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루터기 Mar 19. 2023

아주 안타까운 것 딱 한 가지(1편)

“지난여름 방학 때 외갓집을 다녀오던 중이었습니다. 버스가 언덕 아래로 굴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하게 다쳤습니다. 이마가 깨지고 귀때기가 찢어지고 코가 주저앉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불행 중 다행히도 팔다리가 조금 긁히고 멍드는데 그쳤습니다.”   

  

지난번 국어 수업 시간에 옆 교실의 세준이가 ‘불행 중 다행’이란 주제로 지은 짧은 글입니다. 오늘도 박 선생님은 동작을 동반하여 설명을 계속했다. 언제나 기다리는 재미있는 국어 시간이 돌아왔다. 오늘도 우리 박 선생님은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가며 열강을 이어갔다. 짧은 글짓기엔 지명받은 학생은 일어나서 발표를 해야 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시절이었다. 나는 국어 시간마다 왜 이런 짧은 글짓기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엄청난 세월이 지난 지금에야 이 짧은 글짓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이 짧은 글짓기를 계속 이어나가고 범위를 점차 넓혀갔더라면 내가 글쓰기에 입문하는 시점이 훨씬 앞당겨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박 선생님은 한글은 물론 엄청난 한자 실력도 자랑했다. 글씨체도 힘이 있고 유려해서 이미 명필의 반열에 올랐다. 어려운 낱말 익히기엔 반드시 한자를 같이 적어가며 설명을 해주어 국어 공부에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났다.    


“준수도 역사에 조예가 깊은 것 같네. 최치원이란 인물에 관해 내가 좀 더 이야기를 해주지.”
 박 선생님은 우리나라 역사는 물론 세계사 부문에 관해서도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바야흐로 국어 수업의 질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너무 이르거나 늦은 시각에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지금의 피트니스 센터나 필라테스 현장에서 제대로 된 복장을 한 인물을 즉석에서 그려내기도 했다. 일종의 훌륭한 삽화였다. 요즘 잘 나가고 있는 웹툰 소설 작가의 기질도 엿보였다. 국어 시간마다 매번 폭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졸거나 딴전을 피는 친구 들이  많지 않았다.  

   

“준수야, 오늘 저녁 식사하고 우리 집으로 들릴 수 있지? 기말고사 성적 집계를 도와주었으면 해.”

내가 초등학교 5, 6학년 두 해 특별 활동으로 주산반에 몸을 담은 적이 있었다. 이 작은 이력 때문에 선생님들에게 자주 불려 다녔다. 이래서 개인 과목별 총점과 평균, 석차를 내는 노하우도 익히는 기회가 되었다. 박 선생님은 우리와 같은 부락 친구네 맞은편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두세 살 정도 젖먹이 아들과 부인 이렇게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나는 약간의 의문이 생겼다. 박 선생님 정도라면 서울 등 대도시 학교 교단에 설 수 있는 충분한 자질과 역량이 있음에도 이 지독한 내륙 지방 자그마한 분지인 면단위 학교로 부임하게 된 사연이 무척 궁금했다.  박 선생님은 서울 시내 굴지의 사립 S대 국문과 출신이었다. 자신의 대학 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내게 슬쩍 흘리기도 했다. 자신은 재학 중 A학점을 서너 번 밖에 받지 못했다고 작은 고백도 이어갔다. 장차 준수는 대학생이 되면 열심히 노력해서 A학점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까마득하게 보이는 내 앞날에 대한 응원도 아끼지 않았다. 이 박 선생님의 지도를 더 오랜 기간 받을 수 있었고 내가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선생님과 꾸준히 연락이 닿았으면 어쩌면 나는 대학 전공으로 국문학을 택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성재와 세권이 이리 나와라. 수업 시간에 왜 딴전을 피고 있어.”

“요리해, 이렇게 때리란 말이야.”     

오늘도 우리 친구들 모두가 가장 싫어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박 선생님만의 독특한 체벌 시스템이 작동을 하기 시작했다. 통상 다른 선생님은 훈육용 나무 막대기를 동원하여 손바닥을 때리거나 종아리를 갈기고 아니면 자신의 손바닥이나 주먹을 활용하여 따귀들 때리는 것이 당시 대세였다. 그런데 이 박 선생님은 전혀 달랐다. 자신의 몽둥이나 손을 동원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자신은 손에 피를 전혀 묻히지 않겠다는 속셈이었다. 훈육을 위한 체벌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좀 저급하고 비열한 방식을 늘 택했다.     

 

‘뺨치기’라 불리던 이 체벌 프레임은 항상 2인 1조로 굴러갔다. 이제 성재와 세권이는 교대로 상대방의 뺨을 가격해야 하는 체벌 궤도에 진입했다. 처음엔 친구들은 상대의 뺨에다 자신의 손바닥을 가볍게 가져다 대는데 그쳤다. 차마 친구의 뺨을 때릴 수가 없어 때리는 시늉만을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어떠한 이해관계도 없고 적대감이 있을 리가 없으니 이는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나 박 선생님은 이런 꼴을 그대로 두고만 볼 위인이 절대 아니었다. 이쯤 해서 박 선생님은 자신의 그 못된 버르장머리의 진수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상대 친구의 뺨을 때리는 시늉만을 내지 말 것을 요구했다. 사력을 다하여 갈기라고 요구하며 방금 전 상대 친구의 뺨을 형식적으로 그저 터치하는데 그쳤던 친구의 뺨을 최대한 세게 가격했다. 자신이 시범을 보여주고 그대로 따르라고 호통을 쳤다.

작가의 이전글 생애 첫 가출소동(2편 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