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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Nov 27. 2022

영업맨만의 대화법은 따로 있는가(2편)

  

과거를 묻지 말라는 대중가요 가사도 있긴 하다. 하지만 아예 예전 이야기를 틀어막는 것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과거에 연연해서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의 희망적인 비전을 이야기하자는 것은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온고지신이란 말도 있듯이 과거의 가치를 모두 부정하거나 아예 언급을 하지 말라고 호통을 치거나 윽박을 지르는 버릇은 결코 칭찬할만한 일이 아니다. 올바른 자세가 아닌 것이다.


더구나 자신은 남보다 더 오래전 추억을 수시

소환해내면서 상대에게 옛날 이야기만 늘

놓는다고 질책하는 것은 ‘내로남불’의 전형

이었다.  

    

유구한 인류 역사에서 지혜를 얻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분명히 가능하고 우리가 어쩌면 역사를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준영이의 말대로라면 전 세계 모든 대학의 역사학 커리큘럼을 일순간에 모두 날려버려야 하는 것이 맞았다.

     

“여봐요! 이 걸 먹으라고 준겁니까? 이렇게 새까맣게 태워버린 생선을...”
지난해 늦은 봄날이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음식 문화거리 구역 안 생선구이 식당 둥근 식탁에 고향 친구 셋이서 둘러앉았다. 주방에서 생선구이 모둠을 구어 우리 식탁에 올려주던 순간이었다. 준영이는 이번에도 제법 큰 것 한 건을 터뜨렸다.     


아무리 손님은 왕이라고 하지만 이건 분명히 과잉대처였다. 마주 보고 대작을 이어가던 우섭이와 나는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사장님, 생선이 좀 탔네요. 다른 것으로 바꾸어줄 수 있나요?’ 베테랑 영업맨 인 내 입장에서 보면 이런 수준이 딱 맞을 듯했다. 이렇게 일정한 예의를 갖추어 완곡하게 부탁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을듯했다. 우리가 본래 전하려던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랬으면 주방장은 오히려 마음의 상처를 입거나 반감을 갖지 않고 생선을 제대로 구어 다시 올려주었을 것이었다.   

   

목소리를 키우거나 격하게 소리를 지르는 등 질책이 결코 능사는 아니었다. 준영이는 어쩌면 상대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데 남다른 재주를 타고난 것으로 보였다. 주방장이 요리를 설령 잘못했다 하더라도 준영이의 질책 태도에 감당하기 힘든 비호감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이 건과 관련하여 이곳에 준영이와 일행으로 자리한 것에 관해 무안함을 넘어 자책감까지 들었다. 준영이는 얼마간 자신도 음식점을 꾸려본 충분한 경험이 있음에도 그랬으니 더욱 아쉬웠다. 즐거워야 할 술자리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야 인마, 너는 우리 아들보다 운전도 못하니?”

오래전이었다. 대형마트 앞 주차장을 찾던 중이었다. 조심스럽게 후진 주차를 하던 내게 준영이는 또 한 번 지청구를 질러댔다.      

그래도 나는 고스톱 실력은 있잖아?”


나는 방향을 조금 비틀어 이런 농담으로 진지한 대꾸에 갈음했다. 준영이는 나의 이런 속내를 알아낼 리가 없었다. 설령 내가 후진 주차하는 동작이 서툴더라도 내 주차 실력을 자신의 아들에 견주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대화법은 분명 아니었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나는 어떠했을가를 떠올렸다. 나는 아예 이를 입 밖에 내지 않았거나 후방 카메라가 없는 차량인가 보네?” 정도에 그쳤을 것이었다.

     

내가 본격적인 글쓰기에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고향 농촌 유년 시절을 소재로 한 ‘300번지 시대를 시리즈로 완성하여 주위 친구들에게 톡으로 전달하던 시절이었다.

 “300번지 시대 5편을 마감한 기념으로 오늘은 내가 쏜다. 그런데 6편은 언제 나오는 것이여?”

추억을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유년 시절 고향 이야기를 쏟아내는 나를 이렇게 응원하던 준영이었다.  

    

, 준수야, 저번 그런 대학 시절 네 이야기 같은 것은 쓰지 마. 그런 것은 쓰는 것이 아니야.”

참으로 황당했다. 어제까지 글을 쓰는 나를 응원했던 준영이는 갑자기 표변했다. 대학시절을 소재로 한 글엔 엄청난 반감을 보여주었다. 대학문을 들어선 적이 없는 준영이의 어쩌면 뿌리 깊은 열등감의 발로였다. 군사정권 시절 언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던 최고 통치권자의 행태에 다름이 아니었다. 아니면 내게 글쓰기 개인 지도하는 사부님의 지적을 방불케 했다. 내가 글을 쓰는 표현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작태였다. 고향 유년 시절에 못지않게 내게 대학 시절은 글 소재의 아주 중요한 큰 꼭지 중의 하나였다. 대학 시절에 관한 글쓰기는 절대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찬우가 누구지? 나는 전혀 기억이 없는데...”
최근 나는 초등학교 졸업 후 처음 연락이 닿은 고향 절친을 통합 동창회에 합류시키는 데 성공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천우와 나는 다행히 서로 많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1반 시절 최소 단위의 토론 그룹인 같은 버즈에서 항상 얼굴을 맞대었던 추억이 이에 한몫을 했다. 다른 친구들은 찬우에 대한 기억이 아예 없거나 가물가물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그 친구가 누구인지 전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닌가. 

    

얼굴을 보면 생각이 날 수도 있겠지...”정도로 언급을 해도 큰 문제는 없을듯했다. 주식시장을 분석하는 애널리스트가 특정 종목에 내는 의견엔 여러 단계가 있다. 강력 매수 추천인 ‘Strong Buy’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중립 이상 의견을 내는 것이 무난하다. 이것이 영업맨이던 당시 내 지론이었고 지금도 이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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