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관들은 지금, 머리 따위에 신경 쓸 때가 아니야, 머리를 마치 칼잡이처럼 하고 말이지? 공부에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이야.”
현역 시절 중대장 경험이 있는 예비역 대위 교관의 일갈이었다. 내가 고교 시절엔 1주일마다 3시간의 교련 과목이 정규수업으로 당당히 커리큘럼에 올라 있었다. 이 중 2시간은 교관이, 그리고 나머지 1 시간은 심 병장이라 불리던 조교가 교련 수업을 책임졌다.
“앞 머리는 좀 길어도 된단 말이지, 대신 뒷머리는 더 짧게 치란 말이야. 야 치사하게 두발 문제로 교관 하고 내가 짜고 이런단 말이야?”
중대장과 심 병장은 두발 문제에 관해 기준이 달랐다. 교관은 앞 머리를 조교는 뒷 머리를 짧게 다듬을 것을 요구했다. 결국 우리는 앞 뒷머리 카락 모두를 짧게 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 문을 들어설 당시엔 중고교 남학생 모두는 삭발이 원칙이었다. 그 이후 규제나 방침이 다소 완화되었다. 고교 2년부터는 스포츠형 두발로 개선이 되었다. 삭발이 원칙이던 시절엔 조금이라도 멋을 더 내고자 ‘이부’ 내지 ‘삼부’ 머리를 용감하게 갖추고 나타나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이부와 삼부 머리는 삭발보다는 좀 머리카락 길이가 많이 남았다. 때론 이마와 구레나룻 부분을 면도날로 손보는 ‘앞면도 서비스’까지 원하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외모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고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이 친구들은 다른 학생보다 좀 앞서가거나 조숙한 부류에 속했다. 이른바 ‘진보’ ‘진취’라는 실체와 좀 거리가 있는 훈장을 달고 다녔다.
삭발 문화는 일본 식민지나 군사문화의 잔재라 보아도 큰 무리가 아니었다. 스포츠형 두발이 표준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체력이 넘쳐나거나 좀 삐따닥 한 친구들은 머리카락 전체를 면도날로 아예 밀어버리는 ‘백호’ 스타일을 자랑하며 당당히 나타났다. 어쩌면 고교 시절 체력이 일생을 통틀어 최고 절정기이고 반항기이기 때문이라는 변명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패기’니 ‘젊음’이니 이런 것을 내세우면 일정한 수준은 접어주던 시절이었다.
“낮은 포복 준비! 구분 동작으로 하나, 둘, 동작 그만. 다시 일어서. 뒤로 돌아. 높은 포복 준비!”
심 병장은 오늘 교련 시간 모두를 ’ 포복 훈련‘만으로 채웠다. 운동장 한 편을 장악하여 우리는 낮은 포복과 높은 포복에 집중하여 심화 훈련을 받은 것이었다.
“야, 너희들 3년 선배들 일거야. 양호 교사가 매일 내게 항의를 하는 거야. 빨간약이 부족하다고... 그때는 자갈밭을 일부러 골라 수업 시간마다 포복 훈련만을 시켰지. 그래서 너희 선배들은 무릎과 팔꿈치 등이 남아나지 못했어. 지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심 병장은 이 엽기적인 과거의 행적을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당시는 모든 교사는 학생들에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 병장은 교련은 물론 체육수업도 1주일 1시간 따로 배정을 받았다. 교련 시간에 포복 훈련에 모든 것을 쏟아붓듯이 체육수업은 태권도 연습으로만 모두 메웠다. 참 특이한 교사의 엽기적인 가르침이었다. 그럼에도 이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학교 당국도 이 심 병장의 수업방식을 ’ 신성한 영역‘으로 존중했음은 물론이었다.
당시 교련 과목 관련 전국 규모의 행사는 크게 두 가지가 건재했다. ‘교련 검열’과 ‘교련 실기 경연대회‘가 그것이었다. 서슬이 시퍼랬던 권위적인 군사정권 시대였으니 이 정도는 별로 이상할 것이 없었다.
반장을 소대장으로 부르고 그 위는 대대장(학연 총지휘자), 연대장(학교 총지휘자) 이 상관으로 있는 체계로 굴러갔다. 매주 월요일 아침엔 애국 조회란 이름을 붙인 독특한 행사가 있었다. 교장 선생님도 교련복을 갖추어 입었고 분열, 열병, 사열 등을 받았다. 그러니 우리 교장 선생님을 사단장이라 불러도 무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