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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Oct 13. 2022

수학여행 전성시대(고교시절 4편 완)

                                              

출석 번호가 차이가 나는 바람에 같은 교실 안에서도 지정 좌석이 떨어져 있는 친구 병준이와 성수였다. 그런데 병준이는 이번 수학여행 길에 귀중품 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나섰다. 당시만 해도 그리 흔치 않은 카메라였다. 이 카메라로 서로 모델을 바꾸어가며 포즈를 취하다 보니 우리 셋은 금세 부쩍 친해졌다.

     

설악산 울산 바위 정상에서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담아낸 기념사진을 나는 아직도 잘 보관 중이다. 그런데 우리 흑백 사진 카메라보다 훨씬 앞서가는 괴물이 등장했다. 주한 미군 병사도 우리처럼 오늘 이곳 울산 바위 정상에서 기념 촬영에 나섰다.

 

현상’ ‘인화’ ‘확대이것은 내 고향 본적지 300번지 시대엔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면 소재지에서 가장 너른 신작로 길 한 변에 자리한 사진관의 창문에 붉은색 큰 글씨로 붙어 있던 홍보 문구였다. 이에 더하여 이는 흑백 카메라를 이용해 최종적으로 완성된 사진을 얻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공정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 괴물 카메라는 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세 단계의 공정을 아예 무시 해버리거나 일부 절차의 생략이 가능했다.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 주한 미군 병사는 즉석에서 칼라로 완성된 사진을 한 장 금세 뽑아 방금 전의 관광객 모델에게 건네는 호의를 베풀었다.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름하여 폴라로이드 컬러 즉석카메라’였다. 

     

나는 오래 살고 싶다.”

방금 전 우리가 울산 바위 정상을 향해 철제 계단을 낑낑대며 조심스럽게 오르던 중이었다. 세계사 선생님의 기지가 넘치는 이 한 마디에 근처 우리 친구들 모두는 하마터면 실족을 할 뻔했다. 아찔한 위기를 넘기던 순간이었다. 

    

어떤 제비가 필요 이상으로 부지런을 떨었어. 그 제비가 쓸데없이 이곳을 발견하는 바람에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올라야 하는 것이 아니야?”

방금 전 세계사 선생님의 너스레 보다 먼저 근처 친구 하나가 재미있는 농담 한마디를 내던졌다. 우리는 금강굴을 향해 조심스레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다. 

    

최근 고교 동기 한 친구에게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화학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로또로 얼마 전 인생 역전을 이루어냈다. 이 화학 선생님도 이번 우리 여행에 동행했다. 우리가 들르거나 머무르는 곳의 절경과 순간마다의 추억을 자신의 보물 덩어리인 카메라에 담아냈다. 당시 선생님은 프로 흑백사진작가의 반열에 이미 올라 있었다.  

   

, 이놈들아, 내가 모델 역할을 해주었는데 왜 사진은 돌려주지 않는 거야?”

수업을 위해 복도를 오가던 중 불쑥 창문을 열어젖히고 2학년생 교실마다 호통을 쳤다. 선생님은 벌써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담아낸 작품 사진의 샘플을 복도 한 끝의 벽에 넘버링하여 게시를 했다. 원하는 친구들은 이 기가 막힌 작품 사진을 실비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초등시절 수학여행 길에 오가던 속리산 법주사 입구 말티고개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 규모와 폭, 주행거리가 압도적이었다. 이곳을 들어선 관광버스가 차츰 고도를 높여 가면서 양쪽 귀가 갑자기 멍멍해졌다. 옆 친구의 말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먼지가 폴폴 날리는 비포장도로였다. 굴곡의 정도와 해발 고도가 다른 고개의 추종을 불허했다. 우리를 실은 관광버스 일행은 한계령의 정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버스 기사 아저씨들은 커다란 핸들을 감았다 풀었다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어느덧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까지 맺혔다.      


버스가 줄을 맞추어 멈추었다. 아직도 진정한 꼭대기에 닿으려면 한 차례의 수고가 더 필요했다. 나무 계단을 차근차근 걸어 올라야 했다. 드디어 발아래엔 가공되지 않은 거친 산줄기와 꼬불꼬불한 비 포장도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우리 동기들의 추억을 잡아낸 기념비적인 사진 한 장도 내 사진첩의 자리 한 곳을 차지하고 있다. 한 때 지명도가 제법 높았던 연극인이자 개그맨이었던 친구였다. 이젠 대학로에서 사업에 성공한 친구이다. 당시 흔치 않았던 쳄버린을 한 손에 들고 입을 마음껏 벌리면서 소박하게 웃던 친구의 모습이 잘 잡혀 있었다.

     

수학여행 기간도 출석 일수에 포함되었다. 그래서 여행에 동참하지 않는 친구들은 이 기간 중 등교를 해야 했다. 대개 오전 수업이나 자습을 마치고 귀가하는 단축 수업으로 채워졌다. 그런데 이 불참하는 친구들 중 또 앞서가는 무리들이 따로 있었다. 부모에게는 수학여행비를 받아내선 여행기간 중 자신과 뜻이 맞는 친구들과 별개의 여행을 다녀오는 친구들이 있었다. 물론 등교는 하지 않고 무단결석을 감행했다.  

    

내 고향 5년 선배인 사촌 형 친구들 중에도 이런 앞서가는 그룹이 있었다. 무단결석을 해야 별도 여행이 성사가 되었다. 그러니 이 별도 소그룹 여행 사실은 금세 탄로가 났다. 수학 여행비의 일부를 털어 손목시계나 기타를 장만했다. 결국은 이 그룹 친구들은 한꺼번에 부모에 몰려가 무릎을 꿇고 단체로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어느 시대 어느 조직이나 평범함을 참지 못하고 주류를 벗어나려고 하는 앞서 가는 그룹은 있었다. 어쩌면 이들 그룹 중에 창조적인 발상이 나올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다. 법학에서 흔히 일컫는 빛나는 소수설 그룹에 필적했다.  

        

무릇 학창 시절의 수학여행이란 빚을 내서라도 꼭 가볼 만한 값어치가 충분히 있다.”

박대포란 별칭을 자랑하던 독일어 선생님의 간단명료한 설파였다. 이제 나는 앞으로  한 번만 더 수학여행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 4번이나 되는 수학여행 전성시대의 온전한 합체에 성공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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