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별나게 자주 모이는 고향 통합 동창회를 예년보다 2주 정도 늦게 무주군 일원의 수련원에서 하기로 했다. 각종 모임의 살림살이를 여러 번 오랜 기간 맡다 보니 국민 총무라 불리는 상철이는 종래 숙원 사업이던 덕유산 향적봉에 이르는 케이블카를 타보자고 했다.
미리 정해진 시각을 놓치지 않고 예약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그동안 이루지 못한 작은 꿈을 이번에는 꼭 달성하자고 했다.
이미 단골 모임 장소가 된 이곳 수련원에 올 때마다 시도해 보지만 강한 바람 때문에, 또는 성원이 되지 않거나 이미 예약이 마감되는 등으로 무위로 돌아가곤 했다. 오늘에야 드디어 예약에 성공했다며 친구들에게 상철이는 자랑까지 했다.
1박 2일 모임이다 보니 둘째 날엔 사업상 용무나 기타 다른 일정 때문에 예닐곱의 친구들은 새벽이나 아침 식사 후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났다. 이번 동창 모임 마지막 일정까지 동행하기로 한 친구들은 30여 명이 조금 넘었다. 10대 남짓한 승용차를 자연스럽게 나누어 타고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순식간에 도착했다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덕유산 절경을 구경하고자 몰려든 관광객들은 꼬불꼬불하게 여러 번 구부러진 대기 줄에 나름 질서를 지키며 각자의 차례를 기다렸다. 우리는 이미 예약을 마친 상태이니 우왕좌왕하지 않았다. 절정에 오른 단풍만큼이나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차려입은 친구들은 오랜만에 가슴이 설렜다. 케이블카 1대마다 4명의 정원을 정확히 채웠다. 우연인지 남녀 성비도 정확히 맞추었다. 아득한 유년 시절부터 공유한 세월이 워낙 오랜 고향 친구들이다 보니 남녀의 구별은 특별한 의미가 없었다.
케이블카는 출입문을 걸어 잠근 좁은 공간이지만 친구들은 갖은 재미있는 포즈를 많이 만들어내고 인증샷을 날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야기의 소재나 내용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거리낌 없이 웃어대고 휘파람도 불며 흥얼거리기도 했다.
우리 일행이 탄 케이블카는 덕유산 정상의 “쓰리 쿼터(3/4)” 수준의 높이까지만 데려다주는데 그 이후 정상까지는 도보로 오르는 수밖에 없었고, 오를지 말지는 각자 선택하면 되었다. 정상까지 오르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 친구들은 별로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때 커다란 반전이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기상의 변화로 눈비가 내리다 날이 개었다, 다시 맑아졌다, 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나로선 같은 공간에서 이런 괴팍한 기상 이변을 처음 겪었다. 이미 다른 친구들은 많이들 알고 있는 걸로 보였다.
나뭇가지 위나 바위 여기저기에 제법 눈이 많이 쌓였다. 그런데 이 정체가 눈이 아닌 “상고대”라 하니 나로선 좀처럼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얼마간의 눈이 내리고 강풍이 몰아쳐 일부는 허공으로 흩어져 버리고 그 일부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그러니 분명히 그 정체는 눈이 틀림이 없는데도 다른 이들은 그게 아니라고 했다.
‘이거 상고대가 눈이야, 서리야? 아니면 정각 이름이야?’
나는 속으로 계속 의문을 품었다.
처음엔 상고대가 우리가 오르고자 하는 산 정상에 떡하니 자리 잡은 멋진 정각의 이름인 줄로 알았다. “상고대까지 갈 거냐”는 질문을 방금까지 바로 옆의 친구가 한 걸로 기억되기 때문이었다. 이쯤 되면 나는 자신의 무식함이 창피한 줄도 알아야 하는데, 상고대란 정각을 이름에 틀림이 없다고 혼자서만 믿었으니 그저 뻔뻔스럽기까지 했다. 상고대가 무엇인가 제대로 알지 못하면 주위 친구들에게 처음부터 물어보았어야 했는데도 그저 나만의 생각을 고집했다.
나는 나름 멋진 구도를 잡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메신저도 동원해 나의 입사 동기 단체방에 올리기도 했다. 입사 동기 중 등산 마니아인 우철이는 상고대도 멋지고 어쩌고 하는 댓글을 달았다. 이럼에도 나는 그게 정상 누각의 풍경이 멋지다는 이야기로 들었다.
“이보게, 친구! 상고대란 나무나 풀에 내려 눈처럼 된 서리야.”
그제야 일행 중 한 친구가 드디어 상고대의 뜻을 제대로 알려줘서 비로소 무지에서 벗어났다.
대기 중의 수증기가 승화하거나 0°C 이하로 냉각된 안개나 구름 등의 미세한 물방울이 수목이나 지물의 탁월풍이 부는 측면에 부착 동결하여 순간적으로 생기는 얼음이 상고대였다. ‘수빙’이라고도 한다. 다른 말로 얼음(서리)꽃이라 불리는데 일시적인 기상 이변으로 생긴다. 사진작가들은 이 상고대를 자연현상 중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꼽기도 하는가 보다.
이 상고대는 기온이 낮고 습도가 높은 날에 잘 만들어지고 전문 산악인들도 자주 구경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라고 한다. 대부분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상고대는 한자어가 아닌 순수한 우리말이었다. 나는 다른 친구들 대비 시야가 무척이나 좁은 것을 인정해야 했다.
상고대가 만든 이렇게 엄청난 절경을 비교적 오랜 시간 동안 구경할 수 있는 호강을 누리다니, 이번 여행은 이 “상고대 구경” 하나만으로 본전을 뽑고도 남았다.
무식할수록 더욱 용감하다는 말은 누구에나 적용된다고 볼 수 있었다. 지식 못지않게 지혜도 중요함은 물론이다. 이른바 “전문가 바보”가 이 사회에 많은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