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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Nov 18. 2023

반갑고 경사스러운 일이란 무엇인가(2편 완)

                        

예 암입니다. 암으로 판정이 났어요. 수술을 받으셔야 합니다.”

나는 외래 진료실을 들어서면서 교수 입에서 이런 말이 떨어질 확률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 전직 대통령 DJ 선생이 대법원 최종선고일에 재판장의 입모양이 가로로 벌어지면 사형이고 그렇지 않으면 일단 사형은 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회고가 떠올랐다. 입 모양이 동그랗게 벌어지며 최종적인 암진단이 떨어질 것이 뻔했다.      


특이하게 디자인한 환자 전용 의자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걸친 내게 교수는 ‘최준수 씨’라고 불렀으나 나는 잠시 대답조차 얼버무렸다. 마치 재판장이 피고에게 인정신문에 나서듯 했다. 교수는 이번에도 뜸을 들였다. 나는 참았던 마른침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었다. 교수는 책상 위에 놓인 PC에 저장된 영상과 기록을 미리 디스플레이해 놓지 않고 있었다. 늦게서야 화면을 불러내는 모습이 내 눈에 잡혔다.  

   

교수의 선고가 떨어지면 곧장 그에 대한 응답을 나는 이미 준비해 놓고 있었다.

저는 개인 사정상 수술은 2개월 후에나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능한지요?”  

성악가가 발성 연습을 하듯 머릿속으로 이미 여러 번 리허설을 충분히 마쳤다. 교수의 호명에 나는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킨 후 마지못해 대답을 마쳤다. 하지만 내가 준비한 치밀한 계획과 멘트는 일순간 무용지물이 되었다.     


조직검사 결과 일단 암은 아니고 염증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번엔 정말 많이 걱정했습니다. 2년 만에 살피는 데다 모양이 좋지 않다고 하는 바람에, 단단히 각오를 했어요.”

어르신 정말 다행입니다.”

그럼 이제 얼마마다 진료를 받아야 하나요?”

6개월 후에 초음파로 보겠습니다.”     

모양이 좋지 않으니 조직검사를 해보자고 하던 처음 진료일과 달리 교수는 나에 대한 호칭을 어르신으로 고쳐 부르며 몇 번이나 반복을 했다. 처음에 엉거주춤한 반토막말을 이어갔으나 무슨 영문인지 이번엔 확 달라진 것이었다.    

 

내가 현역 시절 수도권의 모 점포에서 근무 중 일이었다. 내점한 내 고객 부부와 상담을 이어가던 중 남편을 어르신이라 호칭한 것에 관해 나는 부인으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받은 적이 떠올랐다. 나는 즉석에서 사과를 하고 교수님이라 고쳐 불렀다. 그런데 이번엔 입장이 정확히 뒤바뀌었다. 교수는 나를 어르신이라 부르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이에 관해 내가 항의할 권한은 그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나는 이제 바야흐로 어르신의 대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모름지기 사람의 건강과 귀중한 생명을 다루는 의사란 일거수일투족에 많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였다. 첫 진료일에 모양이 좋지 않아서~~ ’란 부분은 생략해도 좋을 것 같았다. 최종결과가 확인되기 전엔 이른바 포커페이스 유지는 기본이고 환자에게 혹시라도 오해를 살만한 빌미를 주지 않도록 단어 선택에 더욱더 신중해야 했다.   

  

이렇게 좋은 일이 있네. 참 감사한 일이야.”

이번 사태를 전해 들은 여동생의 반응이었다. 현역 시절과 지금은 좋은 일에 관한 기준은 확연히 달라진 것이었다. 사업에 크게 성공을 했거나 아니면 조직에서 승진을 한 일,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일이 현역 시절의 그것이었다면 이젠 개인은 물론 집안에 우환이나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이 되었다. 이번 경우처럼 병원을 찾아 악성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은 것이 이른바 소극적인 의미의 경사가 되었다. 연식이 쌓이면서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대치를 늘 낮추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저 이렇게 살다 문제가 닥치면 그때 가서 대처하고 아니면 말고..., 이런 것이지 뭐.”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을 주위에선 찾기 어렵지 않다.      

나는 무서워서 이제 건강 검진을 할 수 없고 하기 싫어졌어.”

라고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 입장이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 말에 나는 기꺼이 한 표를 던진다.   

   

건강을 지키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과 비결이 있다고들 한다. 균형 잡힌 섭생과 규칙적인 생활, 적절한 운동, 긍정적인 생각 유지하기 등을 든다. 하지만 이에 더하여 연식이 더해 감에 따라 정기 검진은 물론 필요시 추적관리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 된 것을 인정해야 했다.      


주식시장의 파생상품인 옵션과 선물이 만기 도래시마다 지속적으로 만기연장(롤오버)하듯이 문제 되는 부위는 지속적인 추적 관찰이 필요해 보인다. 이에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지만 이는 기꺼이 감수할 일이다.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는 동안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상대적으로 건강한 삶을 이어가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이번 달 말 췌장부위 진료가 예정되어 있다는 톡이 방금 전 도착했다.

이렇게 매번 가슴 조이며 살아야 하나요?”

아니지요 아버님, 100세 시대인데.”

이번엔 아주 각오를 하고 나섰는데, 별일이 없다니...”
 축하드리고요 오늘 복권 사시는 것은 어때요?”


다음 진료 일정을 배정하고 안내하는 병원 측 여직원과 내가 방금 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세포 채취했고요. 그저 잘 있습니다. 혹시 가족 중에 갑상선암 진단을 받은 분이 계시나요?”

누나가 약 7년 전에 수술을 받았어요.”

미국에 연수 중인 지난번 내 담당교수와 주고받은 대화가 떠올랐다.

미주알고주알 수준은 아니라도 일반 보통의 환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설명을 해주는 배려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래 나도 처음엔 교수가 그런 식으로 말했는데 결국 수술을 하게 되었지.”

누나의 이 말에 두려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내년 1월에 예정된 고향 동기들 35일간의 해외여행 동참은 이제 날아가버렸다. 악성으로 결론이 나면 보험 회사로부터 챙길 수 있는 약 1,400만 원의 보험금 수령이 무산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아직 여러 번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번엔 6개월분 쿠폰을 새로이 손에 쥐어들었다. 어차피 시한부 인생이고 단기로 만기를 연장해갈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앞으로 얼마나 크고 작은 깔따구 고개나 허들을 더 넘어야 할지 계속해서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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