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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Sep 17. 2022

지옥 같은 자금부 시대(13편)

                       

당시 내가 몸을 담고 있던 투자신탁회사는 운용판매가 분리되기 이전이었다.  한국은행 발력을 동원해 주식을 매수한12. 12 증시 부양조치를 두고 시중에 회자되던 유명한 말이 있었다.

투자신탁은 재무부의 적자이고 증권사는 서자란 말인가?” 였다.

   

투자 신탁 직원들이 가장 선호하던 근무부서는 단연 주식·채권 운용부였다. 일정한 자격을 취득하고 소정의 트레이닝을 마친 후 수 조원을 주무르는 주식 · 채권 매니저가 되는 것이 많은 직원들의 로망이었다. 이러다 보니 회사 내외에서 두 운용부의 위상은 막강했다. 그 많은 증권사 임직원들은 투자신탁 펀드매니저로터 오퍼라 불리는 주식 매매주문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피 튀기는 경쟁을 벌여야 했다. 당시 주식· 채권 운용부가 우리 회사의 적자라면 내가 출근하는 자금부는 서자에 불과하다는 패러디는 제법 근사한 작품으로 탄생했다.

     

금융 기관 간 자금을 차입할 때 일반적으로 융통어음을 발행했다. 이자 금액이나 할인료를 산정하려면 기간 계산을 해야 했다. 이에 아주 유용한 도움을 주는 ‘일수 조견표’라는 품목이 동원되었다.  

    

단자사라 불리는 투자금융회사나 증권회사에선 이 일수 조견표를 자체 제작을 해서 판촉물로 활용했다. 회사명과 전화번호 주소 등을 새겨 넣는 것은 기본이었다. 딱딱한 철제 받침 위에 켈린더 기능을 인쇄해 넣은 여유 있게 너른 지면을 넘기면서 사용했다. 메모할 수 있는 공간도 충분히 확보가 되었다. 나는 아직도 일수 조견표의 내지를 매년 갈아 끼우면서 30년 이상 잘 활용하고 있다. 당시 모 증권사에서 우리 자금과에 나누어준 철제 받침대가 약간의 녹을 제외 하곤 아직도 건재하다. 우리 자금부의 단골 거래처인 메이저 투자금융회사는 이번 연말에 우리 쪽에 이 일수 조견표 5부를 들이미는데 그쳤다. 반면 주식·채권 운용부 쪽은 매니저나 책임자들이 요구하는 수량을 모두 맞추어 주었다.

     

이 두 군데 운용부서의 운용 지시로 펀드 설정과 해지에 따른 자금 과부족분의 정확한 수치를 우리 자금부에 통보를 해주어야 우리 주거래 은행의 최종 일일 마감 잔고가 나오는 구조였다. 이러니 우리 자금과는 운용부서의 뒷 치다꺼리를 하는 허드렛 일 부서’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박승우 씨, 조심하세요. 셔터 내리고 있어요,”

이미 때는 늦었다. 오늘은 즐거운 급여일이었다. 우리 자금부 내 입사 동기가 오랜만에 단합대회라는 이름을 걸고 고스톱 경기를 벌였다. 우리 본부 사옥 맞은편 빌딩 2층에 자리한 고스톱 단골 경기장인 세호 칼국수’ 집이었다.  

   

이곳은 저녁 시간은 물론 점심 식사 시간에도 경기를 벌일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곳 중의 하나였다. 여자 종업원은 우리를 보챘다. 이제 곧 자신들은 퇴근을 해야 하니 이 정도에서 경기를 접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우리는 기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우리 일행은 지하층을 거쳐 빌딩을 빠져나오던 중이었다. 빌딩 셔터문이 이미 작동을 개시했다. 그래서 나는 동기에게 주의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셔터문에 걸리지 않도록 고개를 충분히 숙이고 빌딩을 빠져나올 것을 권유하던 찰나였다.   

   

동기는 안경을 걸쳤음에도 신기하게 콧등 위쪽 부분이 찢어지는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제법 출혈이 있었다. 급히 내 하숙집 인근의 병원을 찾아 응급처치를 마무리했다. 동기와 나는 오늘 밤 내 보금자리에서 동숙을 하기로 했다.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자금과장이 단신인 이유를 담배를 많이 피운 탓으로 돌린 적이 있던 동기였다. 동기는 자금과장 보다 결코 장신이 아니었다. 6척에 조금 모자란 나도 아무 탈이 없이 빌딩을 빠져나왔는데 나보다 훨씬 짧은 키에도 셔터에 부딪치는 의외의 사고가 터졌다.  

    

12. 12 증시 부양 조치로 부실화된 3대 투신사를 정부는 공적자금을 투입하여 정상화시키기로 했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부서 대비 해야 할 일이 많은 자금부도 바삐 움직였다. 그중 최전선 소총수인 자금과 남직원 4명은 누구보다 많은 발품을 팔아야 했다. 주거래 은행에 3 투신 자금부 말단 소총수들이 모였다. 맏형 격인 한투는 우리와 좀 달랐다. 우리는 문서는커녕 종이쪽지 한 장도 없이 그저 어서 빨리 당좌수표를 수령하기 위해 몸부터 움직였지만 한투는 그 와중에 정식 공문서를 챙겨 왔다. 공적자금의 투입 배경, 3 투신에 투입하는 자금의 규모와 절차 등이 기재된 문서를 들고 온 것이었다. 우리보다 한 수 위였다.

      

어디 가서 누굴 찾으면 얼마의 공적자금을 줄 것이니 서둘러 움직이라는 것이 우리 회사의 스타일이었다. 소총수들은 수고를 덜기 위해 각각 전담 은행을 정해 다른 2개 투신사의 업무도 서로 대행하기로 전격 합의를 마쳤다.

     

우리 몫의 당좌수표 중 하나를 건네받은 나는 갑자기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려 일조원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숫자가 또렷이 인쇄되어 있었다. 9,000억 원이 넘는 관련 전표를 나는 복사하여 기념으로 잘 간직하기로 했다. 반시장적인 조치가 불러온 부작용이 누적된 아쉬운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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