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리 300번지 시대(제7편, 문화생활)

by 그루터기

라디오가 보급되기 전 스피커가 그 역할을 대행했다. 이장 댁에 송신시설 등을 설치하고 가입자에겐 군청색 원형 스피커를 보급했다.

이 스피커는 300번지 본채의 안방 벽 중간 아버지의 중절모자가 걸린 바로 우측에 정 위치를 했다. 방송 중단 시간엔 유선전화기 역할을 충분히 해내어 시대를 리드하던 청춘남녀의 통신수단으로도 활용이 되었다.


라디오처럼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여 안방이나 툇마루 등에서만 들을 수 있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하여 주십시오. 우리나라 국가대표 농구팀이 강호 필리핀을 88: 85로 물리치고 아시아 ABC 농구선수권대회에서 극적인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농구 중계방송 단골 아나운서인 이광재의 흥분한 하이 톤 목소리도 자주 들었다.


당시 농구가 국기 수준으로 대접을 받던 필리핀

에선 우리나라 스타플레이어 인 신동파 선수를 우상시하여 "안녕하세요"라는 통상적인 인사말 대신에 "신동파"를 외치기도 했다. 박신자가 이끄는 여자농구대표팀은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소련에 이어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는데 이런 중계방송이나 소식 등은 이 스피커 덕분에 들을 수 있었다.


사실상 군사정권의 연장이던 1979년 7월 말 조치에 의하여 방송사 통폐합이 이루어지기 전이기 때문에 KBS 라디오 방송은 1, 2 구분 없이 하나였다. 이장 댁에서 하나의 주파수에 해당되는 방송을 송출하다 보니 다른 방송사가 있다는 것 자

체를 알기가 쉽지 않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서 듣기에 알맞은 오후 8시 정각부터 약 1시간 동안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요일마다 그 테마를 달리하였다. 청취율 조사가 없던 시절이지만 그 인기도는 의심하지 않았다. “백만인의 퀴즈”, “스무고개”, “고춘자 장소팔의 만담”, “민요한마당” 등이 요일별로 방송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용과 수준이 상당한 콘텐츠였다.


“섬마을 선생님”, " 총각 삽다리 총각, 장가는 안 가고 날일만 할 텐가"라는 가사의 주제가인 “삽다리 총각”, "안시성 성마루에 꽃을 피웠네"가 생각나는 “안시성 양만춘 장군”, 대동강 물을 팔아먹던 봉이 김선달 등 주제로 한 드리마를 나는 이 스피커를 통해 즐겨 들었다.


내가 초등 5학년쯤 아버지는 드디어 라디오

시대를 열기로 결단을 했다. 당시 쌀 대두 3말 값을 주고 구입하였다. 이장 댁의 송출에만 의지하는 스피커는 한 곳의 방송만 청취가 가능했고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송출 중단 상태가 수시로 발생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 라디오시대의 도래는 가히 혁명적인 변화였다.


스피커는 300번지 본채의 안방이나 툇마루 정도에서만 청취가 가능했다. 반면 라디오는 무엇보다 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300번지 명석이 깔린 앞마당은 물론 창고 집, 들마루(평상) 위,

야외 등 어는 곳에서도 들을 수 있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내륙의 자그마한 분지인 난청지역이

라서 비록 깨끗한 음질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늘 청취를 고수하던 ‘KBS 중앙방송’이 아닌 다른 곳의 방송도 청취가 가능했다. 물론 밤늦은, 새벽 이른 시각에도 듣는 시각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었다. 바야흐로로 신천지가 도래했다.


