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루터기 Sep 14. 2022

지옥 같은 자금부 시대(10편)

                     

여의도는 각종 금융기관의 본부는 물론 한 때 메이저 지상파 방송국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메뉴별로 특화된 맛집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리 본부 빌딩 맞은편의 홍우빌딩 지하엔 부추 된장찌개’를 간판 메뉴로 내세워 성업 중이었다. 30분 전 정오부터 4인용 테이블 여나무 개 개를 완벽하게 세팅 후 손님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완료했다. 참으로 가성비가 좋은 웰빙 음식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곳 근처엔 열빈이란 간판을 내건 정통 중화요리 식당도 버티고 있었다.  

   

미원빌딩 9층에 오르면 특이하게도 꿩요리 전문점을 찾을 수 있었다. 오늘은 자금과 담당 대리가 부하 직원 일동을 대동하고 이곳을 다녀왔다. 내 고향 300번지 시대 설날 떡국 꾸미로 올리던 추억의 맛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이 미원빌딩을 오르내리던 중이었다. 나는 H 증권에 근무 중이던 고교 동기 규석이를 조우하는 작은 행운을 얻었다. 고교 졸업 후 우리는 처음 얼굴을 맞댔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우리는 학교별로 지원을 해 고교 입학시험을 치른 세대였다. 서울을 비롯한 5대 도시 이른바 뺑뺑이출신의 같은 세대 다른 고교 동기들보다 훨씬 끈끈한 유대감을 자랑했다.  

   

일단, 우리 내일 점심이나 같이 먹자. 여의도 백화점 지하 칼국수집에서 만나자. 거기는 뛰어나게 맛이 있는 집이거든...”

이래서 규석이와 나는 지속적으로 연락과 만남을 이어갔다.

     

규석이는 자신의 대학 동기가 우리 회사 총무부에 대리로 근무 중이라 했다. 나는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사법시험 준비로 개기는바람에 이제 겨우 입사 3년 차 남사원에 불과했다. 게다가 최근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 왔으니 앞길이 그저 막막했다. 친구 규석이는 대리라는 직위가 새겨진 명함을 내게 건넸다.   

   

미원빌딩 4층에 자리한 한 곳의 음식점엔 연중무휴(年中無休)’란 한자로 적힌 액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특정인의 인생 좌우명이나 명문 집안의 가훈이 아니었다. 가로 변과 세로 변은 황금 비율이었다. 이름난 서예가의 작품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었다. 고급스러운 표구도 이 액자의 그레이드를 한껏 높였다.      

이 액자가 적힌 대로 이곳은 항상 물 좋은 싱싱한 해물 요리를 대령시켰다. 1년 내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영업을 이어가다 보니 골수 단골손님이 항상 줄을 이었다. 어찌 보면 근무일 내내 야근을 이어가는 자금과 직원들과 일맥상통했다.


우리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야근을 해야 하는 신세였다. 이곳 역시 하루도 끊임이 없이 영업을

하다 보니 식자재의 회전이 원활해져 신선도의 유지에 유리할 것은 분명했다. ‘청파 해물탕’이란 상호를 자랑했다.

    

KBS 여의도 별관 뒤편은 포장마차 밀집 지역이었다. 인근 월급 생활자들이 퇴근 시각에 방앗간의 참새처럼 자주 찾는 곳이었다. 안주는 메뉴 구분이 없이 5천 원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넥타이 부대들이 직장 생활의 고단함과 애환을 달래던 명소였다. 유명 연예인의 모습도 입장료 등 대가 없이 구경할 수 있었다. 늦은 시각까지 불야성을 이루었다.

      

이 문구가 더 역동적이잖아?”
 예 맞습니다. 그것으로 고치겠습니다.”

이 도표 말인데, 이 끝 쪽 부분 비고란을 아예 다 날려버리는 것이 어떨까?”

이 것은 불완전 명사이니 띄워 적어야 하는 것 아니야?”

일중 차월은 절대 금지할 것 중 할 것을 빼자고, 너무 강한 인상이잖아? 영업점에 대놓고 갑질을 하는 것 같잖아?”

어이, 최 준수 씨, 처음 기안문서 챙겨 의자 들고 이쪽에 앉아볼까?”     

영업자금 조달 및 운용계획이란 시달 문서를 기안하던 중이었다. 나는 이 문서의 초안을 자금 과장에게 처음 보여준지 이제 23번째 퇴짜를 맞는 진기록을 세웠다. 자금과장과 자금부장 책상을 번갈아 오가며 문구나 양식 고치기를 반복했다.

     

이런 ‘페이퍼 워크’에 시간과 정력을 쏟아붓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생산성을 따지자면 낙

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래도 결

재 라인이란 것이 있었고 최종 결정권은 부서장에게 있는 걸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이런 짜증스러운 행태에 대해 대놓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최 준수 씨 고등학교 어디 나왔지, 나처럼 @@@@부속 고교 정도는 나와야 하는 것 아니야?”

자금과장은 농담을 섞었다고 하나 이젠 출신학교와 개인 스펙까지 들먹였다.

과장님, 저도 학창 시절엔 국어 실력은 단연 탑이었요. 독해력이나 맞춤법 등에 일가견이 있습니다.”

누가 기안을 했는지 참 명문이잖아?”

은행으로 발송 대기 중인 대출금리 감면 요청이란 대외 문서의 최종본을 들고선 내게 의견을 물었다.

, 과장님, 문구가 잘 다듬어진 것 같습니다.”


이러고 있던 중이었다. 사무실 뒤편 창가로 밖이 훤히 내다보였다. 서산으로 해는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이 아오지 탄광은 어는 구간이나 결코 만만한 공정이 절대 없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지옥 같은 사금부 시대(9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