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번지 이야기(7편)

by 그루터기

60년대 중반의 면소재지 시골 농촌이었다. 때문

손꼽을 정도의 집안 말고는 경제적 형편에 여

없었다. 나는 개구멍을 가로질러 지름길로

배 집으로 가끔 마실을 갔다.


하루 세끼 식사 중의 하나인지 간식인지를 물어

보기도 민망한 처지였다. 흥부전에 등장하는 박

나무였다. 보통 농촌의 초가집 지붕 위에 탐스럽

둥글 둥굴 한 모습을 뽐냈다. 그 나무 열매를

반으로 쪼개어 속을 깔끔하게 비워냈다. 재질이 플스틱인가지가 등장하기 전이었다. 그 시절 줄곧 사용해 왔던 냉면 대접 만한 크기의 식물성 재질의 바가지였다. 두부는 물론 무조각, 고추 토

막 등 일체의 식재료라곤 아예 볼 수없었다. 이 바

지엔 조선 강된장만을 풀어서 끓여낸 된장국

을 담고 있었다. 쌀이라곤 한 톨도 섞이지 않은 꺼칠한 100% 순종 보리밥을 최소한의 반찬

인 김치도 없이, 대충대충 말아 꾸역꾸역 목구

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참으로 서럽고도 슬픈

광경을 목격했다. 순간 나는 어린 나이에도 울

컥했다. 당장 내일의 생존을 걱정해야하는 절대

빈곤층이었다.


이 식물성 용기는 바가지, 밥그릇, 국대접 등으로

두루 사용했다. 된장을 제외하면 간장이나 소금,

물이 대부분의 성분이 되는 ‘맹탕의 멀대 국’이었

다. 부모님을 잘 만난 나는 감사하는 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아버지는 2남 3녀 중의 막내였다. 우리 큰집의

사정으로 300번지에서 어머니가 그 많은 제사

준비하여 모셨다. 제주인 아버지를 기준으로

4대 봉사를 했다. 여덟 분, 후손을 두지 못한

큰 할아버님 내외 두 분, 일찍 작고하신 큰어머

한 분 하여 기제사만 11회였다. 양대 명절

차례 2회까지 따지면 1년 13회였다. 매달 평균 한번 제사를 모셨다. 어머니의 고생과 어려움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삼 형제는 300번지 초가집의

본채에 두 누나와 여동생 세 딸은 사랑채에 나누

어서 기거를 했다. 본채 안방에 8명 가족이

전부 한데 모여 식사를 했다. 세 아들은 아버지

와, 세 딸은 어머니와 겸상을 했다. 식사 중간 정

지(부엌)를 다녀오는 일은 주로 어머니나 두 누

나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식사 시간엔 8명의 가

모두가 함께 참석하여한다는 것을 늘 강조

했다. 평일의 아침, 저녁식사, 방학 중의 점심도 마찬가지였다. 장거리 여행 등 부득이한 경우는

외를 인정했다. 부모님께 야단을 맞아서, 밥

맛이 없어서 등은 불참의 이유가 될 수없었다.

두 누나의 어려움이 있었다. 어느 재벌 회장의

‘밥상머리 교육’에 버금갔다.


고종사촌 형의 말을 빌자면, 제사가 많은 외갓집

에 가면 항상 먹을 것이 있고 특히 설날엔 떡국을

두 그룻이나 비울 수 있다고 했다. 기제와 달리 양대 명절준비 중엔 아주 큰 일거리가 생겨났다.

놋쇠로 된 그 많은 제기를 얼굴이 깔끔하게 내비

도로 빛나게 닦아야 했다. 지푸라기를 똬리

처럼 동그랗게 접은 위에 기와장을 부순 분말이

나 고운 재 등을 묻혔다. 수세미와 세제 대용으로 활용했다. 집안의 대청소 시전이었다.


“내일이 너희들에게는 할아버지이고 내게는

버지 제삿날이니 이발을 하고 오너라. 각골 이

발소로 가거라. 그래도 이발은 광성이가 잘한

다.

나와 형은 한 달에 한번 꼴로 아버지로부터 이

런 지령을 받았다. 조상님을 기리고 모시는 마

음이 각별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경건한 마

음 가짐과 미리 준비하는 자세를 배웠다.


아버지는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할아버지가 타

계하는 바람에 만 18세에 가장이 되었다. 온

갖 종류의 직업이란 직업을 다 경험했다. 맨손

으로 일어난 전형적인 자수성가형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했

다. 채권자인 할머니가 300번지 본채 안방 아

랫목에 아주 들어 누워 기거를 했다.


중학생인 누나에게 채권자가 물으면 아예 학교

다니지 않는다고 대답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버지는 얼마후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또 재

기를 했다. 아버지는 채권자인 할머니에게 매

가을엔 달구지편으로 김장용 소금 몇 가마

니를 지속적으로 보내주었다. 사업 실패로 실

의에 빠진 아버지에게 주위 친구, 친지는 땅문

서, 집문서, 현금 뭉텅이를 들고 아버지를 찾

다. 아버지의 기를 응원하고 기원했다.


아버지의 신뢰나 원만한 대인관계 등이 입증

되는 순간이었다. 자식이나 배우자를 자랑하

사람들칠(팔) 푼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

와 달리 부모 자랑은 무제한으로 하더라도 전

혀 허물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지금도 믿

고있다.


300번지 농촌주택의 광 오른쪽에 자리했던 화

장실은 수세식이 아닌 ‘푸세식’(재래식)이었다.

6살 박이 나는 한쪽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는 바

람에 된장을 담는 크기 장독 변기에 풍덩 빠지

고 말았다. 비명을 지르고 어머니를 외치고

허둥지둥 허겁지접한 끝에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나는 따뚯한 물로 깨끗이 세척에 성

했다. 어린 나이에 기상천외한 경험을 했다.

어른들의 말과 달랐다. 기대와 달리 이 때에 내

게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점포장 당시 나는 이번엔 꿈속에서 거대한

푸세식 화장실에 몸뚱어리 전체가 풍덩 빠졌다.

변기 독이 아닌 넓디넓은 심해 바다를 유영하듯

이 헤엄을 치고 다녔다. 꿈에서 깨어난 날 내가

고객에게 사준 주식 종목이 상한가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새벽 일찍이 사무실 근처 백반집 식탁 위에 보

통 크기의 2배나 되는 계란 쌍알 프라이가 울라

왔다. 그날도 역시 손님이 보유한 종목이 상한

가를 기록했다.


꿈이 아닌 실제 재래식 변기에 빠지는 것은 결

라지 않는다. 그러한 일이 꿈속에서 일어

난 날, 쌍알 프라이가 나오는 식당을 찾았으면

는 바람이다. 이런 두 가지 조건이 함께 자주

어나기를 터무니없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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