이 라디오의 출생지는 금성이고 40 × 20 × 15 센티 미의 재원이었다 큰 사이즈의 건전지를 4개나 일렬로 장착을 했다. 갈색의 인공 합판 뒤 커버에 좌우로 돌려 잠금 기능을 하는 레버가 상단 양쪽에 있었다. 디귿자 모양을 뒤집어 좌우로 길게 늘인 형태의 손잡이 윗부분은 번쩍거리는 광채가 나는 장식이 되어 있어 어느 누구도 고급 제품이라 인정을 했다. 앞 부문 아래쪽엔 볼륨, 사이클 조절 등 레버 4개가 가지런히 장착되었다. 이 귀중품을 300번지를 떠나 우리 가족의 갖은 추억이 어린 창고 집 등으로 모시고 다닐 때는 외부에 그 정체가 탄로 나는 게 두려워 보자기로 정성껏 싸맨 후 작전을 수행했다.


대부분의 전자제품이 그러한 듯이 세월이 지나

면서 버전이 업 그레이드 된다고 하지만 처음 나온 모델이 오랜 시간 후에도 그 성능 등에서 후속상품에 비하여 결코 못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이유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라디오가 300번지로 옮겨 온지 25년이 될 즘 우리 회사에서 보내준 일본 연수 중 구입하여 물을 건너온 라디오에 아버지는 많은 기대를 했다. 그러나 이 물을 건너온 일제 라디오는 성능 등에서 25살 배기 300번지 소속 라디오에 훨씬 미치지 못한 경우를 나는 실제 경험을 했다. 전자사업 부문에선 세계에서 손을 꼽을 정도가 되고 더구나 유명 브랜드임에도 내륙지방의 자그마한 분지에

서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아버지가 애지중지한 이 라디오는 결국 당신의 일생동안 곁에 두고 동고동락을 했다. 내가 아

버지의 유품으로 고이 간직하지 못하게 된 점은 너무나 안타깝다. 스피커 대비 라디오의 청취 시

간은 훨씬 늘어났다. 평생 하던 사업의 부침에 따라 불면증을 얻은 아버지에게 이 라디오는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 시간에도 군말 없이 충직하게 시중을 들었다. 스피커 시대에 듣지 못했던 “창문을 열면”,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것처럼 이야기를 이어가니 청취자도 바로 눈앞에 벌어지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가 되었던 동국대학교 이선근 박사의 구수한 목소리가 일품인 ’ 역사의 향기’, 남북이 대치상태 냉전시대의 최전선에서 부득이한

산물인 "대북 방송" 등도 추가로 들을 수 있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국보급 성우인 고은정이 진행하는 ‘대동강은 알고 있다’를 듣자면 어린 나이지만 머리카락이 쭈삣 쭈삣 섰다.


300번지를 떠날 때까지 우리 집은 TV를 장만하

지 못했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지면 초등학교 나 윤 약국, 경제적으로 상당히 여유가 있는 몇몇 세대를

비롯하여 관내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TV가 등장한 사실을 TV 시대의 출현이라고 해야 했다.


초등학교에서 매일매일은 아니지만 특별한 이슈

가 있을 경우에 교무실이나 교실에서 TV 시청을 개방했다. 웬만한 가구 사이즈이고 좌우에서 목

재로 된 미닫이 문이 있어 평소엔 미닫이 문을 조

그 마한 자물쇠로 채워 두었다. 우리나라가 개최

국인 박스컵에서 주로 아시아 몇 개국만 참가하

는 경기였다. 우리나라팀은 버마와 단골로 결승

전에서 만났다. 연장전까지 가는 장시간의 혈투

에도 승부가 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공동

우승으로 결말이 나곤 헸다. 골키퍼 이세연 , 수비

수 김호, 김정남, 공격수 이회택, 김재한. 이차만, 고재욱 등이 많은 활약을 했다. 범 아시아도 아닌 동북 동북아시아 권에서도 압도적인 우위가 아닌

상위권에 속하는 우물 안 개구리 수준 정도였다.


다른 곳과 달리 초등학교에선 공간에 여유가 있

었고 마음대로 소리를 질러도 무방했지만 일일 드라마 등은 시청을 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다.


