되는 주전부리 등을 아무 탈없이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조씨네 좀 빵엔 풍선 등 뽑기를 하러 친구들이 자

주 몰려들었다. 기본 참가비 1원을 내면 종이판 위에 있는 조그마한 동그라미 모양의 선택지를 떼어내는 방식이었다. 아주 큰 사이즈의 풍선이

캐러멜 여러 개가 들어 있는 케이스가 당첨돼

는 일확천금 꿈을 꾸곤 하지만 항상 수포로 돌

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는 "꽝"이 되거나 기본 참가비 1원 상당의 제일

작은 풍선이나 주전부리가 당첨되는 게 보통

이었다.


대박이 되는 선택지는 주인장이 미리 모두 떼어

내버리기 때문에 일확천금은 아예 윈 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불공정한 게임으로 주인장만 돈을 버는 구조였다. 어린이들 동심을 멍들게 한 씁쓸

한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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