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호야, 이제 그만 좀 하자.”
형법총론 강의 시간이었다. 시간이 종료되었음에도 교수에게 계속 질문을 이어가는 친구에게 기성이는 태클을 걸었다. 기성이는 재미없는 수업을 빨리 마감하고 쉬는 시간을 온전히 확보하고자 했다.
“교수님, 음행의 습벽이 없는 부녀자가 혼인빙자간음죄의 객체라고 하는데 무슨 뜻인가요? 자세히 좀 설명해 주세요.”
이번에도 기성이가 나섰다. 그런데 지난번의 경우와는 딴판이었다. 지난번엔 지겨운 형법 총론 시간을 어서 끝내자는 의도로 친구 석호의 질문권을 틀어막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질문자로 나섰다. 형법각론 내용 중 강간죄, 간통죄, 혼인빙자간음죄에 관해서 기성이는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적 호기심보다는 개인적인 흥미가 앞섰다.
“이제 됐나? 더 이상 궁금한 것은 없나?”
교수는 기성이의 질문에 명쾌한 답변으로 마무리했다. 기성이는 학교에서 치르는 중간·기말고사나 사법시험 공부에 별로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부문에 관한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나 흥미가 있느냐가 오로지 자신이 더 알고 싶은 것의 유일한 기준이었다.
“나, 이번 학기만 마치고 군대 가기로 했어. 그런데 기말고사를 치르지 않고 입대할 거야.”
한 학기를 수료하려면 기말시험을 치르고 일정한 수준의 학점을 얻어야 가능함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런데 기성이의 이런 계획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해 우리 동기들은 무척이나 궁금했다. 기성이는 우리와 입학 동기이지만 사정이 있어 고교 졸업 후 두 해나 늦게 대학 문을 들어섰다. 그래서 잃어버린 세월 중 반이라도 만회하려 했다.
당시 우리는 교련 수업을 “군사훈련”이란 이름을 달아 1주일 4시간 배정받았다. 2시간을 1학점으로 환산해서 한 학년에 4학점이었고 3학년까지 수업을 받아야 했다. 우리보다 2년 선배들은 3학년까지 풀로 군사훈련을 수료하면 현역 입대할 경우 교련 수업 덕분에 6개월이나 군 복무 단축 혜택을 받았다. 만 24개월의 복무로 예비역에 편입될 수 있었다.
군사훈련 학점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하면 이른바 “학적 변동 보고” 제도에 의해 대학 4년 졸업 시까지 이어가던 입대 연기 혜택을 박탈당했다. 운동권 학생들을 조기에 군대로 끌어가려는 강제징집 대상자로 지목하는데 이 군사훈련이란 제도가 일부 악용되던 시절이었다. 정부 당국은 이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다. 1980년 중후반에 정식으로 새 정권이 출범했다. 이에 교련 수업 체계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수업 시간과 연한이 대폭 줄어들었다.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다시 복학하려면 최소한 3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이래서 복학생 선배와 현역 재학생 후배 간의 학번은 3년의 차이가 대세였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복학이 늦어진 선배와는 4년의 차이가 나기도 했는데 이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런 형편인데 만 2년 만에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3년 차에 복학을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기성이는 이 위업을 해내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기성이의 수강 신청 패턴은 다른 동기들과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상대적으로 짜다고 소문난 법대 과목 강의는 필요한 최소한으로 줄였다. 선수과목이나 전공필수 과목 이외의 학점을 다른 단과대학 학점으로 메꾸기로 작정을 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렇게 수강 신청할 때부터 기성이는 3년 차에 복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른 단과대학 교수들이 상대적으로 더 융통성이 있다는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학점 취득에 반드시 기말고사를 요구할 것 같은 과목 수를 줄이려 했다.
당시는 지금과 달랐다. 입대일을 자신이 원하는 시점으로 선택할 권한은 어디에도 없었다. 입대일을 앞당겨달라고 행정 당국에 요구하는 ‘우선 징집원’ 제도가 있었지만 그것도 자신이 원하는 날짜로 입대일을 정하는 데는 엄연히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제약과 걸림돌이 많은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기성이는 기발하고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야말로 승부수를 던졌다. 기말고사를 치르지 않고 학점을 받을 수 있는 묘수를 짜낸 것이었다. 자신이 수강 신청한 과목 담당 교수를 일일이 찾아 나섰다.
“잃어버린 세월 중 반이라도 만회하려 합니다. 교수님, 저 좀 도와주세요. 기말시험을 리포트로 대체하게 해 주세요.”