관내 재산 랭킹 압도적인 수위를 달리는 이●●

댁엔 벌써부터 TV를 장만하였다. 그 댁에서 TV

를 시청하려면 토끼용 먹이인 일정한 양의 아카

시아 이파리를 지참해야 가능했다. 나는 아카시

아 이파리를 따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자존심, 치사함, 빈부격차 이런 말이 나의 머릿속을 맴

돌았다. 그보다 늦게 서야 윤 약국에도 드디어 TV가 등장했다. 이곳은 농사가 주업이 아니기

도 해서인지 아카시아 이파리나 다른 대가를 요

구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 6학년 2학기 직전 300

번지를 떠나 관내 메인스트리트로 진입을 했다. TV 출현 이야기를 이어가려면 부득이 300번지 이후 1년 정도를 편입시킬 수밖에 없다. 중학교에 입학

하던 해엔 TV 출현 이후 무시 못할 커다란 일이 일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후론 매일 저녁 일정한 시각이 되면 윤 약국

약품 진열장 앞으로 나는 학교를 가듯이 출근

을 하였다. 초등학교 6년 개근을 해본 적이 있는 나에겐 이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엄청난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각종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국민 드라마 “여로”를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보

기 위해 서였다.


장욱재 와 태현실이 주연으로 연기의 진수를 유

감 없이 보여주었다. 정신연령이 좀 부족한 남편

을 부인은 극진히 내조하지만 시어머니에겐 각종

구박을 받는 게 큰 줄거리였다. 남녀노소 구분 없

이 전 국민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서울을 비롯한 도회지를 통틀어 수돗물 사용량

이 일시적으로 뚝 떨어질 정도가 되었다. 단신인 나는 까치발을 하고 보느라 본의 아니게 약품 진

열 장을 앞쪽으로 밀치게 되었다. 어린 초등생들

도 남자 주인공의 몸동작을 흉내 내며 재미있

어라 하며 웃기도 하고 극 중에서 부른 "봄이 왔

네 봄이 와"라는 노래도 경쟁을 하 듯이 따라 불

다. 아주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코미디 프로그

램에서 개성 있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영구"와 서로가 빙의 수준에 이르렀다.


내가 중학교 1 학년 시절 세기적인 축구황제 펠

레가 이끄는 브라질의 산토스 축구팀과 우리 나

라 대표팀 간의 친선게임도 이 윤 약국에서 관람

을 하였다. 우리나라 심판이 텃세를 너무 심하게 부리는 불공정한 판정에도 2 : 3의 스코어로 패

배를 했다. 축구황제 펠레와 당시 19세로 최연

소 국가 대표가 된 차범근 선수가 맞선 빅 매치

였는데 역전패를 했다. 경기 중반엔 혹시나 하고 이변도 기대하였지만 스코어 차보다 엄청나게 큰 전력 차를 어린 나도 느낀 한판이었다.


메인 스트리트 우리 집 길 건너 맞은편 집에도 TV가 등장하게 되어 여름철 저녁엔 집 앞에 진

열하고 이웃 사람들이 TV 시청의 혜택을 누리

는데 아직까지도 현역으로 활동 중인 신구의 독

특한 캐릭터로 명풍 연기를 선보인 ‘야간비행’

이란 드라마를 나도 가끔 시청을 했다.


초등 2년 반 친구의 손을 맞잡고 햇병아리들이 나들이하듯이 약 10리나 떨어진 곳으로 서커스 구경을 나섰다. 마을 뒤 편 개천가에 무대를 세

우고 사방엔 허연 광목 색상의 천으로 둘러 싸맨 보통 건물 3배 정도의 높이 공연장으로 야지리 들어섰다. 관람료는 공책 한 권을 살 수 있는 전

설 적인 5원이었다. 박수를 열심히 많이 친 어린

이들은 올 겨울 내내 고뿔 들지 않고 건강하라는 진행자의 멘트는 어린 나에게도 참신한 느낌을 주었다. 길이가 나보다 별로 더 있어 보이지 않지만 연식은 제법 되어 보이고 땅땅한 체구를 가진 성인 난쟁이가 우산 위로 불을 돌리는 장면

에 어린이들은 벌써 눈이 휘둥그레졌다. 식초를 많이 마셔서 몸이 매우 유연 해졌다는 13살 언

저리 되는 여자 무용수의 연체동물 같은 몸놀림

에 경탄과 함께 연민의 정도 느꼈다. 물구나무서는 자세에서 한번 더 버전이 업 그레이드 되어 양쪽 팔 사이로 머리를 빼곡히 내밀기까지 하는 순간이 절정이었다.


