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점장님, 저를 무시하면 나중에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7월 초에 정기인사발령이 있었다. 수도권 @@지점엔 새로 점포장으로 부임한 백점장은 그간 주로 본부 근무이력을 자랑했다. 이른바 자신의 주특기는 조사 분석 업무였다. 게다가 펀드매니저 이력도 있었으니 애널리스트와 메니져 경력을 두루 갖춘 화려한 스펙을 어디서나 충분히 내세울 수 있었다.
점포장으로서 영업점 근무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백점장은 출근 다음날부터 매우 분주했다. 전문 도배사에 필적했다. 점장실 내부 4면 벽은 물론 외부 여유 공간마다 고객 상담에 도움이 될만한 자료로 빽빽하게 장식을 마쳤다. 미국의 최근 20년간 다우지수차트,코스피지수 등락현황 등 아주 유용한 툴로 고객 상담에 활용하고자 했다. 자신의 화려한 스펙을 내세워 고객과 상담 후 설득하여 자산을 늘리고자 했다.
백점장은 부임 첫날 오전 책임자 미팅에 이어 일과를 마친 저녁엔 책임자 회식을 마련하는 등 강행군을 이어갔다.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 경험 지식을 살려 VVIP고객들을 추가로 유치하고 지점 고객규모를 큰 폭으로 늘리겠다는 야심 찬 의욕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우리 회사 인사발령은 상위직급부터 아래로 직급별로 3번으로 나누어 순차로 진행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를테면 부서장급, 기타 책임자, 하위 직원 등의 순이 그것이었다. 아직 책임자 인사발령은 그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백점장은 오전 책임자미팅에 이어 저녁 회식 자리를 빌려 향후 자신의 점포 운영계획의 큰 그림을 직원들에게 내비쳤다. 자신이 본부 조사 분석 운용파트에서 근무한 스펙을 활용해서 중점적으로 추진할 사항과 포부를 드러냈다. 주식 채권시장의 전망을 활용하여 자신의 주특기를 발휘하면 금세 지점 자산과 수익이 큰 폭으로 늘 것이란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종래와 달리 책임자 발령 등 후속 인사가 뒤로 많이 미루어지고 있었다. 전 직원을 통틀어 가장 오래 근무한 직원은 심 부장이었다.심 부장은 이곳에서 이제 만 6년이란 긴 세월을 충분히 채우고 7년 차에 들어서고 있었다. 새로이 부임한 백점장은 자산이 점포장 부임결정을 통보받은 때부터 평소같이 근무하고 싶은 책임자풀을 머릿속 한 곳에 빼곡히 쌓아놓고 있었다. 그래서 현점포에서 오랜 동한 근무한 순으로 두세 명을 교체하고자 했다. 이는 책임자 미팅 등 여러 기회가 있을 때마다 노골적으로 공언하기까지 했다.
회사의 인사발령이란 것이 반드시 ‘선입선출법’이란 준칙을 기계처럼 작동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번 기회에 만약 책임자를 교체한다면 근속기간이 압도적으로 긴 심 부장이 영순위로 꼽혔다. 백점장도 이에 동의를 하는 것으로 보였고 인사부에 심 부장을 다른 곳으로 전보시켜 달라고 요청한 듯한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6년 이상 오랜 기간 이곳에 근무한 심 부장은 그간 혼신의 힘을 다해 기존고객의 관리는 물론 신규고객 개척에 대단한 실적을 거양했다. 그래서 심 부장이 이 점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어쩌면 최대지분 보유자로 보아도 무방했다. 점포 내 VVIP 고객을 다수 밀착관리하고 있었다. 자신이 관리 중인 모든 고객의 자금규모, 성향, 선호하는 포트폴리오 등을 세세하게 꿰고 있었다.
