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체 학창 시절 중 가장 재미있고 긴 세월은 단연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그 시절 구구단이나 국민교육헌장 등을 제대로 암기하지 못하거나 숙제를 하지 않은 친구들이 있었다. 이럴 경우 의무적으로 겪는 필수 코스가 ‘나머지 공부’였다.
이와 달리 구성원들이 자원하여 만든 100% 순수 자발성 ‘나머지 공부 그룹’이 우리 반에 따로 있었다. 이 나머지 공부 회원 중에 우리가 다니는 학교의 현직 교감 선생의 아들 갑도 있었다. 갑은 정말로 기세가 등등했다. 교감 선생의 아들이라 같은 학교 다른 선생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회원 중에는 당시 면내 중심가의 흥부 상회 막내아들 을도 있었다. 당시엔 보통 우리 나이로 8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을은 이보다 2살이나 어린 6살에 입학을 하였다.
당시 초등생들은 흔히 장난으로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나 잡아봐라, 잡으면 백만 원 주지"였다. 그런데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 그날도 을은 이런 말을 무심코 밖으로 냈는데 바로 곁에 있던 병이 실제로 을의 팔을 잡아채고서 외쳤다.
"야! 잡았으니 약속한 대로 이제 백만 원을 주렴"
을은 장난으로 해본 말이었는데 병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병의 진지한 표정을 본 을은 순간 당황했다.
그다음이 더 큰 문제였다. 당시 그 위세가 대단했던 교감선생의 아들인 갑에게 병이 이 채권을 무심히 넘겨버렸다.
"어이 갑, 네가 백만 원 나 대신 받아 가져라."
이러니 사태는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었다. 병은 당시 기세 등등한 갑에게 환심을 사고자 한 것이 분명했다.
갑은 초등학교를 9살에 입학하였으니 동급생이지만 을보다 무려 3살이나 많았다. 을에겐 갑이 바로 위의 형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교감선생의 아들이란 위세에다 형 뻘이고, 100만 원이나 되는 채권자가 되다 보니 갑과 을은 자연스럽게 확실한 ‘갑을 관계’가 되었다.
그 이후로 갑은 을을 물구나무도 세우는 등 육체적인 고통은 물론 막말이나 욕설 등으로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을에게 압박을 했다. 기회만 되면 100만 원 현금 대신에 을의 가게에 있는 과자나 빵 등 먹거리를 상납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하루는 수업을 마치고 청소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 담임선생은 갑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정가 25원인 ‘백조’ 담배를 사 오라며 30원을 갑에게 건넸다. 담배 가게가 학교 가까이에 있다 보니 이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갑은 담배를 담임에게 직접 전달하지 않았다. 손에 넣은 담배를 같은 친구인 정을 거쳐 전달했다. 그런데 거스름돈 5원의 행방이 묘연한 게 문제였다. 갑의 부탁을 받은 정은 담임의 책상 위에 놓았다. 거스름돈을 정은 갑에게 받은 적이 없었다.
이제 청소도 마무리되었고 드디어 우리 회원 모두가 기다리던 나머지 공부시간이 돌아왔다. 이러던 중 담임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담임은 갑을 급히 호출했다. 덩달아 나머지 공부 회원들도 자연스럽게 현장에 모였다.
“갑, 말해 보아라, 담배를 사고 남은 거스름 돈은 어디에 두었느냐?”
“예, 담배와 거스름은 친구 정에게 모두 맡겼어요. 저는 그 이후 일은 전혀 모릅니다.”
담임의 추궁에 당황한 갑은 얼굴을 붉히며 어색한 말투로 답변을 이어갔다.
“그럼 당장 정을 불러와라, 빨리 어서 어서!”
담임은 한 옥타브를 더 높여 목소리를 내었다. 친구 정은 우리와 같은 나머지 공부 회원이 아니었다. 회원 두 명이 나서서 이미 하교를 한 친구의 집까지 찾아 정을 순식간에 담임 앞에 대령시켰다.
“정, 너 담배 사고 남은 거스름돈은 어디에 두었니? 말해 보아라, 어서 빨리”
“선생님 저는 갑한테 담배만 받았지 거스름은 받지 않았어요. 정말인데요.”
담임과 정 사이엔 사건의 실체에 관해 한동안 추궁이 오갔다. 담임은 얼굴이 상기될 정도로 흥분을 했다.
“너 정말로 끝까지 제대로 말하지 않을 거야? “
“선생님, 전 거짓말은 안 해요”
정은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평소 그의 행실 등으로 볼 때 거짓말을 할 친구는 아니었다. 갑을 제외한 나머지 공부 모임 회원들 모두 다 그렇게 믿었다.
“잔 말 말고 엎드려 뻗쳐!”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담임은 이윽고 정에게 체벌을 감행했다. 교실의 우측 귀퉁이에 특이하게 삼각형 통 모양으로 설계된 청소 도구통에서 수수 나무로 만든 빗자루를 꺼내 들었다. 본래의 용도로 쓸 때와 달리 손잡이의 반대편을 모아서 쥐곤 손잡이 부분으로 엉덩이를 계속해서 사정없이 내리쳤다. 현장의 분위기는 갑자기 험악해졌다. 일부 회원들은 혀를 끌끌 차며 친구 정을 동정하였다. 담임은 어느 정도 분이 풀렸는지 매질을 그만두었다. 이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망설이던 담임은 뭔가 의문이 생겼는지 이윽고 갑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러더니 갑이 입고 있는 점퍼의 주머니란 주머니를 모두 샅샅이 뒤졌다.
낡은 점퍼의 겉감과 안감 사이에 방한을 위해 한 겹으로 얇게 넣었던 스펀지가 옷 안에서 낡고 삭아서 이리저리 찢겼다. 스펀지 조각은 해동을 앞둔 강물 위의 얼음처럼 이리저리 떠다녔다. 앞쪽 양 주머니의 안쪽 옷감도 찢겨 주머니 안의 소지품이 이 공간 덕분에 등 뒤까지 마음대로 들락거렸다.
1원에 2개를 살 수 있는 호도 빵 서너 개가 담임의 손바닥 위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 갑이 잔돈으로 호도 빵을 사서 먹다 주머니에 넣어둔 것이었다. 이러니 이제 어떠한 변명을 들이대도 이 확실한 물증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갑의 얼굴은 금세 일그러진 표정이 되었다. 거짓말이 들통난 것이었다.
한편으론 갑보다는 담임이 더 놀라는 눈치였다. 담임은 갑에 대해서 더 이상 나무랄 방법이 없었는지 이쯤에서 엉거주춤하게 사건을 마무리했다. 애초부터 우리 회원들은 사건의 결말을 짐작했을지도 몰랐다.
강산이 여러 번이나 지난 옛 시절의 일이었다. 자신의 직장 상사인 교감선생의 권력 때문에 담임은 제자의 훈육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같은 학교 교감선생의 그 잘난 권력에 절절매는 담임의 모습에 어린 우리들의 실망은 너무 컸다.
면내에선 막강한 재력을 과시하던 담배 집의 막내아들 을에게 갑이 휘둘렀던 못된 행패도 이 권력의 힘이었음은 물론이었다. 지금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갑이 교감선생의 막내아들이란 조그마한 권력의 힘으로 을이나 담임에게 보여주었던 오만함이 갑에게서 아예 없어졌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나 사필귀정이란 말이 있다. 비록 아버지가 권력을 갖고 있어 갑이 그 위력을 맛보았을지 모르지만 ‘화무십일홍’이다. 권력은 언제나 유한하다. 권력이 있다고 뻐길 것도 아니고, 없다고 좌절할 일은 더욱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