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 캐러 가는 날

by 그루터기



막내동생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아버지는 많은 고민 끝에 인삼 관련 사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인삼은 지금보다 당시엔 훨씬 가격이 비싸고 희소성이 있었다. 이런 인삼 관련 사업엔 여러 행태가 있었다. 수확 적기에 임박한 인삼 밭을 밭뙈기 단위로 사들인 후 일정한 수준의 손질과 가공 후 수삼이나 건삼으로 되팔아 매매차익을 남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대망의 인삼 캐러 가는 날이 드디어 밝았다. 모든 일꾼들이 도착한 후 준비물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점검한 후 최종 목적지로 팀워크가 뛰어난 ‘별동대’는 출격을 개시했다. 먼저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당신의 애마가 된 배기량 200CC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어 선발대로 벌써 출발한 지 오래되었다.


친구가 운전자가 된 경운기와 삼륜 화물차를 조합하여 고안해낸 ‘개종 차’에 준비물을 빠짐없이 챙겨 싣고 별동대 일행은 숲머리를 지나 모리 삼거리 모퉁이를 돌았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비포장 신작로 길을 따라 한참을 달려 길 한편에 우리는 자리를 잡았다. 최종 목적지이자 집결지는 신작로 건너편 야산 중턱에 자리한 인삼밭이었다.


이미 선발대로 나선 아버지와 인삼 밭주인(전주), 가족, 이웃사촌, 같은 부락 지인들이 미리 도착하여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아버지가 미리 준비한 찌개 전용 돼지고기 부위인 "퇴옥살" 10근 뭉텅이를 덤으로 건넸다. 전주는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오늘 전주가 베풀기로 되어 있는 점심 잔치 준비에 한결 부담을 덜었다는 눈치였다.


드디어 일은 시작되었다. 일꾼들이 인삼밭에 투입되었다. 인삼 채굴 작업이란 것이 갈대로 엮어 얹은 인삼발 그늘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덕분에 수월해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다른 막노동과 달리 좁고 낮은 공간에서 쪼그려 앉은 자세로 지속적인 곡괭이질을 해야 했다. 그 모양을 밖으로 드러낸 인삼 뭉치를 흙 부스러기나 지푸라기 등을 탈탈 털어내고 후속 작업을 하는 사람의 눈에 띄기 쉬운 장소에 가지런히 올려놓으며 계속 진군해야 했다. 이러다 보니 오금도 저리고 수시로 허리에 통증이 왔다. 결코 녹록한 작업이 아니었다.


한 두렁의 작업을 마치거나 일정한 진도가 나간 경우 일꾼들, 전주 가족, 동네 구경꾼들이 자연스럽게 둘러앉아 막걸리를 한 잔씩 마셨다. 오늘은 참여 인원이 적지 않다 보니 주름이 많고 찌그러진 양재기가 일시적으로 부족했다. 차례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일부 동네 구경꾼들은 이젠 방법이 없었다. 신고 온 흰색 고무신짝 안쪽의 흙 부스러기 "북띠기"조각 등을 아쉬운 대로 땅바닥에 툭툭 떨어내고 들이댔다. 신성한 노동후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들이켜는 막걸리는 토종 조선 꿀맛을 능가했다. 이도 저도 아니고 기다리다 지친 동네 어르신은 양손바닥을 오목하게 한데 모아서 줄을 섰다. 세숫물 대신 막걸리를 양손 바닥으로 가득 받아 한숨에 후루룩 들이켜는데 영화에서도 보기 쉽지 않은 희귀한 장면이었다.


그 무렵 인삼 전주의 안주인과 동네 부녀자들 네다섯 명이 은색 스테인리스 또는 고무 대야를 각각 하나씩 머리 위에 똬리를 깔아 이고 더러는 두세 개의 주전자를 한 손에 마저 들고 인삼 밭 입구로 들어섰다. 드디어 푸짐하고 넉넉하게 여유 있는 웰빙 음식 오찬 파티가 벌어졌다.