우리 동기들은 물론 선후배를 통틀어도 전무후무했다. 이러한 전례가 없는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기성이는 교수를 찾아다니며 설득과 애원을 병행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던가. 이래서 기성이는 의무 출석 일수만을 채운 후 기말고사를 리포트로 대체할 수 있는 일종의 특혜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보통 11월 말이 2학기 종강일이었다. 그러나 기성이는 이러한 눈물겨운 노력 끝에 1개월여를 앞당겨 2학기를 수료 후 군 입대에 성공했다.
우리 동기들은 2학년 교련을 수료하면 육군 기준 본래의 군 복무 연한인 30개월에서 3개월 보름이란 세월의 군 복무 단축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기성이도 26개월 반의 복무 기한을 채워야 했다. 10월 하순에 입대를 한 기성이는 3년 차 3월 10일 전후에 전역이 가능했다. 이래서 결국은 3년 차에 캠퍼스로 복귀할 수 있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입대일을 최대한 앞당기기 위해 구청과 병무청의 문턱이 닳도록 수없이 넘어 다녔다는 것이 나중에서야 밝혀졌다. 이래서 기성이는 2년 6개월 보름이란 세월을 당당히 현역 복무로 채우고 학사 일정에 차질이 없이 모교에 복학을 하는 자그마한 기적을 이뤄냈다. 2년 후배 재학생들과 나머지 캠퍼스 생활을 이어갔다.
기성이는 전공인 법학 과목 이외의 다른 단과대학 강의를 열심히 섭렵했다. 우리에게 전혀 생소한 과목이었다. 음대 ‘화성악’과 상대 ‘소비자 행동 분석학’ 강의를 찾아 캠퍼스 내를 활기차게 누볐다. 우리 동기들은 이런 기성이를 두고 사실 좀 빈정거리거나 수군대기 일쑤였다. 법대 전공과목 수강만을 고집하던 우리 동기들에 견줄 때 기성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달랐고 매우 다양했다.
“기성이와 매일 붙어 다니는 저 여학생은 도대체 누구야? 애인이야?”
“아니, 고향 후배라고 하던데?”
기성이는 강의가 빈 시간엔 늘 혼자가 아니었다. 기성이와 늘 동행하는 여학생의 옷차림은 독특했다. 북한 성인 여성의 전통 복장에 딱 맞았다. 흰 저고리에 까만 치마였다. 이런 패션에서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캠퍼스 안의 구석구석 어느 곳이든 가리지 않고 이 커플은 나타났다. 왕관 모양을 형성화한 ‘크라운 콘서트홀’ 뒤 건물은 학생회관이었다. 이곳 구내식당을 서너 명의 동기가 찾아 나섰다. 오늘도 이 커플을 이곳 먼발치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럼에도 아직 미스터리로 남았다. 이 후배로 추정되는 여학생과 기성이의 관계는 어떻게 정리가 되었는지 지금도 이에 대한 정확한 소식을 전해 들은 동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기성이는 보통의 다른 입학 동기와는 전혀 다른 독특한 캐릭터의 소유자였다. 남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을 길을 찾아 나서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선택한 길을 묵묵히 가던 깨어 있는 친구였다.
주위 보통 사람들의 제도나 관행에 갇힌 루틴한 사고와 생활방식에서 벗어난 창의적인 인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았다. 일찍이 기성이의 아이디어를 공유했더라면 나도 1년의 세월을 절약하여 내 인생의 역정이 조금이나마 달라졌으리라는 흐뭇한 상상도 해보았다.
“박현성, 모 제조업체에서 정치자금을 기부했어. 이 행위는 과연 법인의 사업 목적 범위 내의 행위로 볼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하지?”
‘무어. 그것이야 판사가 알아서 할 일이지요.’
“교수님, 판사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하네요.”
회사법 강의 시간이었다. 잠시 딴전을 피고 있던 나에게 교수는 난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내가 무심결에 내뱉은 혼잣말을 기성이는 교수에게 그대로 일러바쳤다. 순간 나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이미 내 이름 석 자를 제대로 기억을 하는 교수의 관심 있는 지목과 질문에 나는 너무 성의 없이 응대를 했다. 그런데 기성이의 전언이 더욱 문제였다. 기성이는 자신이 독특한 캐릭터임을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아직도 행방이 파악되지 않는 기성이의 무운장구와 행복한 삶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