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주가 아버지와 맹꽁이 울음소리

가장의 책무와 교육열

by 그루터기

“현성아! 형하고 나가서 아버지 모셔오렴.”

저녁 식사 시간 즈음이지만 낮이 긴 여름이라 땅거미가 밀려오기까진 아직 여유가 있는 시각이었다. 이런 어머니 분부는 가끔이 아닌 거의 매일 이루어지는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오늘도 아직 귀가 전인 아버지를 찾아 형과 같이 면내 중심거리를 한 바퀴 누벼야 할 때가 왔다. 아버지가 다니는 코스란 이제 낯설기는커녕 눈을 감고도 절대 어긋나지 않게 일주를 할 만큼 나는 자신이 생겼다.

5일 장터 시장의 정육점 - 석유보급소 가게 - 방앗간 옆 아버지 친구집 - 바로 오른쪽 선술집 -가끔 들르는 도가(양조장), 이런 코스로 주점 섭렵을 했다.

첫 번째 주점에서 아버지를 뵙는 운 좋은 날도 있지만 몇 곳을 헛걸음한 후에 성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이고! 우리 아들들이 왔구나!”

반기면서도 술자리를 파하는 데는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아버지! 이제 그만 가시지요! 이제 일어나세요.”라고 졸라대는 임무는 형과 내가 교대로 맡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아버지에게 추가로 술잔을 권유하거나 안주와 음식 등을 건네는 주인장, 안주인, 아버지 친구들은 어린 우리 형제에겐 절대로 아군이 아니었다. 미워할 수밖에 없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망의 대상으로 격상되었다.


“그래, 가자! 어서 가자꾸나. 우리 두 아들이 왔는데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라고 늘 말을 하면서도 결코 선뜻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장터에 자리한 정육점에선 오일장이 열리는 날마다 특별 메뉴가 나왔다. 지금의 뼈다귀해장국에 들어가는 뼈다귀보다는 훨씬 적고 인색한 양의 살점이 붙은 뼈다귀 모둠이었다. 우거지나 국물은 없이 덕지덕지 붙은 고춧가루만 눈에 띌 뿐이었지만 살점을 발라먹는 재미는 나름 괜찮았다.


나무 본디의 무늬가 모두 드러나고 대패질이 꼼꼼하게 되지 않은 양편에 놓인 2~3인용 기다란 의자와 가운데 차지한 식탁에 자리했다.쭈그러지고 상처 많은 노란색 양은 양재기에 담긴 이 모둠을 나는 아버지로부터 건네받아 쩝쩝거리며 먹는 재미를 붙였다.

아버지는 하루에 한 곳 이상을 들러 지금의 2, 3차를 이어가고 막걸리, 소주, 빼갈(고량주) 등 주류 불문 두주불사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라 아마추어 씨름선수를 능가했다. 기술이 좋다는 아무개와 씨름을 한판 벌였는데 기술은 무슨 기술이야, 압도적인 힘으로 단번에 메다꽂았다. 또한 내기 장기에선 몇 수만에 상대를 외통수로 몰자, 완패한 친구가 장기판을 내던지며 분풀이를 하였다는 무용담을 우리 식구 모두에게 여러 번 들려주었다.


가끔 마지막 행선지가 되는 양조장이란 곳은 다른 곳과 달리 정식 주점은 아니었다. 품질 좋은 '모리미'가 방금 나왔다며 양조장 관계자가 아버지를 모셔갔다.


기다란 나무 손잡이가 달린 약 1리터들이 네모난 됫박에 퍼 올려 '사발복' 글자가 새겨진 사기잔에 모리미를 한가득 따랐다. 본디 모리미란 물을 덜 섞은 원액에 가까운 상태의 주정을 이르는데 기다란 철제 손잡이를 위와 아래로 눌러 올렸다 내려 지하수를 길어 올리는 '펌프' 물을 대충 들이부으면 시판 버전 막걸리가 되었다.

