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들이 태어나기 약 2주일 전 쯤이었다. 나는 영등포지점에서 금융기관 초임 책임자인 김대리로 불렸다. 인천 서구 산비탈에 자리잡은 작은 평형의 아파트에 살았다. 집사람은 이미 출산일의 카운트 다운에 들어 갔다. 남산만한 배를 자랑하듯이 앞으로 내밀며 무거운 몸을 어그적 어그적 끌면서 간신히 거동했다.
오늘은 일과 후 일주일에 두어번 직원과 어울리는 이른바 소규모의 "곡차회식(곡식)"을 마쳤다. 여분의 전철 정액권을 같이 동행한 박차장에게 호의로 건네고 인천행 전철에 몸을 실었다. 박차장은 평소 버스로 출퇴근했다. 그런데 이렇게 "곡식"이 있는 날엔 전철을 이용하기도 했다. 승차권 구매에 따른 번거로움 때문에 내가 지니고 다니던 정액권을 한시적으로 빌려주는 작은 호의를 베풀 곤했다.
보통의 남정네들이 그러하듯이 나 또한 크기나 무게에 관계 없이 짐을 들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날은 아주 소중한 물품을 순순히 들고 나섰다. 동료 직원 몇이서 짜투리 돈을 갹출하여 인근 노량진 수산시장을 다녀왔다. ‘최고급 냉동 참치 회토막’을 공동 구매하여 각자에게 할당된 몫을 챙긴 것이었다.
본래 ‘육군’보다 생선회나 해물을 휠씬 좋아하는 나는 모처럼 마음에 드는 맛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기대가 사뭇 컸다. 참치회를 잘게 져미어 도시락용 김에 싸면 반찬은 물론 안주로도 손색이 없다고 선임 책임자가 귀뜸도 했다. 당시 정통 참치집에 가서 제대로 된 참치회를 먹어 보지 못한 나는 그나마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수도권 전철을 지옥철이라고 불렸다. 승객이 폭주하여 사람을 반 강제로 객실에 우겨넣는 이른바 ‘푸쉬맨’까지 등장했다.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시발역이나 종점에서 탑승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차에 오르자 마자 좌석을 차지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참치 보따리는 객실안의 선반 위에 잘 모셔 두었다. 곡차로 인한 약간의 취기로 손잡이에 체중의 일부를 의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편안하게 앉아서 갈 수있는 행운을 얻었다. 어느덧 같은 객실 안의 승객 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 토막잠을 자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산비탈에 자리한 보금자리에 벌써 도착하여 참치회를 시식하고도 남을 듯했다.
태풍이나, 대형화재, 집중호우 시 가동 되곤하는 중앙재난센터 모니터를 재생하면 문제의 그날 나의 귀가 길 행적이 일거수 일투족까지 낱낱이 밝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비상상황도 아니고 일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기대는 아예 불가능했다.
정말 예기치않은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달디단 잠깐 동안의 토막잠에서 깨어난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정도 시각이면 보금자리로 돌아와 편히 쉬면서 TV 정도나 보고 있야함이 마땅했다.
아닌 밤에 홍두께였다. 내 보금자리가 있는 인천도 아닌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복판 신촌 로터리 인근으로 보였다. 편도 4차선 도로 가장자리 바깥 차도에 내려와 택시를 잡으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 헤프닝의 극적 효과를 더 배가시키는데 날씨도 거들었다. 전철에 오를 때 멀쩡하게 맑던 하늘에선 모 대중가요 가사에 등장하는 ‘궂은비’가 추적 추적도 아닌 구질구질하게 내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이었다. ‘훈련상황’이 아닌 ‘실제상황’이었다.
게다가 진원지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수 없는 시뻘건 피는 상하의를 가리지 않았다. 미술 시간에 물감을 아무렇게나 흩뿌려서 만드는 그럴듯한 작품처럼 여기저기 제멋대로 범벅이 되었다.
