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하는 집사람의 근무지가 인천이라서 금융기관에 다니는 박 대리도 이곳에서 그리 멀리 않은 서울의 강서지역을 포함한 이른바 경인지역 점포에 주로 근무했다. 출퇴근 거리 등을 감안하여 회사에선 나름 근무지를 배치했다.
박 대리는 최근 영등포지점에 초임 책임자로 부임했다. 기존 선임 책임자가 맡고 있는 ‘영업총괄’을 보조하는 ‘영업, 출납, 대은행 관련 업무’ 등을 맡았다. 담당 상급 한 차장은 박 대리에 관한 모든 것을 파악해 놓은지 이미 오래였다. 자신보다 입사가 3년 이른 대학 동기와 다른 점포에서 같이 근무한 경력도 있었다. 당시 회사 내의 비공식 문화라 회자되던 고스톱에 일가견이 있어 나중엔 ‘뺑글대리’라는 재미난 별칭까지 얻게 된 박 대리에게 더욱 후한 점수를 주었다.
얼마 전엔 대본부와 자금 출납 관계에서 발생한 일시적인 트러블을 순식간에 원만하게 풀어내던 박 대리와 한 차장이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선임 여직원은 두 분의 본부 근무경력 때문에 잘 해결되었다고 칭찬과 부러움을 섞었다. 이처럼 두 사람의 ‘케미’는 상당한 수준까지 레벨업이 되었다.
약 2년 반의 근무를 마치고 박 대리는 부천지점으로 전보 발령을 받았다. 오늘은 외부 법인 방문을 마치고 지점으로 막 복귀를 했다. 숨을 돌릴 시간도 없었다. 직전 근무지에서 박 대리와 제법 유대관계가 돈독했던 후배로부터 다급한 목소리의 전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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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일찍이 본부 감사실의 자체 특별 감사팀이 들이닥쳤고 박 대리의 전직 상사인 한 차장이 거액의 고객 돈을 횡령한 사건을 파헤치는 중이었다. 횡령 건의 핵심 단서가 되는 수기로 작성한 무통장입금증에 박 대리의 영업점장 대리의 명판과 직인이 찍혀 있다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소식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박 대리는 눈앞이 깜깜해지고 갑자기 현기증도 일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얼마 후 평정을 되찾게 되는데 향후 사건의 진행 경과와 종착지를 대략 머릿속으로 그려 볼 때 자신에게 어쩌면 치명적인 불이익이 닥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신의 영등포지점 생활을 떠올렸다. 박 대리는 부임 후 얼마 되지 않아 ‘영업총괄 책임자’로 업무분장을 새로이 받았다. 일선 창구를 통할하는 자리였다. 창구 직원의 자리 업무의 배치 분장 변경 등에 관한 박 대리의 의견을 한 차장은 모두 기꺼이 수용하였다. 박 대리는 인근 은행과의 네트워크를 활용한 신용대출을 한 차장에게 주선하고 연대보증까지 했다. 이 정도 유대관계가 좋았던 직장 상사가 나를 배신하다니 만감이 교차했다. 커다란 충격은 물론 인간적인 연민까지 느꼈다.
당시엔 사무실도 금연구역이 아니었다. 한 차장은 골초 수준으로 담배를 피워댔다. 여의치 않은 주식투자 때문인지 ‘전쟁이나 터졌으면 좋겠다’는 극단적인 발언도 평소 서슴지 않았다. 한편 호신용 가스총도 휴대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리를 자주 비우는 것이 눈에 쉽게 들어왔다.
이제나 저제나 하는 사이 박 대리는 드디어 감사팀의 호출을 받았다. 감사팀에선 이미 회사는 물론 은행의 협조를 얻어 박 대리의 금융거래 내역을 확보하고 철저한 분석을 모두 마친 것으로 보였다. 일단 해당 건의 참고인으로 보는데 여차하면 피의자로 전환도 가능해 보이는 분위가 역력했다. 한 차장의 횡령 행위에 공모는 하지 않아서 당장은 참고인 수준에 그칠지라도 사규와 업무지침, 요령 등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최소한 일정한 수준의 징계를 이미 결론부터 정해 놓고 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육감으로 감지했다. 결코 우호적인 환경은 아니었다.
