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친구, 동기모임, 동창회 이야기(5편)

중학교 동문 체육대회와 중학생 시절

by 그루터기

오늘은 8. 15 기념 면민 청년체육대회 부락 점심 잔치의 전통이 되살아 났다. 중학교 동문 체육대회는 간담회 자리도 겸했다. 고대하던 점심식사 시간이 드디어 돌아왔다.

오늘의 메인 메뉴는 당연히 고향 토종 브랜드인 그 이름도 정겨운 ‘고딩이(다슬기) 국’으로 이미 낙찰되었다. 음식을 마련하고 배분ㆍ뒷 마무리하는 일은 대부분이 소나무 부락 부녀회에서 도맡았다. 이 부녀회는 우리 동기 어머니 연배부터 위아래로 10년 내지 20년 연배를 오르내리는 인적 구성이었다. 소나무 부락 안주인들에겐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같은 메뉴라도 외지 음식점은 물론 읍내 식당에서 맛볼 수 있는 것과는 레벨이 전혀 달랐다. 인심도 후하게 시금치와 부추를 아까지 않고 듬뿍 넣었다. 다슬기도 품이 많이 가는 작업인 껍데기를 까낸 알맹이 상태로 투입했다. 풍광이 뛰어난 고향의 무공해 햇볕과 바람 아래서 숙성된 된장을 풀어냈다.


당시엔 현재 비단강 상류에 버티고 있는 용담댐이 없던 시절이었다. 흰 점과 줄무늬가 띄엄띄엄 섞인 바다 고동과는 달랐다. 고동색이 주된 바탕이었고 껍데기는 부드럽고 길쭉하기보다는 좀 둥글둥글했다. 그야말로 고항 토종 다슬기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이른바 개발 독재 시절 다목적댐의 장점만을 부각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비단강 상류에 용담댐을 쌓았다. 이로 인하여 고향 소나무 동네 비단강 상류의 그 맑디 맑은 수질은 상당히 오염이 되었다. 대거 물길도 바뀌게 되는 등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쪽으로 탈바꿈했다. 따라서 다슬기도 고향 토종 품종은 어느덧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토종이 아닌 그 출생지가 다른 이색 종자를 들여와 인위적으로 강물 속에 뿌렸다. 이리하여 지금은 그 옛날 어린 시절 즐겨 먹던 토종 다슬기와는 사뭇 달랐다. 고향 토종과 바다 고동의 특징을 뒤 섞은 듯한 것이 주류로 자리 잡았다. 참 아쉬운 일이다.


모교의 교실이나 전시장 기타 회의실 등을 새로이 마련하여 공간에 여유가 있는 지금과 달랐다. 본관 교사 뒤편 수도시설 인근 자갈밭이나 땅콩 밭 수준의 모래가 널린 "맨 봉당(맨바닥)"에 모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참석자들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편한 자세인 ‘철부더기’ 모양으로 이리저리 자연스럽게 둘러앉았다. 다슬기국을 하나 가득 채운 양푼에 밥 덩어리를 뚝딱뚝딱 말았다. 형편이 되는대로 점심으로 이름을 지었다. 각자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안부를 묻는 아주 정겨운 시간이었다


범국민적으로 나무를 심는 날로 모두가 알고 있는 식목일이었다. 이날 학생 1인당 5주씩의 노간주나무를 조달해 오라는 지령이 고위층으로부터 떨어졌다. 나무를 돈을 주고 사 올 수 없었다. 고향의 상징이자 자랑거리의 하나이기도 한 비봉산 기슭이나 중턱에 올랐다. 기존에 지속적인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별일 없이 편하게 자리 잡고 있는 노간주나무를 정중하게 모셔올 수밖에 없었다.


본관 맞은편 울타리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기 위해 세상에 나온 지 제법 세월이 흐른 연식의 측백나무가 버티고 있었다. 고동색 플라스틱 양동이로 물을 길어 다 들어붓는 일을 당번제로는 감당이 되지 않아 나중엔 벌칙으로 지정했다.

수은주가 30도 이상 지속되는 여름 한낮 축구공을 내어 달라고 학생들은 요구를 했다.‘무더위에 어린 학생들의 건강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모교 설립자는 이 요구를 일거에 거절했다. 이에 우리 친구들은 반발했다. 그래서 조그마한 실타래 덩어리를 축구공 삼아 공차기 놀이를 했다. 이 것이 발단이 되어 이윽고 오후 수업을 거부했다. 우리는 결연히 일어나 모든 학생들이 비단강 변 자갈밭으로 도망치는 시위도 감행했다.


당시 다른 학교 대비 규모가 절대적인 열세였다. 그럼에도 도내 남부 3군 중학교 교사 대항 배구대회에서 줄곧 우승을 차지했다. 설립자의 적극적인 별도 지원이 없는 성과이다 보니 이는 더욱 값질 수밖에 없었다.


자랫펄로 소풍 가던 날 담임 선생님에게 노래 한 곡을 청하였다. 20대 후반 우리 선생님은 그 유명한 백 연설의 ‘나그네의 설움’을 구성지게 있는 기량을 다하여 뽑아냈다. 본인 구둣발의 앞부분을 땅바닥에 대었다 떼기를 반복하여 박자를 맞추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선생님은 그 후 안방극장 수사 극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탤런트 최불암의 숯이 많고 직모인 헤어스타일과 싱크로율 100%였다.


한해 선배와 같은 곳으로 소풍을 갔다. 많지 않은 여자 선배들이 수의 열세를 너끈이 극복했다. 자연스레 커다란 원을 만들고 스탠딩 자세로 박수를 연신 쳤다. 그 많은 래퍼터리의 노래를 거뜬히 소화했다. 음악 교과서에 오를 수 없는 소위 유행가(대중가요)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한 곡이 끝날 무렵 또 다른 선배가 이미 미리 준비한 새로운 곡 하나를 머릿속에서 꺼내어 랠리를 이어갔다. 연식이 비록 한 해 위지만 정신연령이나 사회성은 그보다 훨씬 더 앞서갔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식적인 음악 공부와는 무관했다. 별도의 노래지도 사교육을 담당하는 전문학원을 틈틈이 드나들었나 보았다.


이번 교내 웅변대회는 소나무 군락이란 그 빼어난 경치로 전국 방방곡곡에 이미 소문이 난 곳 중에도 운치 있는 명당에서 열렸다. 나는 그 어린 10대 초반의 나이에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채점관 선생님들의 동정 점수를 얻어 가까스로 3위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엔 기본과목인 ‘국영수’가 좀 되는 학생에겐 여타 부문도 프리미엄을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같은 원고로 여러 학생이 웅변 연습을 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도 일어났다.


담임 선생님은 주로 강당 건물 안에서 웅변대회 준비를 하던 나를 불러 세웠다. “원고의 주요 단락을 쉽게 눈에 들어오도록 띄어서 구분해라. 매 단락의 첫 글자나 단어의 크기를 다른 것의 두배 정도로 키워라. 그래서 원고 내용이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때를 대비해라”라고 했다. 실제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족집게 지도를 담임 선생님은 아끼지 않았다. 이에 나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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