당시엔 택시란 것이 행정구역 경계를 벗어나는 운행을 당연히 꺼렸다. 운행을 하더라도 부담스러운 웃돈을 요구했다. 궂은비가 내리는 밤 늦은 시각에 그것도 서울이 아닌 목적지 인천을 아무리 크게 외쳐보았자 택시 기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는 난생 처음 오른손을 번쩍 들어 승리의 V자를 그려 보였다. 기사에게 구애하듯이 파격적인 오퍼를 보냈다. "따블"따블"을 외쳤다. 고스톱판에서 세패를 흔들고 승자가 되었을 때나 쓰는 용어와 다름 없었다. 평소와는 달리 매우 부담스러운 택시비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비상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부지런히 구애한 덕분에 다행히 무척이나 우호적인 택시 기사를 만났다. 가까스로 안락한 좌석에 겨우 엉덩이를 붙였다. 사태를 정확히 읽은 기사는 하얀색 실장갑 한 켤레 뭉치를 나에게 내밀었다. 우선 급한대로 시뻘건 피가 마구 흘러나오는 진원지를 틀어 막았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오른쪽 턱 아래 쪽과 목의 경계부분 부위에서 문제가 생겼다. 실장갑 뭉치로 적당한 힘을 주어 압박을 하여 그나마 응급 지혈에 성공했다.
많은 대가를 치르고 천신만고 끝에 보금자리에 도착했다. 평상시 한달 정도의 출퇴근 교통비를 한꺼번에 쉽게 써버렸다. 그럼에도 무슨 개선장군이나 되는 것처럼 짧은 텀으로 여러번 초인종을 눌러댔다.
무거운 몸을 지탱하면서 첫 출산이라는 비상사태에 대비하고 있던 집사람은 사전 예행 연습이라도 하듯이 돌발상황을 한번 더 앞당겨 체험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야트막한 산비탈의 보금자리에서 결코 가깝지 않은 인근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이루 말할수 없는 원성을 들었다. 일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않는다는 등 여러기지 버전의 설교를 감수해야했다.
살갗이 찢어진 문제의 상처 부위를 대여섯 번의 땀을 뜨고선 이날 헤프닝은 마무리되었다.
문제는 정확한 복기를 하려면 재난센터 모니터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름 당시 행적을 추정해 보았다. 모니터 보다 정확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어디까지나 추정이었다.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점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걸 한계라고하나 보다.
전철에 오른 나는 당일 마신 곡차의 취기로 토막잠이 들었다. 나의 하차 목표지점을 훨씬 지나 전동차가 경인선의 종점에 도착했음에도 나는 여전히 달콤한 꿈나라 속을여행 중이었다. 전동차가 다시 서울로 방향을 바꾸어 도착한 신도림역에서 내렸다. 다시 인천행으로 갈아타고자 했다. 당시 세상에 나온지 오래 되어 상대적으로 낡은 1호선과 달리 연식이 덜되고 훨씬 쾌적해 보이는 순환선인 2호선으로 갈아 탔다.
자정을 넘는 열차운행 종료 시간까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같은 코스를 끊임 없이 돌고 돌았다. 순환선 열차 를 마치 놀이시설의 궤도 열차처럼 꿈을 꾸면서 그 스릴과 서스펜스를 열차 마감 시간까지 원없이 즐겼다. 열차의 최종 종점이 신촌역 정도이었고 승무원 등의 도움으로 아쉽게도 하차하였다. 곡차의 취기와 토막잠에서 덜 깨어난 나는 비틀비틀 걷다 드디어 전철역 출구의 콘크리트 난간 모서리에 문제의 진원지를 아주 야무지게 부딪친 것이었다.
이 사건 후 나는 개봉동 인근의 우리 회사 메이저 거래처를 방문했다. 연식은 나보다약간 더 되는 거래처 직원은 다짜고짜 "김대리님, 턱주가리가 왜 그렇게 되었어요?"라고 물었다. 순간 ‘턱주가리’라는 말에 기분이 많이 상했다. 이에 정상적으로 그리고 확실히 어필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법인 영업을 더욱 더 열심히 해야하는 을의 입장인지라 엉거주춤한 답변으로 웃어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너무나 아쉽고도 안타까운 것은 당시 주머니를 탈탈 털어 어렵게 마련한 집을 나가서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최상급 참치회 토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