외줄 타기와 타잔이 숲 속에서 그러하듯이 아찔

하게 높은 곳에서 체조선수 못지않게 줄을 이리저

리 갈아타는 순간에선 오금이 저리고 볼일을 보러 가야 할지 말지 아슬아슬했다. 쉬운 말로 어린이들

의 손바닥엔 땀으로 흥건했다.


역시 초등 2년으로 기억된다. 탱자나무 울타리

가 트레이드 마크인 토지 개랑 조합 정문에서 10

시 방향엔 높이와 연면적 케파 등 모든 부문에서 관내 1등을 자랑하는 곡식 저장용 거대한 창고가 버티고 있었다. 지붕만 아니라 사방의 벽도 송판

위에 함석을 거칠게 못질하여 덧댄 독특한 스타

일이었다. 성인 엄지손가락 두배 굵기의 쇠막대

기를 가로로 장착한데 더하여 1 킬로그램 정도 무게의 아래가 둥글고 뭉뚝한 자물통으로 시건

장치가 되어 있었다. 나라에서 매상 등으로 사들

인 벼나 보리 가마니, 밀가루 포대 등을 대량으로 쌓아 보관하는 것이 본래의 용도였다. 통풍과 채

광상태가 별로 양호하지 않고 잔 먼지가 대단히 빽빽하게 날리는 열약한 처지인데 오늘은 이곳

을 극장으로 하루만 전용했다. 정해진 좌석이 있을 리가 없었다. 더러는 '맨 봉당'에 또는 볏짚으로

엮어 만든 나락 가마니 위에서, 말 그대로 '잡초 대형'으로 앉거나 서서 ’윌남전선’이란 홍보성

영화를 보았는데 공짜가 아닌 5원을 부담했다.

총 상영시간은 채 40분을 넘지 않았다.


당시 월남에 우리나라 젊은 군인들을 파병하는 시절이라 맹호, 백마, 비둘기로 이름 붙인 부대를 홍보하는 노래를 수도 없이 부르던 시절이었다. 목봉 체조를 하는 군인들의 장면만이 내 머릿속

에 잔상으로 남아있다.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 동네가 출생지인 친

구는 친형이 월남에서 가져온 캔커피, '봉지(봉지)'

커피 등을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고 본인도 물을 섞지 않은 분말로 흡입하여 시꺼먼 '쎄 바닥'

(혀)을 자랑스럽게 내밀며 학교 안 밖을 누볐다.

노래 제목이기도 한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에 다름 아니었다.


나의 고향은 1, 6 일 장날이다. 5일장이 서는 날

을 제외하고 우리 창고 집 맞은편에 연극무대를 세웠다. 영화 등에 자주 등장하는 아주 운치 있는 일종의 유량극단이었다. 2주 정도의 기간 공연

이 이어지는데 관람료가 따로 없는 ‘꽁거’였다. 어린 나의 눈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배우들의 연기력도 뛰어나고 작품의 완성도도 매우 높았

다. 4살 아래의 먼 촌수의 조카가 "아버지, 저 상

봉이요"라는 대사를 하는 배우의 분장한 몰골에 기겁을 하여 이모뻘인 나의 큰누나를 찾은 추억

도 새롭다. 땅을 파다 장사를 할 수 없는 노릇이

라 연극 중간중간에 지금의 건강보조식품을 팔

아서 단원들의 민생고를 해결하였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라"라는 먹히지도 않는 주문을 하며 19 금에 해당되는 마케팅용 단골 용어도 많이 우려냈

