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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Jul 30. 2022

추억의 창고 집 시대(3편)

                            

성냥개비를 모두 태우고 나면 그 시커먼 잔해가 생겼다. 때론 이 잔해는 성냥개비에 불을 붙이기 전의 자태를 온전히 간직한 경우가 있었다. 숯이 탄생했다. 부러지지 않고 꼿꼿하게 자신의 부동자세를 지켜냈다. 행여 망가질세라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다. 이는 아주 소중한 장비였으니 잘 모셔야 했다. 

    

이른 시각에 코를 드르렁거리며 먼저 골아떨어진 친구들이 타깃이 됨은 물론이었다. 이런 친구의 손바닥에서 팔뚝과의 경계선이 포탄을 장착하는 장소였다. 손바닥을 안팎으로 접었다 폈다 하면 주름이 생기는 곳이었다. 이곳에 가로로 생겨나는 주름 한가운데 홈에 이 성냥개비 잔해의 아래 부분에 침을 발라 똑바로 세우고 끼워 고정시켰다. 이 잔해의 위 끝 부분에 다시 성냥불을 당겼다. 2번이나 성냥개비에 불을 붙여 태우는 이 지난하고 섬세한 공정에 우리는 오늘도 성공했다. 

    

시커먼 숯으로 변신한 성냥개비의 잔해가 다시 한번 빨갛게 변하며 위부터 아래로 타들어갔다. 드디어 마지막 순간 친구의 살갗에 따끈 따끈한 불기운이 전해졌다. 결국 코를 정신없이 골아대던 친구는 기겁을 하여 벌떡 일어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이름하여 이를 관내 용어로 ‘따끔불 놀이라 불렀다. 이러니 공부를 위한 모임이 절대 아닌 잡담과 장난을 위한 동거였다. 

    

짬뽕 배달 왔어요.”

얼마이지요?”

“3그릇이니 180원이지.”
 우리 창고 집의 왼쪽 담을 맞대고 있는 중국음식점이 있었다. 5일장을 옮겨 다니는 장돌뱅이 상인들의 아침 식사나 해장술을 해결하는 곳이었다. 때론 숙박시설의 기능도 감당했다. 얼마간 중화요리 주방장을 초빙하여 영업을 이어갔다. 고개를 잔뜩 구부리고 온몸을 달팽이처럼 말은 누나 친구는 짬뽕을 올린 쟁반을 쪽문으로 간신히 들이밀었다.

     

저녁밥을 일찍이 해결하고 늦은 시각까지 잡담과 장난을 이어가다 보니 금세 시장기가 돌았다. 읍내 그 이름난 값산당의 짜장면과 쌍벽을 이루는 가곡 식당의 간판 메뉴는 짬뽕이었다. 어머니가 가끔 마련 했던 뜨신 국수건진 국수보다 면발이 좀 굵었고 쫄깃쫄깃했다. 바다와 맞닿은 한 뙈기의 땅도 없는 온전한 내륙지방의 작은 분지에서 귀하디 귀한 해물 맛도 볼 수 있는 작지 않은 아주 좋은 기회였다.

     

오늘은 수업을 마친 후 친구 한성이가 우리 창고 집에 들렀다. 한성이는 내 일기장 뭉치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한 번 폼을 잡고 그저 흉내만 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오늘은 630분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 6시 창고방에 도착해서 친구들과 공부를 했다.”

를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일기장에 영어로 옮겨 보았다.     

! 진섭이는 영어로 일기를 쓰네? 와우 대단하다.”


한성이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입을 딱 벌렸다. 아주 기초 중의 쌩 기초인 영어 일기를 흉내 내 본 것에 대한 과분한 평가를 받은 것이었다. 그 이상 더 써 내려갈 실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허풍을 떤 것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보상받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이후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는 영어 작문에 관해 제대로 배워 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금융기관 입사시험을 치렀다. 입사 영어 시험에선 무시 무시한 비중의 영어 작문 문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저 억지로 그럭저럭 꿰어 맞추었다. 그럼에도 입사 문턱을 넘어설 수 있었다. 결코 작지 않은 미스터리 중의 하나였다. 내가 수험생 시절 국가고시 영어는 1차 과목이었고 5지 선다형으로 출제되었다. 그러니 애당초 영작문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매월 25일은 범국민 운동의 하나로 쥐 잡는 날로 정했다. 우리 창고 집은 항상 일정한 재고의 쌀 보리쌀 가마니와 밀가루 시멘트 포대가 쌓여 있었다. 이런 곡식을 밤낮으로 축을 내는 서 선생이 득실거렸다. 곡식 가마니 한귀퉁를 뚫어내고 포식을 하다 보니 그 피해는 적지 않았다. 

    

이 서 선생의 목숨을 끊어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독성이 강하기로 이름난 쥐약을 밥이나 벼 등 곡식에 버무려 쥐가 단골로 다니는 통로의 군데군데 흩뿌려 놓았다. 또 철재의 ‘쥐 차 개’란 덫과 쥐약을 섞은 음식물을 같은 곳에 장착하는 방법도 있었다.

      

아버지는 이런 종래의 방법과 다른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사방의 흙벽이 맞닿는 곳의 모서리 아래에 물을 반 정도 채운 짙은 고동색 고무 양동이를 대령했다. 모서리의 중간 높이에 반질반질하고 조금 딱딱한 비닐로 된 빈 비료포대를 잘라내 올렸다. 그런 다음 이를 모서리 가운데로부터 좌우로 약 20센티미터 내외의 나비로 펼쳐 부착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의 새로운 발명품이 적중했다. 서 선생을 잡아내는데 제대로 먹혔다. 흙벽 모서리를 타고 올라 창고 집의 서까래를 오르고자 하던 서선생이었다. 이 서 선생은 이윽고 비닐 재질의 미끌미끌한 비료 포대 위를 시발점으로 신나는 쭈름말을 탔다. 아래로 수직 낙하를 했던 것이었다. 양동이 안에 담긴 물에 풍덩 빠져버리는 참으로 보기 드문 참사가 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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