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번지 이야기(6편)

by 그루터기


별로 평수가 되지 않는 두 뙈기의 텃밭에서 웬만

한 야채는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기후나 토질 등

의 관계로 재배가 어려운 양파 양배추 등은 5일

장터에서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흔하지 않은 음

식은 그 희소성만으로 훨씬 값어치가 나가는 것

으로 생각했다. 가끔씩 밥상에 올라오면 식욕을 자제하는 나름 배려도 있었다. 양파나 양배추 등

도 가공하지 않은 채로 즐겨 먹던 메뉴였다. 자주 구경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초가 본채 오른쪽 뒤편 울타리 모퉁이 근처엔 초

등학교 4학년인 형이 식목일 나무 심기 행사를 마친 후 남는 묘목 몇 개를 가져다 심었다. 이곳 300번지를 떠난 후일 먼발치에서 다시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아름들이 큰 나무가 되어 세월의 빠름을 실감했다. 동안 우리 형제들도 청소년기

를 훌쩍 지나 성인이 되었다.


울타리 우측 모퉁이를 장독대 뒤로 돌아 성인

남자 걸음으로 여나무 발짝을 걸어 돌아왔다. 4분지 1평 정도에도 못 미치는 부추(부추)

밭이 있었다. 정력증강에 효험이 있다는 이유

로 ‘윌담초’라는 재미있는 별칭도 얻었다. 과로

로 식욕이 떨어진 아버지에게 하얀색 쌀로만 쑤어드리는 흰 죽 에다에피타이저(식욕 마중음

식)로 긴요하게도 쓰였다. 뿌리는 그대로 둔 채 부엌칼이나 풀을 베는 낫으로 땅 위로 올라온 줄기와 이파리 만을 싹둑 잘라서 부식으로 썼다. 며칠 간의 오뉴월 뙤약볕이나 장마철을 지나다

보면 어느새 또 쑥 자라서 원상회복이 되었다. ‘화수분’의 일종이었다. 그늘진 응달이 그 서식

지였다. ‘울 밑에 선 부추’라고 불러 보았다.


초가 본채 안방과 툇마루 끄트머리를 자나 우

모퉁이를 돌면 지상으로부터 약 50 센티미

터 높이의 흙으로 된 둔덕이 있었다. 가장 뒷

쪽엔 항상 지워지지 않는 시꺼먼 그을음이 묻

어 있는 네모난 굴뚝이 보였다. 나머지 공간엔 도끼질로 정성껏 쪼갠 장작개비를 제법 높이 쌓았다. 중간 부분엔 초가집 처마의 서까래 나

무에 묶어 매단 ‘닭 둥지’ 하나가 게으르게 흔

들렸다. 지푸라기로 야무지게 엮어 만들었다.

각이 좀 무딘 V자형 바이킹 놀이기구처럼 앞

로 약간씩 늘 흔들렸다. 이 닭 보금자리엔

수탉 출입 금지구역인 암탉 전용구역이었다.


‘꼬코댁 꼬꼬’의 외침 소리를 들은 형제들은 달음박질 경쟁을 했다. 껍데기에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는 싱싱한 계란을 먼저 손에 넣기 위함이었다. 정지(부엌) 살강 나무 모서리 등에 ‘계란탁’을 하여 스텐 밥공기에 간장과 참기름을 보탰다. 순식간에 ‘수제 계란 동동이’로 변신이 되었다. 최우선 순위는 당연히 아버지였다. 그 끔찍한 자식 사랑이 무엇인지 형제자매들의 차

지가 되기도 했다. 나는 비릿한 맛을 견딜 수 있

는 비위가 되지 않아 즐기지 않았다. 계란의 윗

분과 반대편 부분의 껍데기를 살짝 깨뜨려

다른 양념 없이 한방에 흡입하기도 했다.


5일 장터 출신을 영입하지 않았다. 300번지 초

가집이 본적지인 어미 암탉이 직접 낳고 부화하

여 알을 깨고 나온 열댓 마리 병아리가 중닭이 되었다. 이 것이 다시 어미닭이 되는 선순환이 대대손손 계속되었다. 두어세 마리의 어미 장

도 있어서 이게 가능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

나서 10대 중반에 조국 광복을 맞은 어머니였다.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아주 좋은 토질의 앞마당 위에 모이를 뿌려주었다. 거의 방목 상태인 집

일석점호를 "니 시 로꼬 하찌 도"(둘넷여섯여

덟열)'라는 구령으로 마무리했다. 탱자나무 가

시 등으로 알맹이만 맛있게 쏙 빼먹은 ‘고딩이

’(다슬기) 껍데기를 모았다. 구부러진 나무절

구통에 넣고 잘게 부쉈다. 칼슘덩어리인 이

껍데기 분말을 어미닭 중닭 삐약이 차별 하지

않고 간식으로 뿌려주었다. 이러니 우리 집

닭족보나 가족력엔 ‘골디공증’이란 것은 아

찾아볼 수 없었다.


달이 뜨지 않는 그믐밤이나 구름이 잔뜩 낀 칠훍 같은 한 밤중에 벌어졌다. 다른 세대의 닭장 문을 감쪽같이 열어제쳐 탈취한 노획물로 잔치를 벌

이는 "닭서리 제도"란 것이 있었다. 약간의 소음

등 낌새를 아주 잘 알아차렸다. 군용 랜턴을 십분 활용하는 아버지 덕분에 우리 집은 닭서리의 피해자가 된 적은 없었다.


가로 세로 두께 20 × 50 × 2 센티미터 정도의 송판에다 문닫이 역할이 되도록 상단에는 두께 1센티미터 길이 20 센티미터의 나무 띠를 덧댔

다. 다름 아닌 닭장 입구 덮개였다. 나는 이 덮

개를 빼어다 뒷동산 비탈진 잔디밭에 깔고 앉아 ‘쭈름말’(미끄럼 놀이)을 하루 종일 즐겼다. 이 도구는 잔디밭 전용 썰매 역할에 안성맞춤이었

다.


나보다 3 살 위인 형 친구들이 초저녁에 300번

지를 찾아와선 형을 큰 소리로 불러댔다. 동네

인근 불량배들의 가장 큰 대목이자 자신들 생

일이기도 했다. 5일장 장터가 곧 객석이 되는 ‘가

설 극장 시즌’이 찾아온 것이었다. 친구들하고 영

화를 보고 싶어 어머니에게 형은 졸랐다.


"현금은 없으니 계란이라도 팔아서 가라"는 어머

니의 마지못한 조건부 승낙이 떨어졌다. 덕분에 결코 도회지가 아닌 내륙의 조그마한 분지 마을

에 사는 형도 당시 최신 유행인 ‘시네마스코프

총천연색 활동사진’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다.

차남인 나는 아예 주전자 멤버에 오르지도 못

했다. 개화기 시대나 해방 전후가 배경인 소

에 나올법한 일이었다.


닭 둥지에서 45 도 대각선 아래엔 초가 본채와 사랑채 사이의 중간 여유공간이 있었다. 어떤 연유인지 아무도 몰랐다. 가시나무 울타리 아래 한가운데 아치형의 작은 개구멍 통로가 생겨났

다. 300번지 우리 윗집엔 사촌간인 두 세대가 살

고 있었다. 본채엔 작은댁 아래채엔 큰댁이 살았

다. 아래채에 사는 내 2년 선배 아버지는 급 작스

런 병환으로 일찍이 타계했다. 생계를 전적으로 편모가 떠안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 선배와 울타리를 서로 자기네가 설치한 것이라는 말싸

은 내가 300 번지를 떠날 때까지 끊이지 않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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