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삼남 삼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베이비부머 세대라고 하지만 보기 드물게 나는 형, 제, 자매를 모두 가진 행운아가 되었다. 고향 부모 슬하에서 자랄 때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계속 큰 아들을 특별 대우하는 이른바 "장남 프리미엄(장엄)"이라는 게 줄곧 있었다. 다른 자식들도 마찬가지로 그 흔한 표현대로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 엉덩이를 호호 불어가면서" 키웠겠지만 유독 장남에게 부모님은 더욱 올인하였다.
장남은 중학교 입학시험을 시작으로, 모든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매번 당당히 합격하여 부모님의 기대를 결코 저버린 적이 없었다. 게다가 대학 4학년 2기 말 즈음엔 모 재벌그룹 계열 회사에 입사하는 기염을 토했다. 재수를 한 번도 하지 않고 논스톱으로 직행하고 그것도 장남의 다른 동기들보다 초등학교를 1년 먼저 입학하였다. 게다가 출생신고마저 1년 늦다 보니 호적상으로는 만 20세 약관에 대졸 신입사원이 되는 진기록도 세웠다. 일정기간 근속을 하면 병역혜택을 받는 방위산업체 취업을 하였으니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나를 포함한 동생들에게 "나는 20살부터 밥벌이를 했다. 돈 버는 게 어디 쉬운 일인지 아느냐"는 질책성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차고 넘는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장남은 중학교를 마칠 즈음엔 가세가 여의치 않아 장차 대학 진학은 무리라 스스로 생각하고 당시 가난한 집안의 수재들이 모인다는 국립 철도 고교에 다니는 사촌 형과 진학 상담을 하였다. 그리하여 5년 제인 대전 공전에 입학했다. 나에게 그 기회가 오면서 집안 여기저기 기적 같은 반전이 일어나 살림살이가 극적으로 나아졌다. 아버지의 사업이 잘 풀리고 우연한 기회에 사들인 조선 토종 꺼먹 돼지가 12마리나 되는 새끼도 낳아주는 등 우호적인 일이 잇따랐다. 두 누나와 여동생의 희생, 게다가 장남의 형제애에서 비롯된 전폭적인 지원에 내가 보답하는 유일한 해법은 사법시험에 합격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이루지 못했고 늦은 세월까지 형제자매들에게 민폐를 끼쳤던 건 평생 짊어지고 갚아야 할 부채가 되었다.
우리 6남매의 아버지가 75세란 이른 연세에 별세를 하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해외근무 중인 장남의 형편 등을 감안하여 4일장으로 모시게 되었다. 장남이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차남인 나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로 최선을 다했다. 장남은 비행기를 여러 번 갈아타는 30여 시간의 귀국 여정이었다. 장남은 나에게 수시로 장례 진행상황과 계획 등을 브리핑받았다. 늦게서야 장례식장에 도착하여 별로 한 일도 없는 장남은 본인이 무슨 개선장군이나 된 것처럼 행세를 하다니 황당하기까지 했다. 문상차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준 고교 절친은 아주 정확한 정답을 말했다. “이런 큰일이 생기면 장남이 없는 상태에서는 일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게 되고 차남 이하는 자식도 아니야”라고 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시골 본가의 계단을 내려오다가 미끄러져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서울 소재 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인공관절을 이식하는 큰 수술을 받게 되었다. 사정들이 있어 막내인 삼남에게 어머니의 간병 역할을 맡겼다. 회복실을 거쳐 당신의 병실로 돌아온 어머니는 병실 입구 쪽에서 총총히 걸어오는 막내아들을 보고는 말했다. “해외에 있다더니 먼 길을 어떻게 왔느냐”라고 하였다. 막내아들에서 장남 환영을 보았던 것이었다. 이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장엄이었다.
장남은 나의 대학교 2학년 무렵부터 부모를 대신하여 결코 적지 않은 하숙비와 책값, 용돈을 지원했다. 이는 평생 잊지 못하고 언젠가 모두 몇 배로 보답해야 하는 정신적 물질적 빚이 된 지 오래다. 장남으로부터 생명수를 매달 수혈받아 철없는 나는 생맥주도 즐겨 마시기도 했다. 지방 직장생활을 접고 세 형제와 여동생, 이렇게 넷이서 제3막 정도 되는 자취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는 나와 두 동생 세명의 등록금으로 뭉텅이 돈이 필요한 때였고 생활비는 장남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게 되었다. 얼마 후 어머니는 이 월계동 시영아파트 시절을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힘이 들었지만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공부를 시켰던 재미있고 보람이 있었던 때라고 회고했다.
얼마 후 장남이 다니는 회사의 출퇴근 시간을 줄이려 안양역 인근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당시 사법시험 문제, 군대 문제, 석사학위 논문 등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과제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사법 시험엔 계속 낙방을 하였고, 군입대도 더 이상 연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석사학위 논문 작성도 생각처럼 원만하게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때마침 퇴근한 장남은 이런 사정을 귀신같이 눈치를 채고는 나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어이 김 박사, 무슨 일이 있나? 앞으로 네가 석사 학위논문을 쓰든 아니면 계속해서 사법시험공부를 하든 필요한 건 내가 다 밀어줄 수 있다”. 구세주나 할 수 있는 그런 말이었다. 순간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끈끈하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형제애를 당연히 온몸으로 느꼈다. 속으로 소리 내어 크게 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장남에게 무한정 일방적으로 혜택만 받은 것만은 아니다. 나도 은혜를 갚으려 형제애에 기인한 여러 가지 일을 나름대로 했다. 장남의 부재 기간 동안 국내에 줄곧 있었던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은 물론 그 후 두 개의 소송을 비롯하여 집안 대소사를 챙겼다.
최근에는 장남은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져 반신 불수가 되었다. 휠체어와 간병인의 신세를 지지 않고선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후 이와 관련된 2개의 분쟁 건을 해결하느라고 흰머리가 제법 늘어나는 대가를 치렀다. 몇 년 전에는 조카의 군대생활에 있었던 애로사항을 내가 일정한 수준 해결해주어 적성에 더 맞는 곳으로 보직을 변경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최근엔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해내지 못하는 장남을 나는 종종 찾아본다. 내가 오랜 기간 공부하던 시절 특히 하숙비, 책값, 용돈 등을 생명수처럼 수혈받았던 일 등을 이야기하면 장남은 굵디굵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제 그 이야기는 다시 꺼내지 말라고 한다. 이에 장남과 나는 서로 뒤엉켜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울어 병실 안을 순식간에 눈물바다로 만들어 버린 적도 있다.
최근 내가 몸 담고 있었던 회사에서는 일 년 후에 자신에게, 배달되는 편지를 작성하는 행사를 하였다. 작년 말에 나도 물론 이에 동참했다. 내년 이맘 때도 나는 같은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 이전에 이보다 더 절박한 첫 번째 우선순위가 있었다.
제발 장남이 집중적인 재활치료로 정상을 되찾아 일상생활에 복귀를 했으면 한다는 간절 한 바람을 네임펜으로 굵고 힘 있게 적어 넣었다. 이제 부모님께서 모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예전만 못하겠지만, “장남 프리미엄”도 계속 누리고 형제애 아니 형제자매애를 주고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나는 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