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머리가 출생지인 철호는 형제들이 모두 서울로 이주하였다. 장차 부모님도 모셔갈 계획이었다. 사실상 큰 형님이 자신의 향후 학창 생활의 모든 기간 뒷바라지를 해줄 형편이었다. 이러다 보니 서울 소재 학교로 옮겨가는 전학이 당면 과제였다. 한 명의 학생이라도 전교생 총원에서 빠지는걸 도무지 용납하기 싫은 설립자는 이를 기꺼이 수용할 의사가 애시당초 전혀 없었다.
집안의 여러 가지 형편상 서울로 전학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이에 따른 절차를 밟기 시작한 철호가 못마땅했다. 결국 설립자도 이 친구의 전학의 필요성ㆍ절박함 등을 인정하고 주위 여론도 아예 무시할 수 없었다. 같은 부락의 절친 길주를 따로 불러내어 실제로 철호의 전가족이 서울로 이주했는가를 은밀히 물었다. 본인이 생각하는 전학을 허락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전 가족의 동반 이주’를 꼽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천신만고 끝에 철호의 서울로 전학은 어렵사라 성사되었다.
장차 18년이란 1인 장기 군사독재정권의 대업을 마무리하게 되는 국가 최고 통치권자는 60년대 말에서 70년대로 진입할 무렵 중학교 입학시험제도를 폐지했다. 시험을 치르지 않고 자신의 초등학교가 속한 통학권역에 소재한 입학을 강제했다. 아주 획기적인 개혁을 느닷없이 도입했다. 대도시 경우엔 통학권별로 학군을 정하여 ‘은행알’을 돌리는 추첨제를 시행했다. 이도 입학시험을 치르지 않는 점은 농어촌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자신과 현직 문교부장관 각각의 자녀 학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고안해낸 제도라는 유비 통신도 떠돌았다.
이제는 자신이 현재 학적을 두고 장차 졸업을 하게 되는 초등학생은 주소지에 관계없이 본인이 원하는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진학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막혔다. 나중엔 이 무시험 입학제도란 것이 고교 평준화란 변형된 제도로 버전 업되었다. 일단 초등생의 중학교 선택권은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수도 서울이나 대도시가 아니었다. 바다와 맞닿는 면적이 조금도 없는 완벽한 내륙의 작은 분지 소재 초등생이었다. 부모님의 끔찍한 교육열과 집안 형들로부터 평소 들어온 정보 덕분이었다. 나는 장래에 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이른바 ‘엘리트코스’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다. 이런데 뜻하지 않은 날벼락이 떨어졌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없애버리는 가장 초기 단계의 첫 조치였다.
이에 아버지는 이러한 제도적 한계를 돌파할 방안을 고심했다. 6척 장신의 초등학교 6학년 담임교사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여 대전으로 전학 가능 여부를 타진했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이러다 보니 나에겐 같은 관내 소재 신설 중학교로의 입학 이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여기부터 나의 인생역정은 꼬이게 되었고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대로 접어든 것이었다. 초등시절 선생님의 말씀이라면 죽는시늉까지 하며 받들고 융통성이라곤 가져다 약에 쓰려해도 없는 범생이의 대명사로 불리었다. 이런 나는 1차 반항기에다 원치 않는 상급학교로 입학이라는 두 가지의 굴레에 엮여 역사 교과서에서 중세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처럼 학창 시절 내지 인생행로의 ‘암흑기(dark age)’를 맞았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등떄기를 떠밀려 입학한 후에도 이러한 굴레에서 나를 구해낼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느라 내내 고심했다. 설립자와 자리를 마련하여 나를 대전시 소재 학교로 전학을 간곡하게 요청했다. 벽창호 같은 설립자는 애당초 이를 수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나름 핑곗거리를 하나 정도 마련하여 나섰다. 당신의 차남의 앞날이 매우 걱정이 된다는 아버지의 하소연을 들은 설립자는 그럴듯한 대응 논리를 폈다. 춘수는 반드시 대도시 소재가 아닌 곳의 중학교를 졸업하더라도 문제가 전혀 없을 것이다. 본인이 원하는 명문 고교에 충분히 진학할 수 있는 역량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전학을 허락할 생각이 없다는 방어막을 친것이었다.
내 앞날에 이 설립자는 가장 규모가 크고 최초의 걸림돌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나는 비록 10대 초반이었지만 비분강개했다. 이러다 보니 중학교 기간 내내 학습에 매진하고픈 의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설립자를 비롯한 나와 성향이 맞지 않는 다른 모든 선생님과는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이른바 ‘1차 반항기’를 좋은 핑계 삼아 사사건건 수용보다는 반대ㆍ반항 쪽을 선택했다. 바야흐로 암흑기가 도래한 것이었다.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우리 학교도 1년마다 봄가을 두 번의 체육대회를 마련했다. 이 행사의 마지막 경기로 400미터 계주를 배치했다. 이 이어달리기 경기엔 1 ~ 3학년생의 선수를 인원 할당하여 출전시키는 방식이 공평해 보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설립자는 이 부문에서도 또 하나의 독특하고 무리한 아이디어를 냈다.
한 학년이 두 개 반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실제로 달음박질에 재능이 있는 선수 이외에 각 반의 반장과 부반장을 강제로 차출했다. 일정한 코스의 일정한 거리를 뛰도록 주자를 배치했다. 이 뜀박질 부문에서 어는 정도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본인이 국가대표가 되지 못한 꿈의 한을 풀고 싶어선지 다른 선생님과 함께 자신도 주자로 자진하여 나섰다.
문제는 본래 뜀박질이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어느 정도 커버되는 것은 당연했다. 나로선 본래 선천적으로 이에 아예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 때문에 매번 체육대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400미터 계주 경기에 대한 스트레스를 넘어 극단적인 트라우마 까지 생겼다. 이럼에도 이 설립자는 이 대단한 프로그램을 3년 내내 고집했다.
초등시절 ‘닭싸움(제트기 싸움)’ 부문에서 나는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수비 전문선수로 그 이름을 날린 것과 달리 나는 이 달음박질 부문에선 바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초등시절 이른바 닭싸움에선 두 편으로 갈라 경기가 이루어졌다. 우리 팀이 무조건 이기는 경기였다. 이와 달리 이 중학교 체육대회 400미터 계주에선 정확히 그 반대의 결과가 어김없이 일어났다. 나는 3년 내내 계속 부반장을 맡았다. 그래서 이 400 계주 경기에 의무 출전 선수로 당연히 차출되었다. 대타 선수를 기용할 수도 없었다. 이 400미터 계주 경기에선 내가 소속된 팀이 무조건 패하는 구도가 굳어졌다. 그 패배의 주된 책임은 나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나는 매번 극심한 자괴감에 시달렸다.
실제로 그런 가정이나 상상을 하긴 지금도 싫다. 설립자는 본인에 계 결코 고분고분하지 않은 나를 골탕 먹이고 망신을 주려는 의도로 매번 이러한 경기 프로그램을 구상한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이 정도가 되니 고교 시절 교과서에 등장하는 시구 중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는데’란 구절이 이에 아주 적확하게 들어맞았다. 내가 설립자를 좋아하거나 그에게 호감을 가질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정말로 지옥의 구렁텅이에 내던져진 신세에 다름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