아직 햅쌀은 이르지만 문전옥답에서 수확한 천연산 기름이 좔좔 흐르고 빛깔도 영롱한 ‘아끼바레 흰쌀 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집에서 직접 만든 수제 두부를 아끼지 않고 듬성듬성 썰어 넣고 으깨진 콩 입자와 온전한 콩알이 뒤범벅된 ‘담북장'(청국장), 무쇠 솥 밥 위에 얹어 쪄낸 호박잎과 약간 뻑뻑한 강된장, 아버지가 미리 건네 준 퇴옥살에 두부와 호박 꼬지 등을 넣은 김치찌개, 시래기 된장국, 검은색 서리태 콩자반, 무는 물론 감자도 썰어 넣은 고등어조림, 참기름을 아껴 발라 구운 김, 기타 오이ㆍ가지 무침, 멸치볶음, 깻잎 장아찌, 토종 순 찹쌀과 메주 등으로 빚은 고추장, 된장에 생오이, 양파, 고추, 상추, 깻잎 등이 총출동했다.


음식 인심이 특별히 좋기로 소문난 전통 남도 한정식 집의 풍성한 메뉴를 방불케 했다. 아무리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도 이 웰빙 음식을 먹으면 무조건 입맛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맑은 공기와 초가을 녘 부드러운 햇살 등 뛰어난 풍광 아래서 신성한 노동으로 흘리는 땀과 허기 등 이 서로 상승작용을 했다. 산해진미가 될 수밖에 없었고 모든 음식은 눈 깜 박할 사이에 동이 났다.


일꾼들이 인삼 밭 둔덕 위의 한편에 가지런히 인삼을 늘어놓게 되면 후속 작업자는 마대에 모조리 집어넣어 중앙 집결지로 모았다. 이렇게 하여 하나의 제법 큰 인삼 더미가 완성됐다. 이 더미는 햇빛이 들지 않고 습기가 없으며 통풍이 좋은 곳을 택해서 보관해야 했다. 구름은 새털 수준밖에 없었고 산들바람이 부는 초가을 들녘이었다. 풍광이 뛰어난 그 이름도 정겨운 동네 ‘넘벌’ 산자락이 되다 보니 이런 장소를 고르기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는 제법 규모가 되는 인삼 더미를 마대에 담기 전에 섬세하게 사전작업을 한번 더 했다. 더미가 쌓이기 전에 아버지는 별도의 도구도 없이 양손과 손가락만 이용하여 다시 한번 흙 부스러기 등을 떨어냈다. 이 소중한 인삼이 행여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지만 능숙하게 흔들어대는 최종 점검 작업이었다. 이 총집결지에서 인삼이 약간 꾸들꾸들한 상태까지 마르기를 기다리는데 이는 "도가"(양조장) 앞마당의 너른 멍석 위에서 말리던 고두밥을 방불케 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면소재지 5일 장터 인근에 자리한 ‘창고 집’에 도착했다. 별동 대원들은 각자 보급받아 목에 걸고 있던 수건을 힘차게 흔들어 일행의 화려한 개선을 기다리던 가족들의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무릇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 먹고사는 생업에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8인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아버지는 투기적인 인삼 관련 사업에 베팅을 하여 결국 성공했다.


아버지는 18세의 어린 나이에 소년 가장이 되었다. 그 후 다시 분가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할아버지로부터 한 푼의 재산도 물려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해 날품팔이, 양곡상, 과일장사 등 이 것 저 것 해보지 않은 사업이 없었다. 자수성가의 전형이었다. 그렇게 우리 6남매 자식을 번듯하게 길러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보여 주었듯이 우리 형제들도 자녀들에게 땀 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롤 모델이 되었으면 한다.

이상이 생업과 관련된 신성한 노동이자 소풍 행렬이기도 했던 인삼 채굴 여정이었다. 내년 초가을엔 내가 이를 재현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지만, 그 일행에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한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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