아무리 이런 상황이지만 박 대리는 이대로 앉아 순순히 당하고 있을 수 없었다. 박 대리도 나름 인맥을 총동원하여 해당 사건 관련 정보와 첩보를 수집했다. 대학 동문, 입사 동기, 펑소 친분이 있는 직장 선후배 등을 망라하여 ‘올코트 프레싱’을 방불케 하는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여러 곳에 도움이나 자문을 구하였다. 대학 선배인 현직 감사실장, 역시 선배인 인근 점포장, 감사요원으로 현장에서 활동 중인 입사 선배, 입사동기, 노조위원장 등을 주로 접촉했다
평소 결코 모범적인 사생활을 하지 않는 한 차장은 이러 저런 이유로 경제적으로 쪼들렸다. 이를 버티지 못하는 임계점에 이르자 고객예탁금을 횡령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항상 인자하신 표정의 연세 지긋한 여성 단골 충성고객을 타깃으로 삼았다. 때마침 3년 만기 해외펀드의 상환자금 90백만 원이 회수되는 시점을 거사일로 잡았다.
모든 금융기관은 ‘시재 제도’란 게 있다. 일정한 규모 현금을 귄 종별로 금고에 안전하게 보관하는데 이를 이동형 수제금고에 담고 이를 다시 대형 스탠드형 금고에 다시 넣어두는 방식이었다. 스탠드형 대형금고 또한 통제구역이라 불리는 별실 형태의 방에 따로 보관한다. 이 제한 구역은 상시 출입자 명단을 작성하여 출입 내역 기록을 유지하고 각 금고마다 비밀번호가 있다. 물론 이방의 통상 출입문은 물론 비상 출입구의 비번과 잠금장치를 따로 두는 등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를 두고 철두철미 관리한다. 이 별실은 입출금 전표, 제 장표류 고객 계좌 개설 신청서 등 소중한 고객자산의 관리에 없어서는 아니 될 모든 고객 자산 관련 서류를 보관하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현금시재를 ‘시재장’이라는 별도의 장부를 두어 철저히 관리를 한다. 매일 아침 영업을 개시하기 전에 전일 시재 장부 상의 금액과 현물 시재의 일치 여부를 확인한다. 영업 종료 후도 마찬가지로 금일 시재가 정확한가 여부를 다시 한번 더 확인한다. 하루 영업을 마치고 장부상 수치와 현물이 일치하게 되는 걸 ‘시재가 맞았다’ 또는 ‘오늘 시재가 나왔다’고 한다. 이 시재가 정상적으로 나온다는 건 일단 금전 사고 없이 오늘 하루 영업이 종료되었다는 최소한의 인증이 되는 셈이다. 시재가 맞지 않으면 모든 직원은 퇴근이 불가하고 시재가 나올 때까지 비상 대기를 해야 한다.
VIP 고객들은 일선 입출금 창구에서 업무처리를 하지 않고 별도로 마련된 상담실로 모셔 따로 정해진 전담 관리자가 업무처리를 대행했다. 그 결과를 사후에 보고했다. 한 차장 역시 오늘 내점 한 고객에게 해당 통장과 거래인감이 날인된 출금전표를 건네받아 창구 여직원이 통장과 전표에 거래 내역을 인자하여 형식적으론 정상적인 출금 처리 절차를 완료했다.
문제는 그 이후 한 차장의 행적이었다. 인출한 예탁금을 고객에게 전달해야 함이 마땅했다. 하지만 한 차장은 봉투에 담긴 수표와 현금을 본인의 양복저고리 안주머니에 욱여넣었다. 고객에겐 예탁금 대신 한 차장 본인이 수기로 작성한 무통장 입금증을 건네며 ‘일시 계정에다 두었다 나중에 좋은 신상품이 나오면 다시 새로이 투자를 하자’고 유도를 했다. 고객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상적으로 단말기로 인자된 계산서와 수기 무통장입금증을 건네받은 고객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고맙다는 인사를 뒤로하고 귀가를 했다. 고객은 인출된 예탁금은 일시 계정에 온전히 잘 계실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은 것이었다.
