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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Apr 06. 2023

독일어 강대포 선생님(1편)

                              

“32, 최준수가 누구야?”

그래 그간 독일어 공부하지 않았었지? 이번 시험 84점 받았어. 반 최고득점자가 되었네. 박수 한번 쳐주자고...”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었다. 109일 한글날 하루 쉬는 틈을 타 나는 독일어 노트 정리를 했다. 특히 이번 시험 범위인 형용사변화 부분을 집중하여  한번 더 훑어보았다.   

   

독일어 강 선생님은 자신이 고안해 낸 형용사 변화 암기법까지 우리에게 전수해 주었다. 코일을 감는듯한 패턴을 그려가며 머릿속에 쉽게 집어넣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나는 이 덕분에 모처럼 독일어 과목에서 반 최고득점자가 되었다.      


대학 입학 예비고사에서 독일어를 영어 대신 외국어 과목으로 선택을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본고사 과목에 입성하지 못한 독일어를 예비고사만을 위해 선택한다는 것은 매우 리스크가 있는 일이었다. 설령 예비고사에서 독일어를 선택하여 고득점에 성공하더라도 본고사에서 어차피 영어 시험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독일어 공부를 접는 것이 대세였다. 대부분 대학들은 내신 성적을 전혀 반영하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영어 대신 독일어를 외국어 과목으로 선택할 이유는 더욱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반 평균이 겨우 45점대를 턱걸이하는 형편이었. 

    

그래서 국어, 영어, 수학 주요 과목 대신 독일어를 맡은 선생님은 그 위상이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 독일어를 담당한 강 선생님은 학생들이 외면하는 형편은 아니었다. 선생님은 본디 철학을 전공한 데다 말주변이 아주 뛰어나서 강대포란 별칭을 얻은 지 이미 오래였다. 선생님은 설명이나 묘사를 그럴듯하게 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논리는 정연했다. 

    

그래도 국가고시인데.... 예비고사에서 50점 만점을 받아낸다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지. 여러분 2년 선배가 저번에 외국어를 독일어로 선택해서 만점을 받았어.”

일만 명이 응시해서 한 명이 탈락하는 시험도 절대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야. 탈락자가 본인이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잖아.”     

만약 독일어가 예비고사에서 필수 과목으로 올라 있었다면 강 선생님의 위상과 인기는 정상을 오르내렸으리라는 짐작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강 선생님은 소외과목을 담당한 소회를 가끔 넋두리처럼 밖에 내곤 했다. 

          

평소 강 선생님은 독일어에 더하여 인문 내지 인성교육을 남달리 강조했고 우리에게 기회가 닿을 때마다 시간을 기꺼이 할애하여 그 분야에 관해서도 열강을 이어갔다.     


아니, 세상에 이런 일도 일어났어, 이번 독일어 시험에서 1반에 비해 2반 평균 점수가 무려 20여 점이나 높게 나왔어, 그래서 내가 오늘은 진도는 다음으로 미루고 한 시간 동안 철학에 관한 특강을 해주겠어. 어때? 괜찮지? 저쪽 이과 얘들은 어차피 땜쟁이를 할 거고 우리 문과 출신은 장차 선비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야?” ‘사농공상이란 고루한 사고 틀에서 나온 말이지만 우리는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후로 주변  친구들이  가끔 나를 가끔'선비'라 부르기도 했다. 그 때마다  나는 엔돌핀이 절로  마구 솟았다. 지금도 선비답다는 평을 받는 걸  매우 즐기고 대단한 칭찬으로 듣고 있다.


우리 학교는 문과 2개 반에 이과 4개 반 토털 6개 클래스로 편제되어 있었다. 문과 두 개 반 중 독일어 반평균이 이렇게 큰 격차가 난 적은 전례가 없었다. 참 이례적인 일이었다. 강 선생님을 특히 좋아하고 잘 따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일어난 우연의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강 선생 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우리 반 친구들은 매우 고무되어 있었다.     


타블라 라사(tabula rasa)에 관해 좀 말씀해 주세요.”
저 학생은 질문하는 수준을 보니 이미 철학에 대한 공부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네. 내가 굳이 따로 대답하지 않아도 되겠어. 인간이 태어날 때는 정신적인 어떤 기제도 감추지 않고 마음이 백지와도 같은 상태로 태어난다고 보는 것이지. 역시 2반은 독일어 성적만이 아니라 다른 부문도 레벨이 높은 것 같네.”

      

한 손을 번쩍 들고 첫 질문자로 나선 춘호는 선생님의 칭찬에 순간 어깨가 으쓱해졌다. 학교에서 정규 커리큘럼에 올라 있는 교과목이 아닌 분야에 관한 책을 이미 읽거나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어찌 보면 앞서 가는 동료였다. 그저 시험과목 공부에만 매달리던 보통 친구들로서는 좀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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