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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May 25. 2023

보라색 비눗갑과 상아결재인(2편 완)

 어이, 신대리! 나 좀 잠깐 보자고. 결재인 인영이 이렇게 커서야 되겠어? 아니, 지점장 것보다 훨씬 크니 당장 다른 것으로 새겨야지?”

내가 신입사원 시절 처음 배정받은 영업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방차장은 이번에 책임자로 승진 발령을 받은 초임 신대리에게 권유가 아닌 지시를 했다. 이는 어쩌면 군사문화의 잔재로 보아도 문제가 없었다. 자신의 상급자 결재인 인영보다 큰 것을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는 일종의 위계질서에서 비롯된 생각이었다. 신대리는 다음 날 새로 새긴 결재인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선 것은 물론이었다.  

   

금융기관 영업점에선 자신의 조수나 휘하 직속 후배에게 건네주는 특별한 선물이 있었다. 자신이 오랜 기간 동안 사용하던 손 때 묻은 결재인 인영 부분을 잘라내고 거기에 다시 아래 직원의 이름을 새겨 넣어 개각(改刻)한 결재인을  물려주는 아름다운 관행이 그것이었.

      

이 건 최소한 선임 부장,아니면 임원이나 쓸 수 있는 사이즈인데....?”

내 예비 배우자는 거의 임원이나 손에 쥘 수 있는 커다란 인영이 새겨진 상아결재인을 들고 약속장소로 들어섰다. 아직 겨우 초임 책임자 자리에도 오르지 못한 나로선 이 상아인장을 결국 결재인으로 실인등록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상아재질이었으니 고급제품으로 누구나 인정했고 만만치 않은 가격대를 호가하고 있었다.

 

재원 중 그 길이나 아랫부분을 차지하는 인영의 둘레가 압권이었다. 나중에 우리 2세에게 가보로 물려주어도 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하루 날을 잡아 내 거래 통장 모든 사용인감을 이것으로 바꾸어버렸다. 나름 대견했고 흐뭇했다. 내가 초등시절 흔하던 목도장은 회양목이 그 재료였다. 이런 목도장이나 뚜껑이 장착된 뿔도장은 그 길이와 부피가 작았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었다. 하지만 이 상아결재인은 달랐다. 그 길이만도 15센티미터에 육박하여 바지 주머니에 꽂히더라도 자신의 존재를 늘 쉽게 알릴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어라, 내가 농협에서 볼일을 모두 마치고 365일 자동화코너에 들렀는데 아마 ATM기 위에 두었을 가능성이 제일 높은데... 이 것 큰일 났네. 이 상아결재인은 꼭 찾아야 하는데...”


나는 대학시절 늘 내 곁을 지키던 보라색 비눗갑에 이어 이 상아결재인을 나의 제2 분신의 반열에 올렸다. 그런데 이번에 이 상아결재인도 비눗갑과 같은 길을 떠났음이 최종적으로 밝혀졌다. 나는 이제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오늘은 내가 결혼 전 비눗갑을 잃어버렸을 때와 똑같은 심정이었다. 이제 실제 두 아들을 두고 보니 비눗갑 시대보다 아들 잃은 것 같다는 기분의 실체를 더 확실하게 알 것만 같았다.   

   

회계학에서 이르는 공정가치나 교환가치로만 따질 일이 아니었다. 지금 내 분신처럼 여기던 물품 2개를 멀리 떠나보냈다. 지금이라도 이 두 녀석이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교환가치 몇 배를 치르더라도 다시 내 곁에 꼭 붙들어 매고 싶다. 똑같이 오랜 세월 내 손 때가 묻은 품목이었지만 양자 간 조금의 온도차는 있었다. 보라색 비눗갑은 새로 마련하여 새것으로 오리지널을 갈음할 수 있을듯했다. 하지만 상아결재인은 새로 새긴 것으로 오리지널 품목이 차지하던 그 빈자리는 온전히 메꾸어지기는 어려울 듯했다. 

   

상아결재인이 지금이라도 어느 날 불현듯 내 앞에 나타난다면 이는 내게 작은 경사가 될 것이 틀림없다. 다른 곳으로 보금자리를 옮기는 이삿짐을 꾸리거나 풀 때 상아결재인이 갑자기 내 앞에 제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오늘도 그간 사용하던 통장과 결코 짧지 않은 금융기관 재직시절 동안 연이어 내 부름을 받들던 역대 결재인이 함께 담긴 플라스틱 바구니를 다시 한번 뒤적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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