한 차장은 단말기로 제대로 인자된 무통입금증을 건네면서 에탁금을 횡령하였다면, 영업 마감 후 당일의 시재가 맞을 리 없어 금세 들통이 날게 뻔한 이치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 차장은 무릎을 칠 정도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사전에 치밀하게 구상했다. ‘수기 무통장입금증’이라는 혀를 찰 정도의 대단한 비밀병기를 동원했다. 고객의 예탁금 횡령이란 소기의 목적을 무난히 달성했다. 수기 무통장입금증이란 기막힌 제도를 악용하는 기상천외한 발상이 빛을 발했다. 박 대리는 학창 시절에 배운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는데"라는 시구도 떠올렸다.
이에 더하여 이 수기 입금증의 신뢰도를 보다 높이기 위한 방법까지 동원했다. 박 대리의 업무용 책상 위에 뒹굴던 영업점장 대리 명판과 직인을 본인이 날인했다. 이를 바로 코앞에서 지켜보던 박 대리는 평소 한 차장과 유대관계 등을 보아 정상적인 지급 계산서일 것이라고 믿었다. 이번에 찾아가지만 다음에 또 신상품에 투자하기로 했으니 다시 가져올 것이라는 첨언까지 바로 근처에서 서슴없이 이어갔다. 보통 정상적 무통입금증의 금액 앞부분의 ₩부분엔 담당 책임자가 결재인을 날인하게 되어 있다. 한 차장은 나중 책임 소재를 염려하여 이 절차도 건너뛰었다. 70년 초 모 시중은행 대리의 ‘수기통장 사건’에 버금가는 엄청난 일을 한 차장은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금융기관 시재 제도 기능 중 하나인 금전사고 예방기능을 보기 좋게 한 방에 무너뜨렸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박 대리도 인맥을 총동원하여 적극적인 방어 활동에 나섰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이나 향후 전망은 별로 밝아 보이질 않았다.
먼저 대학선 배인 현직 감사실장으로부터 출금 전 표가 정상적으로 작성되었고 검인과 재검도 제대로 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원론적인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같은 부서 근무 이력은 없지만 어느 정도 면식이 있는 감사팀장으로부터 드디어 결정적이고 충격적인 팁을 얻었다.
“박 대리, 감사님께 찍힌 적이 있나, 별거 아닌 것 가지고 왜 이리 자주 부르게 하는지 모르겠다”
감사팀장은 슬쩍 지나가는 투로 질문을 던졌다.
현직 감사라면 전직 영등포 점포장이 아닌가. 그럼 박 대리가 영등포 근무 시절 큰 과오라도 있었단 말인가, 도저히 짐작은 물론 짚이는 구석도 없었다. 해당 감사 팀원인 입사동기도 박 대리를 나름 돕겠다고 나섰다. 문답식 심문의 답변 요령을 귀띔하거나 한 차장과 업무상은 물론 개인적으로도 원만한 관계였다는 등의 답변은 박 대리에게 오히리 불리할 수 있으니 삼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고마운 조언이었다.
박 대리 자신보다 입사일이 6 개윌 앞선 김사팀원의 폭탄발언이 이어졌다.
“박 대리는 이미 감사님께 찍혔다. 감사님이 영등포지점장으로 재직 시 박 대리가 본인에 관한 험담을 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고 잠시 후 다시 본인이 그 자리로 돌아왔음에도 그 험담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사고가 없는 상황에서 별 것이 아니던 관행도 이렇게 금전 사고 등이 터지면 당해 행위를 문제 삼을 수 있고 그에 따른 징계를 비껴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징계 수위가 그렇게 무거울 것 같지는 않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 된다. 박 대리나 나도 향후 이 회사를 10 년이나 다닐 수 있겠어?”
라며 징계의 불가피성에 관한 비중을 의도적으로 낮추어 가면서 박 대리를 짐짓 위로했다. 조금 전 감사팀장이 박 대리에게 한 질문에 대한 결정적이고 결론적인 답변으로 충분했다.
박 대리가 몸을 담고 있는 지점장에게 이런 경과를 알렸다. 그렇지 않아도 일과 시간에 감사 현장에 자주 불려 다니는 것을 내심 못 마땅해하던 차에 지점장은 가감 없는 본색을 드러냈다.
