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총사 선생님과 중학생 시절(1편)

by 그루터기


공식, 비공식 조직 또는 그 규모의 대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어느 곳이나 지연 학연 혈연 등

뿐 아니라 가치관 정체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여

러 그룹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이조시대 사색당

파가 지금의 정당 정치와는 다른 패거리끼리 모

이는 붕당정치였다고 부정적으로 흔히들 이야

기를 한다. 하지만 부작용과 병폐가 있었지만 명

분과 정체성 싸움이란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고

교 시절 어느 선생님 가르침도 있었다.


최일선 내륙지방의 조그마한 분지였다. 관내 넓

은 들판에서 상고 또는 빡빡머리가 물 반 고기 반

의 남학생, 단발머리 여학생이 청운의 큰 뜻을

품고 중학교에 진학했다.


초등학교 졸업식을 각각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

다. 중학교 입학 전에 예비소집일이 있었다.

그야말로 10대 초반의 꼬맹이들이었다.


길지 않은 생애에 기록에 남을 만큼 눈이 내렸다.

정말 어마어마한 적설량이었다. 작은 껌정 고무

신이 푹푹 빠졌다. 제대로 걸음을 내딛을 수 없

었다. 양산 구강 천태 3개 초등학교 출신 예비 중

학생들이었다. 장차 지역을 넘어 나라의 큰 대들

보가 되겠다고 굳게 작정했다. 인근에 하나밖에

없는 중학교로 기를 쓰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교문은 물론 학교 교사를 두르는 사방의 담벼락

도 없었다. 흙으로 대략 경계 표시를 구분했다.

아주 낮은 토담이 전부였다. 정문은 양편으로 눈

과 얼음이 아무렇게나 버무려져 있는 가을걷이

가 끝난 논바닥을 사이에 두었다. 한 사람만이 겨

우 일방통행의 편도 일 차선 인도를 이삼십 미터

지나야 통과 할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을 모두 커버하자면 몇 날 며칠도

부족하다. 삼총사에 나중엔 4 총사로 불린 선

생님 중심의 이야기이다. 네 선생님은 각자 독

특한 별칭이 있다. 에라, 참외, 대포, 오이가 그

것이다.


■ 에라 선생님

돌쇠의 1학년 시절 담임이었다. 우유체 내지

에라체 몸매를 자랑했다. 최소한 평상시엔

상당한 온건파였다. 네 분 모두 본인의 전공이

아닌 다른 과목을 가르치는 이른바 ‘상치교사’

로도 모자랐다. 3 내지 4과목 수업을 진행했다.

슈퍼 하이퍼 교사였다.


당시 최소한 충청북도 아이큐 부문에서 늘 선

두를 다투었다. 친구들 출석번호를 모두 암기

했다. 그도 모자라 학년이 올가라도 작년에 몇

번이었는데 올해는 몇 번이라고 정확히 기억해

냈다.


무더위가 제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한여름이

었다. 이런 엽기적인 기억력 때문이었다. 어린

우리들 등골을 오싹 하게 했다.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필요 없게 만들었다. 소

름이 돋았다. 국어 기술 한문 영어 등을 담당한

만능교사였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읍내 나들이

를 했다.


친구들이 필요한 사전, 참고서는 물론 문학 서적

까지 배달 서비스를 자청했다. 제자들의 학력

향상교양 수준을 높이는데 엄청나게 큰 기

여를 했다.


땅콩밭을 방불케 하는 모래밭에서 가끔 마당

조회를 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는 긴장을 잔뜩

하고 열과 오를 잘 맞추었다. 제자들의 검은

색 교복 상의 주머니를 안으로 욱여넣은 덮개

일일이 꺼내주었다. 자상한 모습이었다. 우

리들은 마당 조회 시간에 긴장 완화(?)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목이라는 동네의 형(님)이 어느 날 하룻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선생님으로 순식간에 바

뀌었다.선생님과 동성동본인 우리 친구의 전언

이었다.


어쩌다 제자들을 꾸짖을 일이 있어 매를 들기

도 했다. 얼굴엔 엷은 미소를 띤 채 종아리를

수도 없이 계속해서 두들길 땐 완전 매파로 변

했다. 친구들은 선생님의 이런 갑작스러운 표

변에 많이 당황했다.


압도적으로 큰 키에 결코 비만이 아닌 교감 선

생님이 마당조회 훈시 중이었다. 국가의 삼요

소(주권,국민, 영토)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잠시 스텝이 엉키었다. 선생님을 불러 도움을

요청했다.역시 에라 선생님은 역시 브레인이었

다.


초등학교 새내기 병아리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처음 가르치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 중학교 입

학생들에게 다른 나라 말인 영어를 가르치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난도 작업이었

다. 한문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그 어려운 한자를 처음에는 쓰기가 아닌 그리기

로 가르쳤다.좌부변, 우부방, 갓머리, 책받침 등 도통 생소한 용어에 관해 질문을 퍼부었다. 묻고

또 묻고해도 선생님은 친절하고 끈기 있게 잘

알려주었다.


나는 20대 중반 무렵 숲머리와 죽산리에 본적

을 둔 각각의 친구 1명과 함께 부산의 에라 선

생님 자택을 방문했다. 자리를 파할 때쯤에야

저 녀석이 재준이가 맞느냐고 묻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중학교 시절에 비해 월등하게 키가

자란 탓이었다. 때문에 나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생활근거지가 부산인 고향 친구 몇 이서 식당

에 둘러 앉았다. 선생님이 원한 메뉴는 보신탕

이었다. 나와 한 친구가 토끼탕을 끝까지 고집

하는 바람에 결국 선생님은 뜻을 접었다. 참 정무적인 감각이 모자란 결과였다.


부산에 자리를 잡은 고향 친구들의 초대로 이

번 동창회는 해운대 둘레길 트레킹을 하기로

했다. 사십여명의 친구들이 여흥을 즐기던 자리

에 선생님은 나타났다. 여전히 타고난 음주 실

보여주었다. 제자들의 은사님에 대한 건강

걱정을 아예 내려 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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