다. "한번 드셔 보아, 남정네들은 자갈밭에 가지 마,

자갈이 튀어!”라는 뱀 장사의 전매특허 야그도

등장했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드디

콩쿠르대회가 또 시작되었다. 토지개량 조합 정

문 좌측에 나무 본래의 무늬가 드러나게 제재를 한 송판으로 지은 성냥갑을 생각게 하는 관내 최초 조립식 주택이 있었다. 이곳에서 풀빵을 구워 영업을 하는 안주인이 노래자랑 오프닝 엔트리로 벌써 나섰다. 안주인은 장사 수완이 뛰어나고 흥도 많아 콩쿠르대회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른바 끼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네 집 둘째 아들이 무작정 상경한 지 몇 년 만에 엉덩이까지 오는

머리를 뽀글뽀글 볶기까지 하고선 라커이자 드러머

로 변신하여 금의환향하기도 했다. 입상자들에겐

상품으로 커다란 양은 비, 곡괭이, 삽, 쇠스랑 등

다양하고 푸짐하게 포상을 했다.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란 역설적인 유명한 대

사를 남긴 이주일도 무명시절, 초등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무대에 올라 ‘서울구경’을 열창했다. 아

니나 다를까 오늘도 ‘앵두나무 안주인’은 현란한 율동으로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독서시대란 거창한 제목과 달리 면소재지라서 동화나 위인전 등은 접할 기회가 없었고 조은파

의 ‘얄개전’ 정도는 일독을 했다. 초등생 시절의 나에겐 만화 전성시대라 할 만큼 주위가 만화책을 보기에 온통 아주 최적의 환경이었다. 운 좋게도 이웃을 잘 만난 덕분에 ‘남아 수독 오거서’라는말

에 모자라지 않은 양의 만화책을 섭렵했다.


초등 1학년 겨울방학 숙제로 만화책 10권 읽기

가 등장했다. 이 게 만화 독서 세계에 처음 입문

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관내엔 만화방이 몇 개 있긴 하지만 나는 대여하거나 구입하여 읽을 뿐 그곳에서 상주하지는 않았다. 나에겐 선배인 금

호 약방 두 아드님은 관내 제일가는 만화 장서 최

대 보유자였다. 약국 오른쪽 코너 기다란 통로를 지나면 끄트머리 정도 공간에 200여 권의 만화

책이 항상 넉넉하게 쌓여 있었다. 우리 형제는 이 많은 만화책을 때로는 선배 형제의 허락을 받아, 여의치 않은 경우엔 어른들께 들킬 세라 발 뒤

꿈치를 조심스럽게 들고서 살금살금 가져다 닥

치는 대로 읽었다.


꽁치 등 어물도 파는 자리 뒤 쪽에 자리한 5일 장터 제법 너른 장소는 만화책 사장의 영업 구역이었

다. 이곳에선 만화책을 대여 또는 판매했다. A 4 사이즈의 만화책 안쪽에 보다 작은 B5 사이즈의 책을 안에 절묘하게 끼어 숨기어 비용을 절약하기

도 했다. 여기선 관내 다른 가게에 없는 종류나

간을 접할 수 있었다.


산호, 백호, 철호는 무협이나 액션만화 부문의 대

가였고 김종길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인데 때론 어려운 낱말의 뜻풀이도 친절하게 주석을

로 달아 주기도 했다. 이 덕분에 사전이 귀하던 시절에 국어공부도 덤으로 했다. "그 대 들은 어찌하여 우리를 미행하는가? 우연히 가는 길이 같은 방향일 뿐 일세"는 무협만화에 단골로 등

장한 대사였다. 우주선 우주 정거장 등도 등장

하는 상상 만화도 있었다. 박부길, 박부성도 맹활

약을 했다. 제목은 다르나 일맥상통하는 주제가 있는 옴니버스식 구성의 일종으로 보이는 "닭가

리" "용가리" 등 시리즈 만화가 있었다고 먼 훗날 회고하는 나에게 대학시절 하숙집의 룸메 선배는

그럼 본인과 같은 세대라고 하여 기분 좋게 한번 웃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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