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친구, 동기모임, 동창회 이야기(2편)
명절 모임
이곳은 벌써부터 양대 명절 하루나 이틀 전 단골 모임 장소가 된 지 오래였다. 송호 호텔이었다. 이번에도 소재지 부락 모임에 다른 부락 친구들이 합류했다. 예산ㆍ결산 등 공식적인 계모임의 절차가 끝나는 시각에 맞추었다. 이 다른 부락 친구들이 오락 경기에 끼어들었다. 머릿 수에 따라 2개의 경기장을 마련해야 했다. 오랜만에 오늘은 고스톱과 카드놀이라는 두 종목의 경기가 벌어졌다. 나는 후자의 경기엔 아예 입문도 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고스톱에만 매진하기로 했다.
고스톱판의 멤버들의 특성을 오랜 기간 살펴본 결과였다. 세 가지 부류로 자연스럽게 나뉘었다. A 타입은 시종일관 경기 초부터 종료 시까지 풀타임으로 뛰는 정규 멤버를 고집하고 날밤을 꼬박 새우는 우직(무식)한 스타일이었다. B 타입은 전반부 취침 후 후반부 참여나 그 선후를 바꾸어 선수로 뛰는 교체 멤버로 불리기도 했다. 체력을 안배하거나 비축하는 실속 추구 스타일 었다. C 타입은 경기에 참여하지 않고 고리를 떼거나 훈수를 하는 단순 관람자 내지 관객 스타일이 그것이었다.
우리 친구들은 날밤을 꼬박 새운 후 명절 당일 차례에 나섰다. 종종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수면이 부족하다 보니 성묘는 생략한 채 낮 시각 잠자리에 들기도 했다. 음식을 챙겨 먹는 일은 나중 일이었다. 이 모임 장소는 초기엔 시설이 양호하여 자주 이용했다. 노후화된 시설 보수 유지를 게을리하다 보니 그 빈도가 줄어들었다. 좀 더 세월이 흐른 후엔 건물의 용도가 바뀌었다. 지금은 입장도 아예 어렵게 되었다. 때론 비단강 건너 부락 친구들도 합류하여 명실상부한 범 관내 경기가 되었다.
명절을 앞두고 오늘도 친구들은 어김없이 얼굴을 보기로 했다. 우리 가족들의 많은 추억이 서려 있었다. 부모님 두 분이 말년에 해로하신 창고 집에서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에 자리 잡았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이 고스톱판에서 크게 지르는 소리가 충분히 들렸다. 명절을 앞두고 오늘도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친구들 아버님 몇 분이 먼저 진을 치고 계셨다. 우리 친구들은 고개를 정중히 숙여 인사를 드렸다. 그런 다음 한쪽 구석에 눈치를 살피며 둘러앉았다. 예전 5일 장터의 한편이었다. 당시 관내 하나밖에 없는 푸줏간의 옛터였다. 이름하여 양 다방이었다.
이번 귀향길은 어느 코스로 왔으며 그래도 8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며 각자 도착을 알렸다. 연어가 고향 찾아 회귀하듯 했다. 귀향길의 애로와 소회를 무용담처럼 늘어놓기 시작했다.
승용차의 혜택을 누릴 수준에 아직 모자란 나는 이번 귀성길에 또 다른 역대급 신기록을 세웠다.
귀성열차표 예매기간이 명절 당일로부터 여유
있게 몇 주전으로 정해졌다. 암표상 노릇을 막
을목적 등으로 1인당 4매로 예매를 제한했다.
나는 형제 집안 몫까지 책임져야 했다.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고심 끝에 묘안을 찾아냈다.
군대를 전역 후 복학까지는 아직 세월에 여유가
있는 거의 백수인 친구를 동원하기로 했다. 열
차표 발매 시간은 대개 오전 9시로 정해지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전날부터 줄을 서야 하는 모두가 절박한 처지였다. 추석을 3주 정도 앞두다 보니 낮에는 아직 늦여름 날씨를 보이나 한밤중엔 제법 기온이 떨어졌다. 이에 얇은 담요까지 챙겨 나서는 민초도 가끔 눈에 띄었다. 나는 아직 뜨거운 젊은 피가 끓는 20대 초반에 불과했다. 그런 걱정은 남의 이야기였다. 비둘기 호라는 이름의 완행열차의 시발역으로 유명한 용산역 광장이었다. 민초들은 이미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내일 대망의 열차표를 손에 넣는 순간까지 무엇을 하며 그 기나긴 시간을 보낼 것인가가 최대의 관건이었다.
이 용산역 광장은 우리 고향 관내에서 제일 큰 초등학교 운동장 면적의 너덧 배를 넘어섰다. 광장을 가드 메운 인파의 규모도 무시하지 못했다. 책을 볼 수도 없었고 친구와 이야기만 하기에도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고민 끝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번쩍떠올랐다.