(같은 부서장 직급인) 감사실장에겐 어떻게 해서라도 선처를 부탁해 볼 수 있지만, (임윈급인) 감사님이 문제를 삼는 상황이라면, 자신은 손을 써볼 수 없다고 했다. 때마침 좋은 핑곗거리가 생겨서 다행이라는 눈치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빨리 사건을 마무리하라는 협박성 지시도 추가했다. 사실상 감사한테 백기 투항하라는 이야기가 아닌가라는 자신의 결론을 내비쳤다.
점포장으로서 자신이 데리고 있는 부하 직원에 대한 최소한의 당연한 보호활동에 대한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비교적 잦은 교류가 있는 대학 선배인 인근 점포장도 한 수 거들었다.
“네가 문제의 한 차장의 횡령 행위에 가담하거나 공모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징계의 부당성을 정정당당하게 따져 남자답게 감사님과 한판 멋지게 붙어 볼 수 있다. 너에 대한 감사님의 개인적인 감정인 것이 분명하다. 단 네가 이 싸움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하더라도 그 후 감사님이 향후 너의 직장생활의 고비마다 훼방을 놓을게 뻔히 보인다. 그렇게 되면 너는 정상적인 직장생활이 힘들어 결국 이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징계의 수위를 낮추는 데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다.”
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이윽고 감사 결과가 나왔다. 고객예탁금 업무상 횡령행위는 한 차장의 단독 범행이고 박 대리, 여타 책임자나 직윈 간의 공모행위는 없다. 단 박 대리는 영업점장 대리 명판과 직인에 관한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 의무’를 소홀히 한 책임이 있으니 소정의 징계를 위하여 인사위윈회에 회부한다. 당해 고객 예탁금의 출금전표에 본 검인과 재검인을 한 성차장과 송대리도 인사위윈회에 회부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인사위원회에 회부된 자는 본인이 직접 출석하여 해당 사건에 대하여 소명할 기회가 부여되었다. 그런데 이를 위한 휴가 출장 외출 등은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지점장이 이를 허락할 가능성은 더욱 없어 보였다. 이를 감안하여 노동조합이 이를 대행하는 이른바 ‘구명 청원제도’가 있었다. 박 대리도 차선책으로 이를 활용하기로 했다.
특감이 마무리된 후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한 차장의 업무상 횡령행위에 관한 인사위원회의가 열렸다. 한 차장은 해임한다. 박 대리는 본래 3개월 감봉이 마땅하나 사장이 감경하여 견책으로 한다. 이를 두고 대리 소명한 노조위원장은 본인의 노력 덕분이라고 했다. 애당초 견책이라는 결론을 정해놓고 사장은 생색을 내고 위윈장의 체통도 어느 정도 세워주는 일종의 작은 거래로 보였다. 검인, 재검인 책임자인 성차장과 송대리는 사실상 징계로 볼 수 없는 주의조치를 받았다. 관련자 중 박 대리만 ‘괘씸죄’로 혼자 징계를 받았다. 뒷맛이 씁쓸했다.
금융기관 영업점 업무란 것이 고객 보호와 금융사고 방지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개개의 입출금 행위 건에 관해 책임자의 검인제도가 있었다. 직원 사이의 상호 크로스 체킹 기능을 강화하여 독특한 결재제도 등을 도입했다. 금융사고가 한번 터지게 되면 행위자는 물론 가담자, 관련자, 감독자, 지휘자 등이 굴비 엮이듯이 줄줄이 관련 책임을 부담한다. 해당 점포 전체가 풍비박산되는 독특한 구조였다.
오랜 세월 국가고시 준비 탓에 약 2 ~ 3년 정도 늦게서야 입사하여 이른바 ‘지진아’가 된 박 대리는 견책이란 징계까지 받아 ‘향후 6개월간 승진, 승급의 불허’라는 불명예스럽고 가슴 쓰리며 치욕적인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다.
회사 상임 감사는 본래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었으나 그 사회에서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여 당사에 ‘낙하산 인사’로 입사했다. 처음부터 1급 부서장으로 부임하는 파격적인 혜택을 받았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원리원칙에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되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캐릭터였다.
