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친구, 동기모임, 동창회 이야기(4편)

우리 기수 주관 체육대회와 8.15 광복 기념 면민 체육대회

by 그루터기

부모님 장례를 고향 인근에서 모시는 경우 외지에 나와 사는 친구들은 형편이 녹록지 않았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친구는 하루 휴가를 할애하거나 저녁 늦은 시각이나 한밤중 시간대를 빌었다. 밤잠을 줄여가며 문상 행렬에 동참했다. 이러다 보니 주위 사람들 특히 친구의 배우자들이 종종 의아해했다. 그저 부조금만 전달을 하고 편히 쉬는 게 훨씬 경제적이고 수월한 게 아니냐 했다. 왜 굳이 구태여 어려운 방법을 찾아서 필요 이상의 고생을 하느냐는 질문도 종종 받았다. 비용ㆍ시간 등만 따지면 분명 그게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저 끈끈한 우정, 의리, 친목 이런 것 때문이었다. 수면시간을 할애하여 먼길을 찾아 문상을 마치는 게 관행이었다. 그러면 그동안 밀린 숙제를 하거나 빚을 갚은 느낌이 들 정도가 되니 어쩌랴.


승용차(4) 중형차(8 ~10명) 한 팀당 시각과 코스를 조율하여 시간차 조문을 하기도 했다. 다른 지방 또는 선후배들에겐 흔치 않은 일이었다. 정말 먼 거리 이거나 부득이한 경우엔 동기ㆍ동창회를 대표하는 회장단이 나서는 게 대세였다. 이도 저도 여의치 않은 경우 다른 친구가 대행하기도 했다. 이런 일에 언제나 자청하거나 자진하여 나서는 친구들이 항상 넘쳐났다.


뜻하지 않은 불의의 사고로 친구 부친이 돌아가시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비교적 높지 않은 연세에 일을 당했다. 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소재지 부락 계모임 규약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장남인 친구는 자신의 동기ㆍ동창 친구들로 온전하게 상여 군을 꾸리고 싶어 했다. 도저히 성원이 되지 않자 절충안이 나왔다. 3남 1녀인 친구들 형제 중 장남인 본인과 바로 아래 동생인 차남 친구들이 반반 책임을 지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당시 상여를 매는 일이 아직 꺼림칙하던 차남 친구 중 한 후배가 인근 고추 밭으로 들어가 잠시 몸을 숨기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최종 장지가 아주 원거리가 아닌 한 처음부터 상여를 매고 최종 목적지까지 장례 행렬이 이어졌다. 거리가 워낙 부담이 될 때는 차량으로 산기슭 입구나 중턱 정도부터 상여 행렬을 실행하기도 했다.


태동기인 초기부터 중기까진 초교 총동문회는 결성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야 생겨났다. 중학교 동문회는 90년대 중후반에 시작을 알렸다.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진 해 봄 중학교 3기 주최로 동문 체육대회가 열렸다. 그 이전에도 1ㆍ2기 선배가 주관하는 동창 체육대회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명실상부한 동창 체육대회 태동은 우리 동기인 3기가 주춧돌을 놓았다. 집행부가 나서서 이끌고 동기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이번 행사는 우리 동기가 주최하기로 했으니 웬만하면 모두들 얼굴 좀 보자”

고 부추기는 바람에 성황이 이루어졌다. 모자와 티셔츠 운동복 등을 별도 주문 제작했다. 중학교를 의미하는 이니셜인 MS까지 여기저기 새겨 나름 그럴듯한 격식을 모두 갖추었다.


대기석의 공간을 구분하는 천막은 각 기수별로 배치했다. 참석인원이 미미한 기수는 선후배를 막론하고 2개 이상의 기수가 같이 쓸 수밖에 없는 수모도 겪었다. 우리 동기생들은 참여 인원이 넘쳐났다. 2개 구역으로 감당하기에 부족할 정도였다. 이에 선후배 다른 기수 동문들은 내놓고 우리 동기들을 부러워했다.

더구나 이 천막 장비 세트도 관련 중견기업을 이끄는 친구들이 기증자로 자랑스럽게 이름을 새겼다. 그러다 보니 총동창회 행사가 아닌 3기 만의 동기 체육대회로 이름을 붙여도 무리가 아니었다.