다행히 날은 맑아서 비록 보름달엔 미치지 못했다. 달빛 이외에 다른 추가 조명기구의 신세를 지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을 식별하는데 큰 애로는 없었다. 이 짧지 않은 여유시간을 보내기에 아주 딱 맞는 국민 오락 고스톱 경기장엔 이와 달리 추가 조명이 필요했다. 이에 성인 남자 엄지 손가락 두배 굵기의 양초 서너 개를 동원했다. 이러니 더 이상의 걱정거리가 없어졌다. 이래서 점당 100원 규칙의 고스톱과 함께 거뜬히 날밤을 세웠다. 덕분에 대망의 귀성열차표를 손에 넣을 때까지 지루함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소기의 목적을 무난히 달성했다고 자랑했다.
얼추 과반 이상의 친구가 모였다. 보다 행동이 자유로운 뒷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쪽방 수준의 골방이다 보니 모든 멤버들이 두 다리를 뻗고 잠자리에 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이걸 핑계로 날밤을 세기가 일쑤였다. 이후 저녁 식사 겸 술판이 벌어지는 건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었다.
양 다방과 달리 뒤편 별채 한옥에 방이 두 개나 딸리다 보니 항상 공간에 여유가 있었다. 한 때 조각 미인으로 불리던 톱스타 모씨와 싱크로율 95% 이상 되는 여자 종업원이 혜성같이 나타났다. 내 동기 선후배 중 내로라는 인근 불량배들은 이곳을 문턱이 닳도록 넘어 다녔다
소설이나 세상에 나온 지 오래된 드라마 등에 자주 등장하던 것이 생각났다. 임금을 선불로 받고선 그게 고스란히 빚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도망을 다녔다. 그래서 노예에 버금가는 생활을 한다는 스토리를 눈앞의 현실로 지켜볼 기회도 왔다.
짧게는 2 ~3 개월, 길어야 6개월이 다방 종업원의 인사발령 주기였다. 나중엔 나와 노랑머리 부부 사건의 발단이 일어난 곳이기도 한 유서 깊은 곳이었다. 그 이름도 고색창연한 초원다방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칠 즈음엔 부락 친구들 중 당번처럼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 없이 지그재그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친구들이 이곳에 모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각자 좋아하는 차를 한 잔씩 마시며 급한 안부나 근황을 건넸다.
다방 뒤 편 한옥 별채로 자리를 옮겼다. 멤버들은, 영등포 청과물시장, 왕십리, 청량리 등지에서 70년대 말, 80년대 초까지도 자주 눈에 띄던 젓가락 장단 전문 술집에서 벌이는 한마당을 재현했다. 나무든 스스텐리스 소재든 숟가락이냐 젓가락인가를 가리지 않았다. 박자를 맞추고 흥을 돋우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모두 타악기
로 동원했다.
임시 즉석 마이크를 돌리며 순번을 정하고 노래를 청해 들었다. 주로 소리를 다스리는 나는 난감하여 다른 친구들의 눈치를 살폈다. 볼일을 핑계로 슬쩍 일어나 극적으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우리 친구들 중 사업을 하여 성공하는 녀석은 나올 수 있다. 다른 부문에서 성공하는 친구도 나왔으면 좋겠다며 친구 민수가 내게 부르던 응원가는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방이 두 개나 되어 공간에 여유가 있었다.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날밤을 새거나 새벽에 가서야 잠시 눈을 붙였다. 집에서 공식적으로 눈감아 주는 몇 번 되지 않는 외박 시즌이었다. 담요와 이불이 충분하지 못했다. 설날 시즌 모임엔 이불 홑청 끄트머리 부분을 20대 초반 떠꺼머리들의 건실한 치아로 물고선 기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웬일인지 오늘은 자리를 일찍이 파하고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삼총사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는 쉽지 않은 그림이 되었다. 집안 형편 등으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한 친구 준영, 천호와 내가 둘러앉아 술자리를 이어갔다. 갑자기 두 친구가 울먹거렸다. 나로선 참으로 난감했다.
최근에 백년가약을 맺은 바 있는 친구가 있었다. 그 직전의 우리 고유의 재미있는 풍속 중의 하나인 ‘함 팔기 행사’에 자신들을 초대하지 않았단다. 매우 서운했다고 저간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많이 배우지 못한 자신들을 무시 내지 차별했다며 “기태야 넌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당부도 했다. 우리 친구 중 네가 제‘부(가능성)’가 있으니 향후로 응원을 하겠단다. 모쪼록 네가 가고자 하는 길에 매진해달라”라고 부탁도 했다. 나는 코끝이 찡했고 눈시울마저 붉어지고 마음은 짠 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