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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Sep 15. 2022

지옥 같은 자금부 시대(11편)


                        

이쪽으로 오셨으니, 이제 임원으로 등록해야지요? 종씨인 최 상무로 등재합시다.”     


회사가 법인 명의로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차입하는 것은 너무나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다. 거래 은행은 이 자금을 차입하는데 모든 이사들이 동의를 하였다는 이사회 기채 결의안라는 별도의 서류를 요구했다. 이사회가 적법 절차에 따라 열렸고 회사가 자신들 기관으로부터 돈을 빌리는데 동의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다.   

  

실제 등기 임원 5명이 직접 자신의 이름을 적고 서명을 한 다음 이사 직인을 날인해야 했다. 이것이 제대로 된 절차였으나 이는 말뿐이었다. 각각 이사로 지명된 자금부 직원들은 역할 분담을 했다. 각자 필체를 달리하고 한글과 한자로 이름을 그럴듯하게 배분하여 적었다. 물론 이사의 사용 인감은 제대로 날인해야 했다. 은행 측에서 인감증명과 대조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아오지 탄광으로 전입을 온 대부분의 자금과 직원들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에 이미 등기 임원 자리를 하나씩 꿰찼다. 모두 벼락 출세를 했다. 가문의 영광이었다.  

   

주말인 오늘은 어서 자금을 마감하고 자금부 동료 너 댓 명이 영화 관람을 하러 가기로 했다. 자금과 업무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회계과 동기였다. 자금과장 책상을 지나치며 작정하고 쓴소리 한마디를 던졌다. 담배꽁초가 수북이 담긴 재떨이를 힐끗 쳐다보며 날린 홈런 타였다.      

이렇게 골초이니 키가 클 수가 있나?”

우리는 혹시 각자 자신을 염려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순간 사무실 안은 뒤집어졌다. 우리 동기도 자금과장 보다 장신이라고 결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사돈 남 말’을 앞장서서 몸소 실천했다.

     

이곳 자금과에 몸을 담다 보니 화폐 단위에 대한 혼선이 왔다. 내 호주머니 1,000원이 회사 돈 1억과 딱 맞았다.      

이번에 저희들이 200개 콜머니를 했지요?”

1억을 한 개로 불렀다. 영업자금 일일 현황 집계 등 통계자료는 백만 단위로 잘라서 그 기준을 삼았다.

저희 지점 오늘 잔고는 32입니다.”에서 323천2백만 원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자금과 최 준수입니다.”     

내 사내 전화번호는 505번이었다. 내 주된 업무는 매일매일 영업점에 필요한 자금을 원활히 공급해주고 마감 후엔 여유자금을 회수하여 은행 등 차입금을 상환하거나 잔고로 남겨 다음 날 영업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영업자금 이체 ·이수였다. 그 밖의 부수 업무도 여럿이 있었다. 단자사 등에 융통어음 실물을 전달하는 딜리버리 업무는 자금과 직원 모두 같이 분담을 했다.

     

영업점 영업에 필요한 자금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나는 거래 은행을 수시로 오가야 했다. 아침 이른 시각에 사무실을 나섰다. 우리 부서에 배치된 업무용 차량을 이용해 전국 모든 영업점마다 일일 기본 자금을 우선 송금했다. 영업점 형편에 따라 주 거래은행은 제각각이었다. 기본 자금의 송금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자마자 추가 자금 이체 요청이 적힌 메모지가 수북이 쌓이기 일쑤였다. 영업점의 거래은행으로 송금을 하기 위해 주로 걸어서 다시 은행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지금처럼 폰뱅킹이니 인터넷 송금제도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부지런히 발로 뛰어다녀야 하는 팔자였다.

      

이곳은 모든 영업점의 영업자금 운용을 통제하다 보니 영업점 출납 담당자나 책임자 입장에선 우리가 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은행과 당좌

차월 약정의 한도를 정하고 이의 적정한 운용을 총괄하는 업무도 내가 겸했다.     

 

영업점 출납직원이 마감 자금을 유선으로 통보

하던 시절이었다. 영업점 직원이 거래은행을 잘

못 부르거나 서로 바꾸어 부르는 작은 실수를 저지르면 우리 자금과 직원은 이로 인해 몇 배의 수고와 발품을 더 팔아야 했다. 제일과 한일 은행 자금 내역을 서로 혼동하여 통보하는 실수가 가장 흔했다.

      

이렇게 되면 자금과 직원 누군가는 은행에 반드시 또 한 번 이상 다녀와야 했다. 잔고가 남는 은행 계좌에서 잉여 자금을 인출하여 부족한 은행 계좌에 메꾸어야 했다. 고달픈 왕복 달리기를 밥 먹듯 해야 했다. 이래서 일일 마감 자금 내역을 유선으로 접수할 때는 잔뜩 긴장하여 실수를 줄여야 했다.

     

늦은 시각에 자기 앞 수표 발행을 해달라고 은행 직원에게 머리를 조아려가면서 부탁을 했다. 실물을 들고선 다른 은행으로 질주하여 잔고를 늘려 놓아야 하는 고달픈 작업은 온전히 우리 자금과 직원들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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