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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Jun 21. 2023

전염병과 반타작(1편)

                               

준수야, 금호약방에 좀 다녀오렴. 아스피린, 에이피시, 쌍화탕을 네 것은 빼고 식구수만큼 지어와야겠구나.”     


계절은 늦가을을 넘어 초겨울 문턱을 들어서고 있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독감이란 녀석이 내 본적지인 300번지를 거르지 않고 찾아왔다. 8인 대가족 중 나를 제외한 부모님, 형제자매 일곱 이서 이 독감을 비켜가지 못했다. 조개탄 난로처럼 뜨끈해진 이마의 발열에다 기침, 가래에 근육통이 동반됐. 일곱 식구 두는 일상생활은 언감생심이었다. 누런색 니스칠이 선명한 장판 위에 드러누웠다.


 6.25 한국전쟁 때 위생병으로 참전한 경력을 자랑하는 아버지는 독감 치료에 필요한 처방전을 구체적으로 콕 찍어 내게 일러주었다. 8인 가족 중 나만 멀쩡했다.     

 

우리 준수만 걸리지 않았네, 그래 그렇게 건강해야 되는 거야.”

젖먹이시절부터 유독 잔병치레가 심했던 나였지만 이번에 찾아온 독감과 나는 거리가 멀리 있었으니 보기 드문 풍경이 벌어진 것이었다. 유사시 아버지는 가족들을 위해 스트렙토 마이신 근육용 주사기를 직접 집어 들기도 했다. 게다가 어머니는 잔병치레에 하루에도 3번이나 경기(警氣)를 이어가던 차남 덕분에 이미 무면허 침술가 반열에  올랐다.      


준수야, 큰 집에 다녀와야겠다. 큰 어머니를 모시고 오려무나.”

어머니를 비롯하여 두 누나와 여동생 모두 누런색 니스칠이 된 장판을 등에 짊어진 형편이니 당장 끼니가 걱정이 되었다.

“머슴아들이 부엌에 들어오면 @@ 떨어진다.”말이 먹히던 시절이었다.      


부엌에 들어 가족을 위해 삼시 세끼 밥상을 대령할 인력이 이미 바닥난 것이었다. 금호약방을 다녀오자마자 나는 야트막한 고갯길을 넘어야 바라다 보이는 큰집으로 허겁지겁 내달렸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전해 들은 큰 어머니는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우리 집 임시 주방장을 책임지는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큰 어머니는 대리권 범위가 정해지지않은 임의 대리인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이른바 보존, 이용, 개량 행위에 그쳤고 처분, 변경 행위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새로이 밥을 짓거나 반찬을 마련하지는 않았다. 남아 있는 식은 밥을 무쇠솥에 들어붓고 팔팔 끓여 김장 김치와 함께 두레 밥상에 올렸다.  

           

동문회나 각종 친목 식사 모임자리에서 메인 절차를 끝내고 후식으로 무엇을 택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 어느덧 대세가 되었다. 이에는 김치찌개, 된장찌개, 맛보기 냉면에 이어 누룽지밥도 그 목록에 나중에야 올랐다. 하지만 이 누룽지밥은 어느새 가장 많이 찾은 아이템으로 자리를 잡았다. 나아가 이른바 웰빙음식이란 이름을 달고 일부러 누룽지를 만들어 이것만 따로 온라인 상품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당시엔 이 누룽지 메뉴나 삶은 밥은 그리 큰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구원 투수로 나선 큰 어머니가 밥상에 올린 이 푹 삶아낸 밥을 나는 아예 외면했다. ‘저런 무색, 무취, 무미한 것을 무슨 맛으로 먹을까도무지 이해가 지 않았다.


 나는 아직 독감을 영접하지 않은 좀 나은 형편이었으니 이것저것을 가릴 수 있는 형편이었다. 한두 끼 정도 걸러도 크게 문제가 될 일이 없었다. 나와 달리 독감 환자인 일곱 식구는 살아남기 위해 삶은 밥에 수저를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큰 어머니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내가 금호약방을 몇 번 더 오간 끝에 일곱 식구 모두는 독감에서 빠르게 회복되었다. 곧 일상생활에 복귀를 했다. 어쩌면 지금 웰빙음식 반열에 오른 누룽지 밥의 원조가 무쇠솥에 담긴 식은 밥을 바닥까지 알뜰하게 긁어내고 넉넉하게 우물물을 들이붓고 푹 삶아낸 밥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그렇지, 너라고 별 수 있어...?’ 이에 꼭 들어맞는 일이 벌어졌다. 금호약방을 부지런히 오가며 아스피린 등 독감약 배달서비스를 거뜬히 해냈던 나였다. 그런데 이번 일곱 식구 일상복귀 시점에 맞추어 나도 누런 니스칠 장판에 드러눕는 신세가 되었다. 며칠 전 나를 건강하다고 치켜세운 아버지의 칭찬 유효기간은 결코 오래가지 않았다. 나도 아스피린 등 아버지가 내린 처방전 신세를 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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