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입문에도 리허설이 필요한가?

by 그루터기

30여 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직장생활을 최근 정년으로 마감한 나는 거주지에서 가까운 거리에 자그마한 개인 사무실을 마련했다. 나는 오랜 기간 직장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매일 출퇴근하는 패턴을 유지하여야 그나마 바이오 리듬이 깨지지 않을 것 같다. 은퇴 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아침형을 넘어 새벽형 인간에 가깝다. 이제 일선에서 은퇴한 지 겨우 보름도 지나지 않았는데 여러 가지 뜻 하지 않은 변화나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때론 긴장과 불안, 초조함이 뒤섞인 일상이 이어진다.


오늘은 두메산골에 사는 사람이 여러 가지 볼 일을 한꺼번에 읍내에 가서 해결하러 나들이하는 셈이 되었다. 평소보다 서너 시간 늦게 서야 집을 나섰다. 집사람의 개인연금 수령 개시 신청, 정년퇴직을 한 나의 국민연금 조기수령 신청, 실업급여 신청, 병원 볼일 등을 한꺼번에 오늘로 한데 모았다.


오늘의 본격적인 첫 행선지는 내가 근무하던 영업점이 자리한 14층의 병원 건물 지하 주차장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평소 출근하듯이 도착 한 곳은 지점에서 지정한 별도 건물 지하 주차장이었다. 이런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최근에 서너 번은 족히 되었다. 이거 벌써 치매 전조 증상이 온 것은 아닌가, 염려가 되었다.


다음 행선지인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국민 연금공단 사무실로 들어섰다. 대기번호표를 구분하여 운용하는 시스템이었다. 안내 직원에게 용무를 일렀더니 “노령연금” 파트 번호표를 뽑아주었다. 아, 나는 이제 정말로 뒷방 노인네가 된 것이란 말인가. 나는 다시 일자리를 찾고 생업에 복귀하는 게 좀처럼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연금을 예정보다 조기 수령하지 않고 내년 10월로 예정된 정상적인 스케줄에 따라 노령연금을 받으면 혹시 노인 대접을 20개월 정도 뒤로 미루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떠올랐다.


다음 코스는 실업급여 신청을 알아보고자 고용노동부 고용안정 센터였다. 노령연금 신청자에게 모두 작은 선물로 나누어 주는 기념 타월 한 장을 고맙게 받아 든 나는 해당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지하 2층 -> 지하 1층-> 지하 3층까지 모든 층의 주차장을 수소문해도 나는 애마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잠시 후 정신을 차렸다. 이 건물의 지하주차장의 공간에 여유가 많지 않고 주행 코스가 수월하지 않아 해당 건물 밖의 맞은편 도로변에 애마를 세워 둔 사실이 이제야 떠 올랐다.


이 또한 치매 경로로 들어서는 리허설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서류와 책자를 한데 모아서 다니고자 방금 전에 나는 쇼핑백을 준비했다. 잠시 후 고용안정센터 전용 주차장으로 이동을 하였다. 두 곳에서 상담을 마쳤다. 이럴 즈음 갑자기 또 한 번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일이 생겼다. 내가 조금 전까지 잘 들고 다니던 쇼핑백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주차장에 세워 둔 차량 안에 있을 거라고 거의 확신했다. 다시 주차장으로 발길을 돌려 트렁크를 비롯하여 차량 내부를 샅샅이 뒤졌으나 놀랍게도 쇼핑백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이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쇼핑백 안에 담긴 나의 신상에 관한 예민한 자료와 기타 가볍지 않은 서류 뭉치와 책자를 잃어버리면 그 대가가 너무 클 것 같았다. 다시 사무실로 되돌아와 입구에 선 직원에게 물어도 쇼핑백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두 번이나 얼굴을 마주했던 상담 직원의 자리로 종종걸음을 했다. 천만 다행히도 창구 카운터의 한편에서 문제의 쇼핑백은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하루 동안 치매의 리허설을 도대체 몇 번이나 한단 말인가 하고 내심 혀를 끌끌 찼다. 씁쓸함을 넘어 자괴감까지 들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 정도에서 다른 추가 일정을 접고 사무실이나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게 나을 듯하였다.


하루라는 짧은 사간 동안 치매 입문 리허설을 너무나 여러 번이나 그것도 다양하게 하다 보니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모든 일정을 접기는 하루라는 세월이 너무나 아까웠다.


현역 시절 장거리 외부 출장 영업을 마다하지 않다

보니 나의 애마는 영업용 택시 이상의 주행거리

를 자랑한다. 오늘도 손에 익은 이 애마의 힘을 빌어 사무실로 복귀를 했다. 잠시 후 나는 평정을 찾았다. 올해 중으로 최종 합격을 하고자 하는 자격시험 준비를 위해 수강 중인 인터넷 동영상을 무려 세 강좌나 심혈을 기울여 들었다. 그런 후 늦은 시각에 귀가를 했다. 이러니 오늘도 최소한

의 밥값을 한 셈이었다.


치매 입문에 리허설이 반드시 필요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필수 과정이라면 이 리허설을 거치는 것과 그저 건너뛰는 유형의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나을지도 아무도 모른다. 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치매를 맞이하는 않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인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려면 여러 분야에서 피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인 건강을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 필요하다. 생업 종사, 휴식, 운동, 왕성한 사회활동 등 이 중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고 이들 간의 균형도 무시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나는 현역 시절과 마찬가지로 새벽형 인간의 패턴을 이어갈 것이다. 최근 마감한 인생 1막에 못 지 않게 새로운 생업을 구하여 활기차고 균형 있는 생활을 이어 갈 것이다. 그리하여 현역에 머무르는 세월을 최대한 늘릴 것이다.


일찍이 나의 주례 선생님은 부지런히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공부의 기본 출발점이라고 늘 강조하였다. 나는 향후로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읽고 나 자신의 글을 쓰고 생각하고 듣고 보고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치매 입문에 관한 리허설은 멀어질 것이고 더 나아가 아예 치매를 친구로 맞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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