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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Oct 20. 2022

추억의 창고 집과 5일장 시대(2편)

                     

늦은 장마철 끝자락에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을장마라 부르기도 했다. 오늘은 5일장이 서는 날이 아니었다. 지푸라기와 가는 새끼줄을 동원하여 섬세하게 엮어낸 제법 너른 네모난 명석 위에 널려 있었다. 보물 덩어리인 인삼을 우선 대피시켜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자매들이 모두 후다닥 비설거지에 나섰다. 멍석의 내 변 끝과 중간 부분을 야무지게 잡고 짧은 시간 안에 창고 집으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삼시 세 끼 식사를 마친 후 그릇이나 접시 등을 닦아내는 일을 일컫는 통상적인 설거지와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보통 설거지는 식사 이후에 일어나는 사후적인 일인데 반해 이 비설거지는 사전적인 개념이었다. 비가 오려고 하거나 올 때 비에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치우거나 또는 덮는 일을 말했다. 참 우리말의 묘미는 그 깊이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우리 창고집은  함석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함석지붕 위에 내려 꽂힌 후 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장대 빗물 소리는 아주 독특했다. 그저 소리라  할 것도 없는 초가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와 그 보다 좀 더 은 데시벨의 기와지붕의 그것과 전혀 달랐다. 때론 프라이팬이나 작은 무쇠솥에 볶아내던 콩 볶는 소리에 다름이 아니었다.

      

밴드의 드럼 소리와도 많이 닮아 있었다. 함석지붕을 꾸준하게 때리는 이 빗물 소리 때문에 나는 늦은 시각까지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5일 장터엔 상인 코너가 8곳 전후로 세팅된 구조물이 너 뎃개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이 구조물도 어김없이 우리 창고 집과 마찬가지로 함석지붕을 이고 있었으니 이 빗물 떨어지는 소리의 데시벨은 장마철이면 무시할 수준을 항상 넘어섰다.   

  

해질 무렵부터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장대비는 방금 전까지 흙먼지를 폴폴 날리던 장터 빈 곳마다 실핏줄 같은 빗물 길로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다. 이윽고 깔끔하고 건강한 흙내음이 5일 장터 공간에 가득 피어 올랐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이 미세한 빗물 길은 어느새 실개천이 되었다. 이 실개천은 제 갈 길을 혼자서도 잘 찾아냈다. 실개천은 그 폭과 수량이 점점 늘어났다. 농업용수가 흘러가는 에 합류하였다. 결국 비단강에 한데 모아졌다. 장차 바다로 장거리 여행에 나설 듯했다.   

  

이 굵은 빗줄기가 5일장 흙바닥에 부딪는 순간에 만들어내는 빗물 방울 모양도 독특했다. 내 본적지 300번지 부엌의 한가운데 커다란 무쇠 가마솥이 결려 있었다. 밥 짓기가 마무리되기 직전의 밥솥 안에서 보글보글 끌어 오르던 밥물 모양에 아주 딱 맞았다. 귀한 쌀 대신 보리쌀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던 밥물이 솟아오르던 모양을 정확히 뒤집은 모습이었다. 이 빗물이 땅에 닿는 순간 만들어내던 모양을 좀 더 키워 보았다. 만두를 빚을 때 밀가루 반죽으로 틀어막아 마무리하던 모양에 다름이 없었다.  

   

내가 일부러 그랬어! 내가 일부러 그랬어!”

오늘은 5일 장터 한 한가운데 공터에선 송곳 꽂기 놀이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한 겨울 미나리깡 얼음판 위에서 양손으로 잡아 얼음 위를 찍어 누르고 힘을 주어 뒤로 밀어내던 장비와 유사한 것을 대령했다. 원형 나무 막대기형 썰매용 송곳보다 막대기와 쇠못 부분의 길이가 각각 1.5배 되는 도구였다. 성인 남자 엄지 손가락 두배 굵기의 둥근 막대기에 대못을 장착했다. 대못 머리 부분을 시멘트 콘크리트 바닥 위에 눕힌 후 쇠망치로 여러 번 내리쳤다. 그래서 못 대가리를 납작하게 가공했다. 이런 못을 둥근 나무 막대기 아래 정 중앙에 못대가리 자리를 먼저  정하고 못 아래 끝부분에 조심스럽게 망치질을 계속했다. 썰매를 지칠 때 쓰던 송곳 장비를 가져다 쓰지 않고 이 놀이 전용 장비를 따로 만들어냈다.  

    

두 명이 겨루거나 편을 갈라 경기를 이어갔다. 가위 바위 보로 선공을 정했다. 땅바닥 위에 임의로 한 자 내외의 사선을 긋고 경기를 시작했다. 교대로 공격을 이어갔다. 승부를 가르는 방식이 독특했다. 지형지물을 잘 파악하여 전략을 잘 짜내야 했다. 땅 표면 위에 이 송곳을 꽂아 자신이 애초 출발한 사선의 끝부분에 시작하여 직선을 어 나갔다. 땅바닥에 송꽂 꽂기에 실패하면 즉시 상대에게 공격 기회를 넘겨야 했다. 상대를 가두어 이 직선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도록 하면 경기는 종료되었다.

      

무릇 A 매치 축구 경기나 동네 조기 축구도 구경꾼이 모여야 선수들은 분발을 하고 경기 내용은 흥미진진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이 경기에 선수로 나서지 않았다. 그저 구경꾼으로 남기로 했다. 동네 초등 꼬맹이들은 구경하기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 심지어 몸싸움까지 불사했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내 절친 막내 동생이 이번

에 송곳을 땅 위에 꽂을 차례가 돌아왔다. 그런

데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알맞게 물기를 머

금은 흙바닥의 요충지에 꽂혀야 할 송곳이 경기

를 구경하던 내 왼쪽 무릎 슬개골에서 약간 오른

쪽으로 비켜 윗부분에 정확히 꽂히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윗부분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송곳은

내 살점에 박혔다. 

    

결코 작지 않은 인사사고가 터진 것이었다. 후배는 겁에 질렸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자신의 과실로 인한 참사를 내게 변명하고자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 중간중간 내 눈치를 살피며 자신의 오른손을 머리 높이와 나란히 올려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신이 경기중 과실로 이 송곳을 내 다리 위에 꽂은 것이고 그것이 결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님을 강조하려던 것이었다.   

  

이 경우 내가 일부러 그랬어!” 가 아닌 내가 일부러 그랬어?”가 되는 것이 어법에 맞았다. 느낌표물음표의 차이에 더해 후배는 억양과 말투를 잘 못 쓰는 바람에 마치 이번 일을 자신이 일부러 저지른 것이라고 고백하듯 했다. 주위의 구경꾼들은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졌고 키득거리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내고 있었다.


자신의 과실에 의한 참사의 피해자인 내가 4형제 중 막내인 이 후배의 제일 큰 형과 동기이니 혹시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르는 질책에 더욱 겁을 먹은 것이었다. 웃질 못할 풍경이 벌어졌다. 아들만 4형제인 후배는 막내였고 내 절친이 장남이었으니 질책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우리말의 오묘한 묘미를 체험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내 왼쪽 다리 슬개골 근처 한쪽 부분에 작은 세모 모양의 이 흉터 흔적을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달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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