심 부장은 탄탄한 영업기반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번 인사발령에선 자신이 다른 곳으로 전보될 수 있다는 낌새를 알아챈 심 부장은 최근 백점장의 처신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에 혹시 자신이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점포로 튕겨나간다면 영업기반이 통째로 날아갈 위기에 닥치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 일과 후 책임자 회식시간을 빌어 백점장에게 은근한 견제구를 날린 것이었다. 백점장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신이 자랑하는 이력과 그 스펙에다 평소 머릿속에 점지해 둔 본부에서 같이 근무한 적이 있는 두세 명의 책임자를 데려오는 큰 그림자를 그리고 있었다. 만약에 이게 성사된다면 대단한 시너지로 탁월한 영업실적 달성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늘 장담을 했다.
드디어 책임자 인사발령의 뚜껑이 열렸다. 백점장이 구상한 대로 심 부장을 비롯한 총 3명의 책임자는 다른 곳으로 전출되었고 이 빈자리는 본부 출신 책임자로 채워졌다. 심 부장은 이번 천출자 명단에 오른 다른 책임자 2명과는 달리 다행히도 원거리가 아닌 같은 영업권 내의 다른 점포로 전보되었다.
책임자 인사발령이 대략 자신의 뜻대로 이루진 것을 지켜본 백점장은 짐짓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백점장의 예상과 달리 심 부장도 표정관리 모드에 진입한 것은 같았다. 같은 모드에 진입한 두 사람이었지만 이 두 사람은 서로 ‘동상이몽’이었다.
평소 조사 분석 운용 업무의 이력을 내세워 점포운영이 돛을 단 배처럼 순항할 것으로 예상한 백점장의 앞길은 심 부장이 보기엔 그리 순탄치 않을 것으로 확신을 했다. 불행히도 이 심 부장의 예상은 적중했다.
백점장에게 위기가 닥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자료 데이터 분석 등에 의존한 주식시장 등의 전망을 내세우며 많은 시간을 점장실에 머문 영업은 그리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게다가 발로 뛰는 영업을 등한시한 백점장의 영업활동은 금세 추락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전보발령에 따른 책임자의 이동이 마무리된 지 겨우 2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심 부장이 오랜 기간 발로 뛰어 새로이 개척했던 법인고객은 물론 굵직굵직한 개인 VVIP고객의 60 내지70%에 달하는 고객은 백점장의 만류를 뒤로 하고 심 부장을 찾아 @@점포를 떠나버리는 경천동지 할 일이 벌어졌다. 초우량 고객의 거의 대부분은 점포 간의 합법적인 고객(계좌) 이관 제도를 활용하여 심 부장이 새로이 부임한 점포로 떠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심 부장이 먼 거리로 전보발령을 받았다면 이런 비극적이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간 자신의 자산을 열성적이고 정치하게 잘 관리를 해주었으니 익숙하고 편리한 관리자인 심 부장을 고객들이 따라 떠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했다.
백점장은 점장 부임 첫날부터 점장실 내외에 각종 홍보자료로 도배질하기 전 먼저 했어야 할 더욱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었다. 현 점포에서 최대지분을 가진 심 부장의 협조를 무엇보다 먼저 구했어야 했다.
이번에 자신이 픽업해 온 본부부서 책임자들은 새로이 이곳으로 모셔올 고객은 전무했다. 이제껏 영업점 근무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부임 후 자신의 연고고객을 모아 보았자 이는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심 부장의 고객이 빠져나간 이 엄청나게 치명적인 공백을 메꾼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백점장과 새로이 부임한 책임자의 신규개척 고객과연고고객으로 메꾸는 것은 불가능했다. 길고 긴 세월이 필요했다.
영업기반이 없는 조사 분석 전망 등 상담 홍보자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나는 1년 후 놀랄만한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백점장은 실적부진을 이유로 점포장에 처음 부임한 지 겨우 만 1년 만에 좌찬성 전보발령장을 받아 들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심 부장은 무려 6년 이상이나VVIP고객과 지지고 볶았으니 심 부장과 고객들은 서로 눈빛만 보아도 척 알아차리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