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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May 14. 2023

부드러운 카리스마 국어 선생님(1편)

                 

여기서 책장을 덮고 더 읽지 않는 놈은 수컷이 아니다.”

알퐁스도데 이라는 작품이 고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올라 있던 시절이었다. 목동과 주인집 따님 사이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였다. 기승전결 스토리 전개상 바야흐로 클라이맥스를 바로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때 수업시간 종료벨이 울렸다. 국어 현대문 담당 백 선생님은 여기서 오늘 진도를 마무리하고 다음으로 넘기기로 했다. 우리는 솟아나는 몸속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던 나이였으니 선생님이 이런 농담을 건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찬호야, 나는 이번에 3학년 1반이 될 것 같고 아마 담임은 백 선생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

2학년 2학기말 학사 일정이 모두 마무리되고 봄방학이 시작되기 이전 나는 친구 하숙집을 찾았다. 찬호가 하숙하고 있는 곳으로 옮겨볼 생각으로 찬호를 만난 자리에서 내 작은 소망을 입밖에 냈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선생님, 저 준성이하고 같은 반을 하고 싶은데 반을 좀 바꾸어주실 수 있는지요?”

네가 아주 좋아하고 친한 친구하고 헤어지지 싫은 마음은 이해가 되는데, 하지만 친구도 넓게 두루두루 사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나는 1, 준성이는 2반으로 반편성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우연히 교무실을 찾은 나와 준성이는 마주쳤다. 이래서 나는 준성이의 덕을 톡톡히 볼 수 있었다. 이번 3학년 1반 담임을 맡기로 한 선생님은 나와 어쩐지 코드가 잘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준성이와 내가 서로 맞트레이드를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듯했다. 같은 시각에 교무실 안에서 준성이와 내가 만난 것은 내겐 대단한 행운이었다. 결국 우리 뜻대로 반을 맞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여기서 너무 큰 아쉬움이 있었다. 내가 이제 고3에 진급하여 우리 담임선생님이 되었으면 하고 그렇게 고대했던 백 선생님은 예년과 달리 이번엔 3학년 담임을 아예 맡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결국 나는 애초 배정되었던 1반에서 2반으로 바뀌었고 백 선생님을 담임으로 만날 수없게 되었으니 1반 배정에다 백 선생님을 담임으로 만나리라는 나의 야무진 꿈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 이놈들아 너희들 주제를 알아야지...?”     

칠판 맞은편 교실 뒤쪽 게시판엔 국내 4년제 정규 대학 입시 요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담임선생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우리 친구들이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세칭 명문이라 일컫는 SKY를 비롯하여 서울 소재 주요 대학에 관한 정보가 이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너희들 지금 실력과 향후 노력 여하에 따라 어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지가 결정될 것이만 어느 곳이든지 최소한 캠퍼스에 발을 들여놓는 자체만 녹록지 않다는 현실을 우리에게 경고하는 메시지였다. 당시로선 고교 졸업생(예정자)의 10% 내외만이 대학 진학이 가능한 구조였다.   

   

지금은 어느 곳이든지 대학 진학만 하면 공부를 잘한 것으로 보는 시대가 왔어.”

세 살 터울 형이 늘 내게 이르던 말이 딱 맞았다.  

    

준수야, 그것 일어나다가 아니라 일다.”

기말과 학년말에 두 번만 치르던 문법 시험시간이었다. 시험 종료 시각 이전에 답안지를 자신 있고 당당하게 교탁 위에 올리고 교실 밖을 먼저 나서던 친구 화영이가 내게 조심스럽게 귓속말로 정답을 귀띔했다.      


밑 줄 친 말의 원형을 적으라는 문항이었다. 파도가 이는에 내가 일어나다라고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 있게 오답을 적어 넣은 것을 화영이는 놓치지 않았다. 이래서 결국 나와 화영이는 부정행위의 공동정범이 되었다. 나는 이런 화영이가 베푼 선심 덕분에 이번 국어 문법 시험에서 88점으로 반 최고 득점자의 자리에 오르는 작은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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