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꼍을 좌측으로 조금 더 돌아갔다. 나중에 추가로 설치한 푸세식(재래식) 화장실, 조선 팔도에서쉽사리 눈에 띄었다. 토종 꺼먹돼지였다. 홈이패인 기다란 ‘구시’에서 먹이를 게걸스럽게흡입하던 보금자리, 각목과 지푸라기 등이 널브퍼져 있던 마구간을 연상시키는 헛간, 나비 3 미터 × 길이 8미터의 또 한 뙈기의 텃밭, 본채 뒷편엔 가시나무로 성인 남자 신장의 1.5 배 높이로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는 결코 촘촘하지는않았다.
내가 초등시절 내내 가장 좋아하는 색상으로 늘자신 있게 말했다. 그 후엔 주위로부터 촌스럽다는 약간의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유치원 삐약이들 유니폼 색과 얼추 같았다. 아주 품위와 수준이 제법 높았다. 강낭콩 모양의 `노오란색` 꽃을 주렁 주렁 달아내곤 하던 ‘골담초’ 나무 두 세 그루가 울타리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꽃잎덩어리를 잘근잘근 씹으면 달콤하고 담백한 향과 아삭아삭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무공해 천연먹거리였다. 뼈와 관계되는 약을 처방하는 점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골담초 나무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엔 또 하나의보물 덩어리가 버티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떠올리기만 해도 입안 가득 군침이 돌았다. ‘오돌개(오디)’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오디나무가그 자태를 자랑했다.
굵기는 별로 되지 않았다. 이리저리 제멋대로뻗어나간 가지 덕분에 어린 초등 저학년인 내하중을 가까스로 견딜 수 있었다. 뽕나무라고도일컬었다. 그 여유 있게 너른 잎사귀는 누에의주요 먹이였다. 누에는 고급 입을 거리의 소재가되는 실크를 뽑아내어 외화 획득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나뭇가지가 휘청거려 약간 불안했다.나뭇가지 위에 두세 걸음 올라탔다. 누구의 손도타 본 적이 없는 천연 그대로의 오디열매를 주저없이 듬뿍듬뿍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농익은 오디는 깔끔한 검은색이지만 바로 직전 그것은 청보라색을 뗬다. 어쩌면 청보 라섹은 검은색 보다 세련되고 더 멋졌다. 절정 이전의 마지막 불꽃일 듯했다.
‘윗도리’는 물론 바지에도 오디를 정신없이 먹었다는 흔적을 유감없이 남겼다. 그 흔적의 백미는 입술과 입안 깊숙한 곳까지 결정적인 단서가되었다. 깔끔한 검은색이건 짙은 청보 라섹이든오랜 기간 동안 지워지지 않을 만큼 확실하게 착색이 되었다. 달콤한 맛이 시큼한 맛을 좀 알질컸다. 얼마 전까지도 유치원 삐약이 전후 아이들이 가끔 주전부리로 즐겨 먹곤 하던 ‘새콤달콤캐러멜’의 무공해 천연산 버전의 결정체였다.아버지가 당신의 6남매 자식들을 훈계 시 오디나무 가지는 회초리로 아주 제격이었다.오디나무 가지는 그 질기디 질긴 껍데기 덕분에 잘 끊어질지 않았다. 회초리로 변신하는 데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본채 뒤쪽의 또 한 뙈기의 텃밭엔 고추 마늘 가지등 야채를 키워내 어머니는 반찬으로 밥상에 올려다. 고추는 붉은색과 푸른색을 구분했다. 세월의 훈장인 가운데 부분이 제법 파였다.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나무 도마 위에 놓고 아주 잘게토팠다.
조선간장이 담긴 종지 위에 넘쳐나도록 쌓아 올졌다. 또한 고추전용 부침개의 재료로도 아주제격이었다. 밀가루를 버무린 고추는 밥 짓는가마솥에 같이 넣어 찌어낸 후 간장을 이리저리 뿌려 먹기도 했다. 고추 찜 무침이라고 불러도 문제가 없었다. 지금은 월빙 음식이라고들하는 보라색의 기다란 가지를 세로로 쭈우욱쪼개서 찐 다음 양념에 무쳤다. 나는 식성에맞지 않아 즐기지는 않았다.
내가 중 2년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소화기 계통질환으로 큰아버지를 보호자로 대동했다.전주에 소재한 대학병원급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다. 다행히도 악성이 아니었다. 약물치료와식이요법을 병행했다. 비타민제의 일종인 ‘토코페롤’을 상시 복용했다. 그 주요 성분의 원재료 격인 생마늘을 어머니가 고추장 종지에 보기에 좋게 쪼개어 올렸다. 어린 차남인 나도 아버지를 따라 생마늘을 즐겨 먹게 되었다. 그 후결국 가장 좋아하는 음식 리스트에 올랐다. 그 이후엔 생마늘은 물론 굽거나 찐 마늘, 마늘 종다리, 마늘장아찌, 다진 마늘, 마늘 잎사귀 요리 등 이른바 마늘 시리즈는 몽땅 나를 자신들의 마니아로 만들었다. 그 후엔 나는 생선회를맛볼 수 있는 자리에선 다진 마늘을 양념장에아끼지 않고 듬뿍 섞었다. 생선조림에 가끔곁들여 나오는 굽거나 찐 마늘이 등장히 기만하면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했다. 서양인의몸에 밴 노릿 내와 같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겐기본적으로 된장이나 마늘 냄새가 그렇다 했다.나는 아마 그중에도 상당한 레벨이 될 거로 보이지만 별로 후회하거나 반성할 수 없었다.
15 내지 20 센티 내외로 자란 마늘 포기들이좌우로 제법 수준 있게 대오를 지어 그 자태를뽐냈다. 늦봄이나 초여름 즈음 마늘밭의 풍경은 제법 감상할 만 장관이었다. 면소재지 은혜교회 인근 큰 고모댁이었던 뒤편 두 마지기 비탈진 마늘밭을 배경으로 가족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그 어떤 배경보다 훌륭했다. 때 마침바람이라도 불면 마늘 잎사귀가 한들거리면 금상첨화였다. 이 정도 사이즈의 마늘잎을 싹둑잘라내어 삶거나 쪄내어 추장을 양념으로 하면이 또한매우 훌륭한 메뉴였다. ‘마늘 잎사귀 찜무침’이라 나는 이름을 붙였다.
성인 남자 손바닥 길이 정도의 쪽파를 뿌리째 뽑앗다. 깔끔하게 다듬어 가마솥 밥 위에다 찌어냈다. 마늘처럼 약간 뭉툭한 뿌리가 있는 상대적으로 뻣뻣한 아래쪽 부분을 위쪽 잎사귀 부분은로 정성스럽게 여러 번 돌돌 말았다. 혹시 풀리지 않게 성년 여자들의 쪽진 머리를 연출하듯이 묶었다. 그런 후에 초고추장을 듬성듬성 뿌리면 요리는 완성됐다.
어머니의 손품이 무척이나 많이 가던 이 메뉴를나는 마냥 좋아했다. 중간 크기의 사기 접시에커다란 누에고치 크기의 ‘골 파찜 무침’을 여나무 개 얹어 상에 올리곤 했다. 나는 아버지나형제들의 눈치를 절대 살피지 않고 마음껏 젓가락을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