영업역량은 매우 부족하여 단순한 관리자로 적합했다. 출신 지역 등을 기준으로 편 가르기를 하는데 능했다. 한 차장의 횡령 사건이 터진 후에 당사자가 감사실에 출두했다. 그럼에도 한차장을 평소 자기 진영 사람이라고 보아 시간 여유를 주면 횡령 상당 금액을 조달해 오겠다는 그의 말만 믿고 형사고발이나 신병확보 등을 하지 않고 순순히 풀어주었다. 한 차장은 그 이후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되는 혜택을 마음껏 누렸다.
감사는 본인이 나름 K대 출신의 이른바 TK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본인 수준에 미치지 못하거나 자기 진영이 아닌 직원들은 폄훼하거나 무시하여 불이익을 주는데 결코 거리낌이 없었다.
결국 박 대리는 그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의 법체계상 가장 무겁다는 이른바 ‘괘씸죄’에 걸려들어 인사상 불이익은 물론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었다. 박 대리의 고교동기가 재직 중인 신설은행에 한 차장의 대출도 주선하고 연대보증을 서는 바람에 대출 미상환잔액을 대위 변제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자신의 집사람의 보험 만기수령 자금으로 메꿀 수밖에 없어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한 차장을 형사 고발하지 않은 상태에서 박 대리의 직전 근무 점포 직원들의 고단하고 지난한 체포활동이 계속되나 무위에 그쳤다. 주소지 고향 연고지 등을 위주로 수소문을 하였다. 직원들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형사고발을 하면 간단히 해결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감사 등 회사 측은 미온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 입사 후배인 편계장도 한 차장에 대한 연대보증으로 상당한 금전적 손실을 보았다. 한 차장을 체포하기 위해 고향까지 수소문하던 차에 한차장 모친의 딱한 사정을 보게 되고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편계장은 작은 봉투 하나를 용돈으로 건네는 쉽지 않은 선행으로 화사 직원 모두의 코끝을 찡하게 했다.
피해 고객은 그 와중에도 한 차장의 처벌은 결코 원하지 않으며 회사에 선처를 호소하기도 했다. 평소의 인자하신 모습과 충성고객이라는 정체성에 어긋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영업점장 대리의 명판과 직인은 영업시간 중엔 항상 업무용 책상 위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본인이 아닌 같은 직급 책임자, 차상위 책임자 심지어는 점포장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관행이었다. 하지만 일단 금전사고가 터지면 관리 소홀로 문제를 삼을 수 있다는 게 회사 측의 논리였다. 감사의 박 대리에 대한 개인감정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를 문제를 삼지 않았을 수도 있으리란 건 쉽게 짐작이 갔다.
고객 예탁금의 인출에 따른 출금전표에 본 검인, 재검 인한 책임자는 인출자금을 실제로 고객이 온전히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최종 단계까지 책임이 있다는 궤변도 등장했다. 관련자를 어떻게 하여서라도 징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꿰맞추기 작태 었다.
어려운 곤경에 처하게 하였던 박 대리는 본 건으로 그래도 얻은 게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항상 행동거지를 조심을 해야 한다. 낮말은 새가,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고금 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무거운 죄목은 ‘괘씸죄’라는 분명한 사실을 재확인하는 좋은 계기였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제대로 찍히면 그에 대한 배신감과 피해규모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명적이다. 이른바 ‘조직의 쓴맛’을 다시 한번 맛보았다. 조직원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온전히 본인의 소신대로 생활을 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조직은 유지되는 것으로 보였다.
영원히 내 사람으로 믿었던 사람에게도 보기 좋게 배신당할 수 있다. 지연, 학연, 혈연 등 연고주의는 우리나라는 물론 선진제국에서도 당분간 해결이 어려워 보였다.
그럼에도 가슴이 따뜻한 사람은 더러 있고 이들이 훈훈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이 때문에 세상은 그나마 돌아간다.
무릇 조직생활이란 게 사무실 안의 고유의 업무(공식 영역)가 기본이 됨은 물론이다. 그에 못지않게 사무실 밖의 출근 전 퇴근 후 비 고유업무(비공식 영역)도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후자를 원만하게 잘 소화해 내는 사람은 당해 조직에서 이미 앞서가는 사람이다.
한 차장은 박 대리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다시 볼 수 있을 수 있을까, 지금은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박 대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박 대리에게 최소한의 부채 감정은 가지고 있을가, 이 모두는 미해결 과제로 남았다. 향후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