이는 '대동강 물을 팔아먹는 봉이 김선달'과 같았다. 물론 일정한 기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나게 펌프질을 하여 엿장수 마음대로 섞는 물의 양을 조절하면 막걸리의 알코올 농도는 달라지겠지만 생산되는 막걸리의 양은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식 주점은 아니라서 열무김치 등으로 이름 있는 안주를 대신하였다.


취기가 기분 좋은 수준이 된 아버지는 우리 형제가 그렇게 고대하던 순간을 만들어 주었다. 천신만고 끝에 길고 길었던 술자리를 드디어 파하고 일어났다. 아버지는 면적이 넉넉하고 투박하며 손가락 마디가 유난스럽게 두꺼운 손을 자랑했다. 양손을 한쪽씩 각각 우리 형제에게 편히 맡긴 채 드디어 귀갓길에 올랐다. 1차 술자리를 워낙 이른 시간에 시작한 덕분에 아직 본격적인 어둠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2명 정도 자녀를 둔 가정이 대부분인 지금과 달리 당시는 네댓 명 이상이 되어 면내 중심거리를 오가는 초등생들이 자주 눈에 들어왔다. 1,000명 건아를 자랑하는 모교의 규모만 보아도 이는 충분히 입증되었다. 어느 집 자녀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장 지근거리를 지나는 어린이를 불러 세우곤 인근 가게에 진열된 공책이나 연필을 즉석에서 구입하여 건넸다. 너 혹시 아버님 함자가 어떻게 되는가를 묻고 그래, 부디 공부 열심히 하라며 머리까지 쓰다듬었다. 순간 갑작스러운 돌발사태에 어린이들은 많이 당황하기도 했다.


정규 과정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아버지의 공부에 대한 뿌리 깊은 한(恨)의 발로였다.

“영옥아! 나 어제 너희 아버지께 공책(연필) 받았다.”

친구들의 말에 누나들은 많이 부끄러워했지만 지금도 그렇지는 않을 거로 나는 굳게 믿는다.

초등시절에 1년에 한 번 정도 가정환경조사를 하는데 라디오, TV, 냉장고, 보유 여부는 물론이지만 부모의 학력을 반드시 물었다. 한때 가짜 학력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적이 있지만, 당시 초등 저학년생 어린 나이인 나는 좀 생소하고 어려운 낱말인 '국해”라고 조사 용지에 적거나 대답하는데 하나도 거리낌이나 주저함 없이 당당했다. 우리 부모님 두 분 모두는 비록 정규 교육 과정의 제일 아래인 초등학교 졸업은 물론 입학도 한 적이 없었지만 한글을 충분히 읽고 쓸 수 있다는 의미의 '국해'에 해당했다.


왜 우리 아버지는 거의 매일 이렇게 약주를 많이 드시고 늦게 귀가하여 우리 형제가 당신을 모시러 면내 중심거리 주점을 전전하고 길고 지루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가를 수없이 되뇌며 많은 원망을 했다.


아버지의 양손을 각각 한쪽씩 책임진 채 면내 중심거리를 지나 제법 널찍한 신작로의 끄트머리 부분에서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삼부자 일행이 이곳을 지날 즈음, 고색창연한 천주교 공회 맞은편 세 마지기 정도 되고, 한 뼘 정도 높이 물이 찰랑거리는 문전옥답에선 맹꽁이들이 목을 다투어 울어댔다. 저들 맹꽁이는 지금의 이와 같은 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나게 자신들의 소리를 자랑했다. 이제 저들 맹꽁이마저 원망스러웠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야단법석인 맹꽁이 울음소리는 아직도 나의 귓전을 때린다.


어느 정도 장성한 나의 독백을 한번 들어보자. 당시 8인 대가족을 책임진 가장의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였고, 사업에 실패를 거듭하는 상황에선 더욱 그랬을 거라고. 지금 나는 아버지의 당시 고뇌와 삶에 대한 절박함을 충분히 헤아리고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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