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친구, 동기모임, 동창회 이야기(3편)

경조사 모임

by 그루터기

한여름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에 민수가 부친상을 당했다. 소나무 부락 친구들이 자랑하는 위친 계란 이름을 별도로 달지 않아도 되었다. 소재지 부락 친구 계모임 규약에 그것 이상이 있었다. 더욱 끈끈한 우정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내용들이 이미 다 녹아 있었다.


회원이 부모상을 당할 경우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다. 모두가 문상은 기본이고 상여를 꼭 매야 하는 걸로 되어 있었다. 만약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게 불가한 회원은 자신의 비용으로 일꾼을 물색해야 했다. 이른바 대타라도 내세우면 면피는 하는 거로 그나마 인정을 해주었다. 강원도 소재 국립공원 설악산 지척에 처가를 둔 상철이었다. 친구는 인근 휴양소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중이었다. 그 이후의 일정을 기꺼이 포기하고 먼 길 마다하지 않고 한 걸음에 달려왔다. 우정과 결속력을 과시했다. 소재지 부락 부모상을 이미 겪어 보긴 했다. 하지만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온전히 우리 회원들만의 힘으로 상여꾼을 모두 채우는 일은 처음이었다.


이른바 요령잡이를 제외한 순수한 상여꾼의 최소 인원은 10명이지만 부득이한 경우엔 8명으로 갈음하기도 했다. 이미 다른 상갓집에서 경험을 한 친구도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이번이 처음이다 보니 시행착오가 있었다.


아이보리색 광목천 소재의 기다란 끈의 길이와 높낮이 이완 등의 조절이 쉽지만 않았다. 군부대에서 병사들을 훈련이나 얼 차례 수단으로 애용되었던 목봉 체조를 방불케 했다. 키가 큰 친구는 죽을 맛이었다. 키 큰 사람만이 힘을 써야 하는 구조였다. 신장이 짧은 친구는 실제로 힘도 쓰지 않고 그저 시늉만 해도 거저먹는 셈이었다. 이 목봉 체조의 구조와 상여꾼의 미션의 그것은 매우 흡사했다.

참여자 10명을 기준으로 좌우로 나뉘는 같은 ‘열’엔 비슷한 신장의 선수를 배치해야 했다. 물론 1번에서 5번까지 줄짓게 되는 이른바 각각의‘오’엔 체격과 체력을 감안하여 적절히 안분 배치하여야 했다. 그래야 일하는 친구들은 모두 힘이 덜 들고 일의 능률이 오를 듯했다. 당시 우리 친구들은 불혹에 채 이르지 못한 연령이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경험이 일천하다 보니 안절부절했다. 이젠 앞으로 친구 부모상을 당해도 다른 외부 일꾼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감당해낼 수 있다고 대견스러워했다.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키득대기도 했다.


이번 상갓집 상여행렬의 총책임자는 일찍이 낙점이 되어 있었다. 비단강 건너 부락이 출생지인 자칭 타칭 "걸레"란 별칭을 즐기는 맏 상주의 6년 선배였다. 이 분야에선 관내를 넘어 군을 통틀어도 그 실력을 인정받은 바 있었다. 이미 프로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였다.


역시 산전수전 많은 경험이 쌓인 덕분에 능수능란한 솜씨를 거침없이 발휘했다. 상엿꾼, 상주를 비롯한 유족들 문상객 기타 구경꾼들 모두의 입장을 면밀하게 헤아렸다. 상여 행렬이란 작지 않은 행사를 물 흐르듯이 이끌었다. 상여 행렬이 진행하는 속도, 방향, 중간 휴식 횟수, 시간 등을 기가 막히게 핸들링했다. 이는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았다.


이 선배 요령잡이의 리딩 멘트엔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는 가장 기본이었다. 행렬이 마을회관의 경로당을 통과할 즈음엔 "저는 먼저 가니 나중엔 따라오세요” 등 적재적소에 맞는 멘트를 계속 이어갔다. 상가 집안의 내력을 이미 샅샅이 파악한 후 맞춤형 멘트가 뒤따랐다. 아들 딸 손자 며느리 등을 차례로 꽃상여 앞으로 불러냈다. 그래서 술잔을 올리게 했다. 지푸라기로 거칠게 엮은 새끼의 매듭 중간중간에 이른바 맹자의 노잣돈을 끼워 넣는 퍼포먼스도 빠뜨리지 않았다.


무릇 상주 입장에선 호상이란 없다고들 했다. 비교적 고생을 덜 하고 장수한 분의 장례 행렬엔 민속놀이의 하나인 차전놀이를 연상하듯이 상주가 상여 틀 위에 올라타기도 했다. 이런 경우엔 상여꾼들이 죽을 맛이었다. 오늘은 그러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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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액의 적고 많음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른바 노자돈이라는 이름으로 모아진 금전은 행사 종료 후 몽땅 조건 없이 상주에게 돌려주었다. 하나의 아름다운 전통이었다. 일체의 조그마한 대가를 바라고 하는 유상ㆍ영리 행위가 아님을 증명했다. 삼천리 강산에 아마 이처럼 훈훈하고 아름다운 풍습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요령 잡이는 요령을 흔들어 소리를 내고 상여꾼들을 지휘하고 발을 맞추게 하는 게 첫째 임무였다. 이를 무난히 감당하려면 박자ㆍ스텝 등을 맞추는 음악적 재능과 운동신경도 제법 겸비해야 했다. 상여 행렬의 전면을 보고 뒷걸음질을 하면서 진두지휘를 해야 했다. 발걸음도 사브작 사브작 또는 폴짝폴짝 내딛는 실력이 필요했다. 꽃상여를 메고 가는 상여꾼들과 만장이 펄럭이는 상여 행렬을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배웅했다.


요령잡이의 권위자인 선배는 리딩 멘트의 레퍼토리도 다양했다. “태어날 때는 혼자 울고 죽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울어주네, 오실 날이나 알려 주오, 너도 죽어 이 길이고 나도 죽어 이 길이로다, 잘 있거라 잘 살아라 나는 간다. 멀고 먼 황천길을 나는 간다, 북망산천이 멀다더니 내 집 앞이 북 망일 세”등 참신한 리딩 멘트를 현란하게 쏟아냈다.


상여를 호화롭고 고급스럽게 마련하는 것은 돌아가신 부모님께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라고들 했다. 또한 죽음 문제는 망자의 문제가 아닌 망자를 아우르던 산 자의 몫이 되는 것이었다.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내가 아닌 타인의 몫으로 남았다.


고향 친구 한의사 친구의 전언이었다. 민수 할머니는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셨다. 소재지와 소나무 부락 친구들은 모두 인근 장소에 ‘모디켰다(모였다가)’ 일거에 상갓집으로 들어섰다. 8년 선배는 "야 너희 이놈들 대단하다”라며 놀라기도 했다. 30명 내외가 한꺼번에 떼거지로 몰려들었다. 일국의 최고 통치권자의 행차에 버금갔다. 부의 봉투는 편의상 친구 한 명이 ‘모디 키고(모아서)’ 또 ‘간종거려(가지런히 한 후)’ 한꺼번에 접수를 했다. 워낙 대규모의 문상 일행이었다. 예 닐곱 줄로 나누어 큰절을 올렸다. 역시 유별나고 유난스러운 우리 동기ㆍ동창들의 응집력과 단결력을 내외에 또 한 번 과시하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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