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 깎고 접는 날(1편)

by 그루터기

“소쿠리 들고 인삼 깎으러 나오세요.”

국문과나 광고 관련 학과 출신이 아니었다. 형은 공학도임에도 당시로선 그럴듯한 카피를 고안해 냈다.

막냇동생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아버지는 많은 고민 끝에 인삼 관련 사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수확적기에 임박한 인삼밭을 밭뙈기로 사들인 후 일정한 손질과 가공을 하여 되팔아 매매차익을 남기는 것이 대세였다.

인삼은 그 매매방식과 가공 형태에 따라 그 이름이 매우 다양했다. 채굴한 인삼을 생물로 거래하면 수삼, 가공하여 말린 상태로 바꾸면 건삼이라 불렀다. 건삼 중 그 꼬리를 구부리지 않으면 직삼, 구부리면 곡삼이 되었다. 껍질을 벗겨 가공하면 백삼, 벗기지 않으면 홍삼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런 분류는 서로 교집합이 있었다. 이를테면 백삼은 건삼이면서 곡삼이고, 홍삼은 건삼이면서 직삼이었다.

장차 홍삼을 목표로 재배하는 인삼은 사인 간 거래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국가에서 전량 사들여 관리하는 전매제의 적용을 받고 있었다. 홍삼은 백삼용에 비해 품종이 따로 정해져 있어 보통 6년 이상의 최소 재배기간이 필요했다. 길이와 중량 품질면에서 최고 등급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백삼은 홍삼보다 한 수준 아래 등급이었고 사인 간 거래에 별다른 걸림돌이 없었다.


건삼과 수삼의 상대적인 시세, 수삼의 길이, 체형(몸매), 질량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인삼밭에서 채굴한 상태 그대로 도매상에 넘기거나 아니면 인삼 껍질을 벗겨내는 '깎기용'으로 분류되었다. 깎기용으로 간택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몸통의 기본 길이가 일단 일정 수준을 넘어서야 했다. 굵기가 모자라거나 길이가 기준에 미달할 경우엔 수삼 상태로 삼계탕용이나 믹서용으로 팔려나가는 것이 대세였다. 일정한 굵기, 무게, 신장에 모두 나무랄 데가 없어야 깎기용 백삼으로 가공할 수 있는 최종 합격점을 받는 것이었다.

몸통이 몽땅하고 다리가 제대로 붙어 있지 않은 인삼은 한데 모았다. 이 인삼은 다리나 미 등을 잘 다듬어내고 껍데기를 벗기는 작업을 생략한 채 말려 상품화했다. 이를 일본식 용어로 ‘기보시’라 불렀다. 때론 자식을 여기서 ‘기보시보다 못한 놈’이라고 질책하거나 낮추어 부르기도 했다. 자식의 노력과 분발을 촉구하는 뜻으로 장난삼아 통상 꺼내던 우스갯소리였다.


홍삼은 담배 농사처럼 사전에 재배 면적부터 신고 후 관리를 받았다. 수확 후 정부에서 전량을 수매하는 전매제의 규제를 받았다. 우리 고장의 인삼은 이 홍삼이 아닌 백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벼농사나 다른 과일, 야채 농사와 달리 이 인삼이란 놈은 그 태생이 워낙 까칠했다. 토질을 매우 까다롭게 가리고 강우량, 온도, 습도, 바람 등 기후 조건에 따라 소출이 엄청나게 달라졌다. 씨를 처음 땅에 묻은 후 1년 만에 ‘세근’이란 이름으로 다른 곳에 옮겨 심는 그 재배 방식부터 독특했다. 최초 시점부터 4년까지 생존율도 그리 높지 않았다. 농사꾼이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기는커녕 썩어버려 아예 그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아주 작황이 양호해야 5년근으로 이행을 결정했다.

한 번이라도 이 인삼을 재배한 이력이 있는 밭에 인삼을 또다시 재배하기로 결정하는 데는 매우 신중해야 했다. 인삼이 성장하기에 적절한 지력이 이미 고갈되었기 때문에 생존율이 훨씬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재걸이’ 또는 ‘재걸’이라 하여 아버지를 비롯한 인삼 관련 사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인삼밭을 매수하려고 할 때 ‘재걸’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가장 먼저 체킹해야 했다.

오늘은 무려 1,250칸이나 넘는 커다란 밭자리 인삼 채굴을 무사히 마쳤다. 아버지는 수삼으로 중간 도매상에 팔아넘기는 것보다 건삼으로 가공하기로 최종 결정을 했다. 여러 가지를 꼼꼼히 검토한 후 승부를 걸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우리 6남매도 이제 급히 해야 할 일이 생긴 것이었다. 이제 이 인삼 깎기 ‘파시’에 임시 일자리를 채울 일꾼들을 모으는 데 총력을 다해야 했다. 엄청난 물량임에도 이 수삼을 깎아서 말리고 접어 최종 백삼인 곡삼을 가공하기로 했다. 많은 일꾼들이 필요했다.

인삼 채굴 시기는 보통 늦여름에서 초가을이 대세였다. 일 년 사계절 언제나 모두 수확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인삼을 가공하는 시장은 상설시장이나 5일장이 아닌 ‘파시’에 가까웠다. 고기가 한창 잡힐 때 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시장에 다름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면사무소, 지서에 근무 중인 봉급생활자는 예외였지만 농촌에선 농산물 수확기를 제외하곤 현금흐름이 항상 원활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인삼을 깎고 접는 시장은 제법 짭짤한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이른바 인삼 관련 노동 알바 시즌이 도래했다.

일꾼들 품삯을 책정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일꾼들을 후하게 대접한다고 품삯을 올려버리면 같은 부락 안에서 욕을 먹기 십상이었다. 품삯이란 것이 통상적으로 불문율로 정해진 수준이 따로 있었다. 그래서 이를 넘어 추가로 품삯을 건넬 경우엔 임의로 인건비를 올려버렸다는 좋지 않은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이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일꾼들에게 그리 야박한 품삯을 건네지는 않았다. 비난을 정교하게 피해 가면서 일꾼들을 후하게 대접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곁두리이나 간식을 충분히 여유 있게 제공했다. 오늘 샛밥은 된장찌개와 열무 비빔밥을 마련했다.

게다가 중간중간 보름달빵에 사이다, 콜라, 환타, 오란씨 등 음료도 충분히 대령했다. 두 누나가 담배와 신발 등 잡화를 취급하는 상점을 연이어 꾸려가다 보니 이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금전이 아닌 이른바 복리후생으로 추가 보상을 했다. 아버지의 뛰어난 사업 수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