30대 중반을 넘어 불혹을 향해 달려가는 연식에도 사업으로 성공하여 자리를 잡은 친구들이 줄을 섰다. 정치판과 마찬가지로 무릇 사람이 모이는 크고 작은 조직은 자금과 인력동원이 원활해야 제대로 굴러가는 것이다. 사업에 성공한 친구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통 큰 찬조를 했다. 회장단의 집요하고 진정성 있는 인원 동원 전략이 맞아떨어졌다. 우리가 주관한 중학교 체육대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사실상 첫 번째 행사의 성공에 필요한 가장 필요한 인프라는 충분히 준비되었다. 드디어 모교의 그라운드엔 회장단을 비롯한 모든 동기들의 헌신과 참여의 결실을 직접 현장에선 눈으로 지켜보았다. 다른 기수들의 도움이 없이 행사 비용은 우리 3기 만의 모금으로 너끈히 충당되었다. 그럼에도 여유가 있어 모교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이나 급식비로 쾌척했다. 아주 흐뭇한 일이 벌어졌다. 좋은 선례도 남겼다. 참여율이 저조한 5개 기수를 ‘모디켜 보아야(모아 보아야)’ 우리 동기 참여자를 넘어서기 쉽지 않았다. 족구, 4백 계주, 피구, 줄다리기 등 종목마다 우승을 휩쓸었다. 종합 우승은 일찍이 따놓은 당상이었다. 오늘은 3기 친구들의 잔칫날이자 세상이었다.


3기 친구들이 중학생 시절 재직 중이던 은사도 대거 참석했다. 현직에 계신 모교 교장ㆍ교감 선생님을 비롯하여 이미 모교를 떠나 아주 먼 거리 학교에 적을 두고 계신 분들도 기꺼이 동참했다. 내가 재학 당시 한 학년 두 개 반이었고 총원은 120명 내외였다. 오늘 잔치마당엔 우리 동기만 무려 40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는 적지 않은 기록이었다.


통합 동창회 기수 기준으로 초등학교 입학 후 많은 세월이 지나지 않아 광복기념 면민 청년체육대회가 탄생했다. 지금도 그 명맥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외지인이 보기엔 참으로 특이하고 부러워하는 전통이었다. 관내 소속된 부락별로 자웅을 겨루었다. 소나무가 많은 동네 부락이 유난히 응집력이 강하여 종합성적은 항상 상위권을 차지하였다. 관내 소재지 부락은 무려 380여 가구였다. 소재지 부락은 3개 팀으로 나뉘었다. 이에 반해 소나무 부락은 90 내외의 가구밖에 되지 않았다.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하나의 대오로 똘똘 뭉치었다. 다른 부락에선 이 팀이 항상 첫째가는 경계 대상이었다.


이 행사의 휘날레는 단축 마라톤이었다. 초등학교 교정을 출발하여 관내 행정구역과 맞닿은 학산면 박계교의 반환점을 돌아오는 왕복 8킬로미터 코스였다. 소나무 부락은 이 종목에선 몇십 년이나 다른 팀에게 우승을 한 번도 내주지 않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 부락의 응집력을 내외에 과시하는 하이라이트였다. 이 마라톤 경기 외에 사백 계주, 씨름, 100미터 달리기, 배구, 축구, 줄다리기, 도포 나르기, 새끼 꼬기 등이 단골 종목이었다. 이 소나무 부락은 개별 경기 성적 못지않게 점심식사 시간에 더욱 유난을 떨었다. 승패를 가리지 않는 장외 부문조차 응집력을 한번 더 뽐냈다.


체육대회는 예선을 포함하여 통상 1박 2일에 걸쳐 열렸다. 결선 경기와 나머지 메인 경기가 벌어지는 둘째 날 점식식사 준비를 위해 소나무 부락은 모든 주민이 개인 일정을 접고 한 곳으로 집결했다. 가구마다 리어카는 기본이고 달구지 등도 동원했다. 취사에 필요한 크고 작은 각종 솥단지, ‘퍼니기’ 각종 주방 기구에 대한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오늘은 평소 밥상에 올리기 쉽지 않은 돼지고기, 부침개, 국밥, 백설기 등 양대 명절 음식에 버금갈 정도로 장만했다. 아침 일찍부터 5일 장터 한 구역을 모두 선점했다.


가히 기록적인 소나무 부락의 끈끈한 가족애와 이웃사촌 간의 친목, 공동체 연대의식을 만천하에 자랑하는 대규모 잔치 한마당을 벌였다. 밀양 박 씨 집성촌인 탓도 있었다. 하지만 비록 성이 다르더라도 소나무 부락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똘똘 뭉쳤다. 소재지 부락을 비롯한 메이저 동네 주민들의 부러움을 한눈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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