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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Oct 10. 2022

수학여행 전성시대(고교시절 1편)

  

“~ 밤에 보았던 영아의 꿈은 ~”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 보아도...”

고교 2학년생인 나는 이번에도 수학여행 명단에 가까스로 이름을 올렸다. 우리는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최신형 관광버스 8대에 나누어 몸을 실었다. 23일간의 설악산 여행의 장도에 올랐다.

     

고속도로에 올라서자 몇몇 친구들은 치열한 마

이크 쟁탈전을 벌었다. 운 좋게도 마이크를 먼저 잡아든 친구들은 자신의 18번을 한곡이 아닌 메들리로 이어가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에게 순번을 넘기는데 매우 인색했다. 당시까지 16

일국의최고 통치권자가 자리를 굳건히 지

키듯보컬 모두는 각자 자신의 ‘장기 집권’을

꿈꾸었다.  

     

아니, 이 무슨 아닌 밤에 홍두깨야? ‘안내양을 갑자기 모두 안내군으로 갈아치운 이유가 무엇이야? 누구의 아이디어야...?”

우리 학교는 남녀 공학이 아니었다. 대전 시내에 주소를 둔 고교는 모두 남 녀 공학이 아니었다. 한 곳도 이에 예외가 없었다. 넘쳐나는 에너지 끼

를 어찌 해소할 줄 모르는 사춘기의 최절정인 고

2학년생이었다. 미모의 안내양을 23일간 지켜볼 수 있는 아주 절호의 기회가 일거에 무너

졌다. 

    

저번 대흥동 D고교 수학여행엔 연예인급 안내양이 총출동했다고 들었는데...”

학교 총책임자인 교장 선생님의 고뇌에 찬 결단으로 보였다. 우리 고교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터프함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학교 당국이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여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나선 것이었다.

     

내 본적지 가곡리 300번지 시대 말곤 관광버스에 안내양 대신 안내 군이 출동한 사례는 찾아보기 매우 힘든 일이었다. ‘안내군이라는 말 대신 총각이 더 어울릴 듯했다. 5일 장터 장돌 배기들의 허연색 광목으로 둘둘 말아 묶은 봇짐을 실어 나르던 쓰리쿼터가 떠올랐다. 이 쓰리 쿼터 조수로 장정이 동승하는 경우 말고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때 운전기사와 조수는 이른바 도제 시스템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비록 23일간의 짧은 기간이라도 고교 2학년 친구들 정서에 다소나마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했으나 이는 우리의 순진한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하숙집 주인 아들이자 내 2년 고교 선배의 정확한 분석도 이어졌다. 안내양과의 동행이 무산된 데 대한 아쉬움을 입밖에 낸 내게 조심스러운 진단을 건넸다.

맞아, 우리 학교 수학여행 관광버스에 안내양이 출동하기엔 좀 그렇지...”     

안내양들의 안위만을 우려한 너무 옹졸한 학교 당국의 행태에 우리 모두는 비분 강계 했다. 

     

지금 시골엔 돈이 씨가 말랐어. 이번 내가 시골에 다녀오는 길에 아버지가 네 수학여행비를 이렇게 전해 주라고 해서...”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인 고향 아저씨가 자전거를 이용하여 내 하숙집 인근까지 몸소 행차를 마쳤다. 나는 초 중학교에 이어 이번 3번째인 고교 수학여행에도 나설 수 있을지는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수학여행 랠리를 이어 가기가 힘든 걸로 거의 굳어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고향 아저씨가 이렇게 극적인 반전 소식을 갖고 왔으니 오늘은 아주 기분 좋은 날이 되었다. 나는 다른 형제자매 대비 특혜를 받은 자식이 되었다.

    

내가 중학생 시절이었다. 서울 소재 모 중고교 수행여행단의 철도 건널목 대형 충돌 사건이 터졌다. 이 때문에 문교부에선 수학여행 금지령을 내린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가까이는 세월호 사건으로 인한 수학여행금지령의 효시라 보아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나는 이런 중간마다의 허들을 운이 좋게도 매번 잘 피해 넘기곤 했다. 이 대형 교통사고는 운전자들의 과실 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문교 당국은 수학여행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진단을 내리고 수학여행을 아예 틀어막았다. 교육 당국의 과잉대처였다. 관광버스 안내양을 안내 군으로 교체한 우리 학교의 조치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내가 고교에  발을 처음 들여놓은 시점엔 이른바 ‘공포정치’ 시대를 능가했다. 교칙을 어기는 학생들에겐 내려지는 징계 수위는 어마어마했다. 이 징계를 관장하는 학생과장은 그 외모부터가 우리 동기들 모두를 긴장시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군살이 전혀 없었고 약 6척에 육박하는 신장을 자랑했다. 평소 웃음 띤 얼굴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항상 근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무적인 말투와 표정은 물론 평정심 냉정함을 아주 적절한 비중으로 섞어내고 있었다.

    

수학 선생님이었다. 인문계열이었던 나는 다행히도 이 학생과장의 수업을 들을 기회는 없었다. 전형적인 문과 취향인 내가 이 선생님을 마주할 일이 없었던 것이 나에겐 그나마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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