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수 씨 오늘은 토요일인데 쫌매고 어디 좋은 데 가나요?” 내가 신입사원 시절 수도권의 한 점포에 근무 중이었다.당시는 토요일도 오전 근무를 해야 하는 6일 근무시스템이었다. 지점 구내식당 아주머니는 토요일마다 내가 식당문을 들어서면 이렇게 농담을 거는 것이 이제 일상이 되었다. 당시 나는 결혼하지 않은 솔로였다.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게기다 늦게서야 밥벌이에 나서다 보니 이제 만 30세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식당 아주머니에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지점의 여직원은 물론 책임자들은 내게 국수를 언제 줄 것이냐고 물으며 추임새를 넣는라고 정신이 없었다.
“준수야 너 아직 장가가지 않았지? 이번 토요일 넥타이 멋지게 쫌매고 나와라. 내가 좋은 여자 소개해줄게.”
신입인 나는 당시 출납업무을 거친 후 신규창구의 낮은 카운터에 앉아 주로 신규고객 상담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 지난주엔 고향 2년 선배가 반갑게도 이곳에 나타났다. 우리는 한 번에 서로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중학교까지 고향에서 마친 나였지만 이 선배와는 그리 자주 접촉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 동기의 사촌 형이다 보니 고향 선배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선배는 다음 달로 결혼식 날짜를 잡아 놓고 있었다. 주택마련 등 결혼식 준비에 목돈이 필요했다. 매달 여유자금을 아껴 우리 회사의 ‘적립형 주식형 수익증권’에 불입하고 있었다. 아직 만기까진 2년 아상이 남아있었지만 이를 중도해지 하러 우리 지점을 찾은 것이었다. 고향을 떠난 이 먼 객지에서 직접 선배를 만나니 무척이나 반가웠다.
내가 고향을 떠난 지 벌써 15년이 지나고 있었다. 오늘 만난 선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게 이렇게 ‘훅’하고 들어온 것이었다. 자신이 결혼을 코앞에 두다 보니 2년 후배인 나도 이미 결혼적령기에 들어선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였다.
우리 고향은 충북, 충남, 전북의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다. 흔히 말하는 버선발모양의 충북의 맨 아래인 버선발 뒤꿈치를 차지하고 있는 형상에 딱 맞았다. 이러다 보니 우리는 충청도 사투리를 쓴다고 생각했지만 전라도 사투리가 많이 섞여 있었다. 우리를 만난 많은 이들은 우리를 전라도 출신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넥타이를 매다 또는 끈을 묶어내다란 말을 표준말이 아닌 '쫌매다'라는사투리로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있었다. 우리 고향 사람들 사이엔 정겨운 말이었다.
이런 낯선 사투리를 알아들을 리가 없는 우리 지점직원들은 재미 삼아 우리 선배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나를 약간 놀리는듯한 재미를 이어갔다. 최준수가 오늘은 넥타이를 쫌매고 어디 나갈 것인가가 지점 내 하나의 작은 관심사로 떠올랐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였다. 나보다 한 해 먼저 고등학교 문을 나선 고종사촌과 사촌이 얹혀살고 있는 고종사촌 누님댁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우리는 토요일 오후에 만나 일요일 아침 식사를 마쳤다. 우리는 이제 바야흐로 20년대 건장한 청년대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최근엔 우리 둘은 우리 고향집 건넌방에서 며칠을 같이 보낸 적도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두운 겨울밤을 보내며 우리는 야생동물 출현이나 외부 침입세력을 짐짓 염려해 보기도 했다.
"아니, 무서울 것이 뭐가 있어, 20대의 건장한 청년이 둘이나 버티고 있는데. "
순간 나는 ‘철관풍채가 심산맹호 같은지라’라는 춘향전에 등장하는 문구까지 들먹였다.
사촌 누님댁에서 오늘 아침 밥상을 물린 후 우리는 갑자기 옷걸이에 걸려 있는 넥타이에 눈길이 갔다. 이제 막 20대에 들어설 것이니 이에 걸맞게 넥타이 매는 법을 배우자는데 뜻을 같이 했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우리는 넥타이를 번갈아 손에 쥐고 목에 묶어 그럴듯한 매듭을 만들어보려 무던 노력을 했으나 제대로 된 모양을 구현하는데 매번 실패를 거듭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다 보니 이 쫌매는 방법을 익히는데 한나절이란 시간도 모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