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부장님, 이번 지점장 공모에 신청하셨나요?”
“아직 하지 않았는데요. 지금 생각 중입니다.”
최부장은 나의 상담부스 앞을 지나며 별로 달갑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최부장은 나보다 입사일, 연령 기준으로 각각 1년 3년 아래다. 그럼에도 나에게 존댓말과 완전 반토막말 중간의 어정쩡한 말투를 늘 구사했다. 자신의 대학 직속 선배인 지점장을 믿고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지점장은 자신의 대학 후배라는 이유로 이 최부장을 무조건 감싸고 모든 부문에서 눈에 띄게 챙겼다. 지점 내 직원 서열은 의미가 없었다. 최부장은 사실상 실세 이인자였다. 지점장과 최부장은 둘이서 지점 내 모든 의사결정 등을 독식했다. 그 둘만의 점포였다. 심지어 지점장은 나의 가장 큰 고객을 빼앗아 최부장에게 넘기려는 만행도 시도했다.
방금 전 나에게 한 질문도 지점장의 사주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내가 이렇게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어버린 현 점포를 떠나는 방법은 지점장이 되는 길 밖에 없었다. 때마침 최근 신설점포 지점장을 공개 모집 중이었다. 따라서 지점장 공모에 응하는 것은 나로선 너무나 당연했다. 드디어 나는 지점장 공모에서 선발되었다. 인근에 자리한 곳에 새로이 오픈하는 지점의 개설 준비위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최부장은 다시 나를 찾았다. 현재 내가 관리 중인 법인고객은 자신이 맡기로 했으니 인수인계를 해달라고 했다. 고객기반은 곧 밥줄이었다.
‘턱도 없는 소리 하고 있네, 이 친구야,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야.’
최부장이 들리지 않는 혼잣말로 나는 대꾸를 했다. 해당 법인은 내가 새로이 오픈하는 점포로 이관 해갈 것이고 지점장한테는 내가 따로 말을 하겠노라며 최부장의 요구를 일축했다.
순간 최부장은 움찔하며 한발 물러섰다. 최부장은 그간 지점장과 대학 선후배라는 이유로 호가호위하며 정말로 꽃길만 걸어왔다. 나는 그의 이런 꼬락서니를 이제 더 이상 지켜보지 않아도 되었다.
다음날 오전 일찍 지점장은 나와 최부장을 동시에 호출했다. 문제의 법인고객의 인수인계차 해당 거래처를 동행 방문하자고 했다. 내가 이관해 가겠다는 말을 입 밖에 낼 기회도 주지 않았다. 최부장에게 인계하는 것으로 기정 사실화했다.
나는 이미 1개월 전부터 내가 관리 중인 이 금쪽같은 법인 거래처를 세 번씩이나 직접 찾아다녔다.
실무책임자는 물론 최종 결재권자에게도 사전 정지 작업을 이미 마무리해 놓은 상태였다. 세 곳의 새마을금고와 한 곳의 학교법인이었다. 네 곳 모두 내가 일선에서 발로 뛰어 새로이 발굴 개척하거나 끊어진 거래를 다시 이은 곳이었다. 나름대로 일정한 연고도 있었다. 어쩌면 내가 장차 지점장으로 부임할 수도 있으니 계속해서 관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여 이미 확답을 받아 놓았다. 그런데 이런 사연을 지점장에게 미리 알릴 필요나 의무는 전혀 없었다.
“저는 이런 경우를 가끔 겪습니다. 그런데 저는 김 지점장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하고는 15여 년이나 거래를 했지요. 점포를 새로이 연다는 데 그곳에 가서 영업기반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려야지요. 여유가 되면 기존 지점 추가 거래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A금고 표상무의 너무나도 단호한 입장 표명에 인수인계받겠다고 동행한 지점장과 최부장에게 좀 민망했다. 표상무의 추가 거래 가능성 언급은 인사치레에 불과했다.
“저희 이사장님은 아무 곳의 누구나 와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김 지점장은 저희 사무실 문턱이 닳도록 수 없이 넘어 다녔습니다. 아시겠지요?”
B금고 안 과장의 깔끔한 답변도 들을 수 있었다
.
“김 지점장이 저희 이사장님 고교 20년 후배입니다. 저희들은 그러니 김 지점장을 따라 새로이 오픈하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C금고 신전무도 입장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 김 지점장 하고는 다른 지점에 근무할 때부터 오랜 기간 거래를 했습니다. 하루 이틀 만에 이루어진 인연이 아닙니다. 가볍게 바꿀 수 없네요”
S대학교 염 과장도 비슷한 맥락의 메시지를 던졌다.
이렇게 해서 오늘 거래처 방문 일정은 마감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의 애마 중고 아반떼 조수석의 최부장, 그 뒤쪽 상석의 지점장이 애써 눈을 감고 있었다. 세 사람 사이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여기서 게임은 이미 끝났다. 그럼에도 지점장은 된장인지 고추장인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김 지점장, 방금 전 표상무의 말이 무슨 뜻인가요? 종래와 같이 우리 지점하고 거래를 계속하고 추가 여유가 있다면 김 점장을 도와준다는 이야기이지요?”
“아닙니다. 저희 쪽으로 계좌를 이관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완곡하게 돌려서 대꾸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승부가 이미 났기 때문이다.
금융기관 직원마다 생각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평소 영업 최일선에서 발로 뛰면서 나만의 전략이나 노하우가 생겼고 나만의 고객을 보는 눈이 따로 있었다. 손쉽게 다른 직원으로부터 넘겨받은 고객과 나 스스로 발굴하여 개척한 고객은 하늘과 땅 차이란 게 나의 평소 지론이다.
최일선에서 발로 뛰는 영업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준 한 판의 경기였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기회를 잡고자 하는 자는 당장 뛰어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