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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Apr 01. 2023

자치기 놀이(3편 완)

- 일단 지르고 보기 -

                              

                           

공격팀은 수비팀이 실제로 실측에 나설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고 그저 3,000자를 외치고 나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점수를 무작정 막무가내로 부르지는 않았다. 3,000자란 자치기 놀이 경험이 많은 친구들의 눈대중에서 나온 결과였다. 이런 경우 실제 실측이 현실화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저 공격팀이 외친 3,000점을 그대로 인정하고 향후 자신들에게 돌아올 공격 기회를 최대한 살려 단기 고득점을 노렸다. 그런 경우 극적인 역전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실측이란 공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일단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궂은 과정도 거쳐야 하는 지난한 일이었다. 맨 손에 흙가루나 오물 등을 묻혀야 했고 때론 논둑을 넘거나 크고 작은 도랑을 건너야 했다. 자치기 경기에선 일단 지르고 볼 정도로 장타를 날릴 수 있는 강타자가 꼭 필요했다. 상대팀이 거추장스러운 실측에 나서자고 미처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몰아갈 수 있는 역량을 연마해야 했다. 이러면 일단 지르고 보는 팀의 승리로 경기는 마무리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오늘도 동네 청년 여나무 명은 작은 언덕의 다른 이름인 날망에 모였다. 이곳은 매주 일요일 새벽에 향우반 조기청소에 동참하라고 친구들을 향해 목청껏 외치던 곳이었다. 흙먼지가 폴폴 날리는 학교 운동장 등에 비해 자치기 시합 장소론 아주 제격이었다. 잔디 축구장에 버금갔다.   

   

대두 20말이란 어마어마한 양의 막걸리를 타이틀로 걸고 동네 청년들이 모였다. 우리 보다 10여 살 위인 20대 초중반 청년 선배들이 오늘도 설날 명절을 코 앞에 두고 한 곳에 속속 모인 것이었다. 무려 1세기를 훌쩍 넘어서는 고색창연한 역사를 자랑하는 마을 예배당 건물 뒤쪽의 이곳은 자치기 대회가 열리는 단골장소가 된 지 이미 오래였다. 이 자치기 놀이는 작은 민속놀이로 보아도 별 문제가 없었다.     


막걸리 한 말도 아닌 무려 한 섬’ 내기 타이틀이 걸린 경기가 시작되었다. 대두 20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용량의 막걸리 뒤처리를 어떻게 할지 짐작도 쉽지 않았다. 경기가 끝나면 말 그대로 ‘동네잔치’를 벌였다. 동네 조무래기 꼬마들은 엄청난 구경거리라고 선배 선수들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멋진 수비와 장타가 터질 때마다 함성과 박수도 이어졌다. 여기서도 일단 지르고 보기행태는 쉽게 구경할 수 있었다. 조금 전 장타를 터뜨린 한 선배는 3,500자를 불러댔다.      


이곳은 잔디 경기장이다 보니 5일 장터 공간보다는 선수들이 저마다 실력을 발휘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다. 평지가 아니고 약간의 구릉지대였다. 그래서 의외의 변수가 많이 따랐다. 작은 자가 굴러 내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날망 주변에 자리한 채소밭의 울타리를 작은 자가 넘어가는 일은 자주 일어났다. 우리 친구들 자치기 놀이에 비하면 역량이나 규모면에서 이른바 메이저리그였다. 

 

나는 학력고사, 수능세대가 아니었다. 이른바 예비고사와 본고사의 두 관문을 통과해서 캠퍼스에 발을 들여놓았다. 지원 대학별 대학입학 본고사도 치렀다. 본고사에선 수험생의 성적 편차가 적은 국어 영어 점수가 당락을 가르지 못했다. 수학의 주관식 문제를 몇 개 더 풀어내느냐에 합격 여부가 달려 있었다.     

 

고교 시절 주관식 수학 시험 문제 평가 방식에 관한 기억도 되살아났다. 주관식에 80점이 배정되고 기타 나머지 괄호 넣기나 단답형은 기껏해야 20점이었다. 주관식이 아닌 단답형 등을 모두 풀어내야 겨우 최대 20점밖에 얻을 수가 없었다. 문제당 10점 내지 20점이 배정되는 주관식 문제를 풀어내야 상대적으로 고득점이 가능하고 친구들과 격차를 벌릴 수 있는 구조였다. 주관식 문제 모두를 다 풀어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많이 준비하고 풀어낼 자신이 있는 문제를 선택하고 집중해서 답안을 메우는 전략을 차선책으로 택하기도 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자치기 놀이도 마찬가지였다. 선수간의 편차가 크지 않은 두 번째 단계가 아닌 땅콩이라 불리는 세 번째 단계에 관한 실력을 집중 연마하고 이 기술을 업그레이드하는 전략이 필요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비해 이 단계는 핵심역량이 필요했다. 게다가 일정한 성과를 낸 다음엔 일단 크게 지르고 볼 배포가 있어야 했다. ‘티끌 모아 태산이란 방식도 있었다. 하지만 백번의 좁쌀보다 한 번의 큰 호박을 굴리는 것이 때론 더욱 필요했다.     


내가 길고 긴 직장생활을 이어가던 현역 시절이었다. 직원의 근무 평정은 크게 두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이루어졌다. 성과 평가와 역량 평가가 그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임원 등을 비롯한 윗선의 정무적 판단이었다. 이 정무적 판단은 점포장 선임 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직원 모두는 우선 역량을 기르고 차근차근 실적을 쌓아가야 했다. 일정한 레벨까지 역량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기본역량을 갈고닦는 단계로 볼 수 있었다. 정무적 판단을 기다리거나 기대하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점포장 공모에 응하는 등 일단 지를 수 있는 레벨에 이르기까지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함은 물론이었다. 일단 핵심 역량을 키우고 지르고 보는 배포를 내 보이는 것은 그 나중 일이었다.

          

프로야구에서 흔히 떠도는 이야기가 있다. 10승 투수 두 명보다 20승 투수 한 명이 팀에 더 도움이 된다고 야구 전문가들은 말한다. 자치기 경기에도 20승 투수에 해당하는 장타자나 홈런 타자가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야만 해당 선수를 보유한 팀이 자치기 경기에서 승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무릇 사람에겐 꾸준히 해당 분야에서 역량을 키우는 것과 결정적인 기회가 주어졌을 땐 크게 지르고 보는 배포가 모두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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