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중반의 면소재지 시골 농촌이었다. 때문
에 손꼽을 정도의 집안 말고는 경제적 형편에 여
유가 없었다. 나는 개구멍을 가로질러 지름길로
이 선배 집으로 가끔 마실을 갔다.
하루 세끼 식사 중의 하나인지 간식인지를 물어
보기도 민망한 처지였다. 흥부전에 등장하는 박
나무였다. 보통 농촌의 초가집 지붕 위에 탐스럽
게둥글 둥굴 한 모습을 뽐냈다. 그 나무 열매를
반으로 쪼개어 속을 깔끔하게 비워냈다. 재질이 플스틱인바가지가 등장하기 전이었다. 그 시절 줄곧 사용해 왔던 냉면 대접 만한 크기의 식물성 재질의 바가지였다. 두부는 물론 무조각, 고추 토
막 등 일체의 식재료라곤 아예 볼 수없었다. 이 바
가지엔 조선 강된장만을 풀어서 끓여낸 된장국
을 담고 있었다. 쌀이라곤 한 톨도 섞이지 않은 꺼칠한 100% 순종 보리밥을 최소한의 반찬
인 김치도 없이, 대충대충 말아 꾸역꾸역 목구
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참으로 서럽고도 슬픈
광경을 목격했다. 순간 나는 어린 나이에도 울
컥했다. 당장 내일의 생존을 걱정해야하는 절대
빈곤층이었다.
이 식물성 용기는 바가지, 밥그릇, 국대접 등으로
두루 사용했다. 된장을 제외하면 간장이나 소금,
물이 대부분의 성분이 되는 ‘맹탕의 멀대 국’이었
다. 부모님을 잘 만난 나는 감사하는 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아버지는 2남 3녀 중의 막내였다. 우리 큰집의
사정으로 300번지에서 어머니가 그 많은 제사
를 준비하여 모셨다. 제주인 아버지를 기준으로
4대 봉사를 했다. 여덟 분, 후손을 두지 못한
큰 할아버님 내외 두 분, 일찍 작고하신 큰어머
님 한 분 하여 기제사만 11회였다. 양대 명절
차례 2회까지 따지면 1년 13회였다. 매달 평균 한번 제사를 모셨다. 어머니의 고생과 어려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삼 형제는 300번지 초가집의
본채에 두 누나와 여동생 세 딸은 사랑채에 나누
어서 기거를 했다. 본채 안방에 8명 가족이
전부 한데 모여 식사를 했다. 세 아들은 아버지
와, 세 딸은 어머니와 겸상을 했다. 식사 중간 정
지(부엌)를 다녀오는 일은 주로 어머니나 두 누
나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식사 시간엔 8명의 가
족 모두가 함께 참석하여야 한다는 것을 늘 강조
했다. 평일의 아침, 저녁식사, 방학 중의 점심도 마찬가지였다. 장거리 여행 등 부득이한 경우는
예외를 인정했다. 부모님께 야단을 맞아서, 밥
맛이 없어서 등은 불참의 이유가 될 수없었다.
두 누나의 어려움이 있었다. 어느 재벌 회장의
‘밥상머리 교육’에 버금갔다.
고종사촌 형의 말을 빌자면, 제사가 많은 외갓집
에 가면 항상 먹을 것이 있고 특히 설날엔 떡국을
두 그룻이나 비울 수 있다고 했다. 기제와 달리 양대 명절준비 중엔 아주 큰 일거리가 생겨났다.
놋쇠로 된 그 많은 제기를 얼굴이 깔끔하게 내비
칠 정도로 빛나게 닦아야 했다. 지푸라기를 똬리
처럼 동그랗게 접은 위에 기와장을 부순 분말이
나 고운 재 등을 묻혔다. 수세미와 세제 대용으로 활용했다. 집안의 대청소 시전이었다.
“내일이 너희들에게는 할아버지이고 내게는 아
버지 제삿날이니 이발을 하고 오너라. 각골 이
발소로 가거라. 그래도 이발은 광성이가 잘한
다.”
나와 형은 한 달에 한번 꼴로 아버지로부터 이
런 지령을 받았다. 조상님을 기리고 모시는 마
음이 각별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경건한 마
음 가짐과 미리 준비하는 자세를 배웠다.
아버지는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할아버지가 타
계하는 바람에 만 18세에 가장이 되었다. 온
갖 종류의 직업이란 직업을 다 경험했다. 맨손
으로 일어난 전형적인 자수성가형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했
다. 채권자인 할머니가 300번지 본채 안방 아
랫목에 아주 들어 누워 기거를 했다.
중학생인 누나에게 채권자가 물으면 아예 학교
에 다니지 않는다고 대답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아버지는 얼마후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또 재
기를 했다. 아버지는 채권자인 할머니에게 매
년 가을엔 달구지편으로 김장용 소금 몇 가마
니를 지속적으로 보내주었다. 사업 실패로 실
의에 빠진 아버지에게 주위 친구, 친지는 땅문
서, 집문서, 현금 뭉텅이를 들고 아버지를 찾았
다. 아버지의 재기를 응원하고 기원했다.
아버지의 신뢰나 원만한 대인관계 등이 입증
되는 순간이었다. 자식이나 배우자를 자랑하
는사람들은 칠(팔) 푼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
와 달리 부모 자랑은 무제한으로 하더라도 전
혀 허물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지금도 믿
고있다.
300번지 농촌주택의 광 오른쪽에 자리했던 화
장실은 수세식이 아닌 ‘푸세식’(재래식)이었다.
6살 박이 나는 한쪽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는 바
람에 된장을 담는 크기 장독 변기에 풍덩 빠지
고 말았다. 비명을 지르고 어머니를 외치고
허둥지둥 허겁지접한 끝에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나는 따뚯한 물로 깨끗이 세척에 성
공했다. 어린 나이에 기상천외한 경험을 했다.
어른들의 말과 달랐다. 기대와 달리 이 때에 내
게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점포장 당시 나는 이번엔 꿈속에서 거대한
푸세식 화장실에 몸뚱어리 전체가 풍덩 빠졌다.
변기 독이 아닌 넓디넓은 심해 바다를 유영하듯
이 헤엄을 치고 다녔다. 꿈에서 깨어난 날 내가
고객에게 사준 주식 종목이 상한가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새벽 일찍이 사무실 근처 백반집 식탁 위에 보
통 크기의 2배나 되는 계란 쌍알 프라이가 울라
왔다. 그날도 역시 손님이 보유한 종목이 상한
가를 기록했다.
꿈이 아닌 실제 재래식 변기에 빠지는 것은 결
코 바라지 않는다. 그러한 일이 꿈속에서 일어
난 날, 쌍알 프라이가 나오는 식당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두 가지 조건이 함께 자주
일어나기를 터무니없게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