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구야, 너의 회사는 돈을 시도 때도 없이 주걱으로 마구 퍼 준다며?”
“야 임마, 금방 그만둘 거면 거기 왜 들어갔어?”
절친 대학 동기 결혼식장에서 오랜만에 마주 앉은 친구 둘이서 각각 나에게 한 마디씩 건넸다. 나는 법대 학부와 석사과정을 포함하여 도합 약 7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사법시험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소기의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그래서 우리 나이로 30줄에 들어서던 해 금융기관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인생 전반부의 필생의 과업이었던 이 국가고시에 최종 합격을 이루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었다. 항상 미련으로 남았다.
주위 사람들은 그 회사는 안정적인 데다 급여도 최상급 수준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럼에도 형편이 되면 이 못다 이룬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언제든지 이 직장생활을 훌훌 떨어 버리고 다시 수험생 신분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굴뚝이었다. 송충이였던 나는 다시 솔잎을 먹으러 숲 속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러한 나의 근황을 꿰뚫고 있는 친구 둘이서 자신들의 생각을 각각 나에게 내어 뱉었다.
최소한 2년간 수험생활을 버틸 수 있는 비용을 500만 원으로 책정하고 나는 이를 모으기 위해 무던 애를 썼다. 내가 신입으로 이 회사에 입사하던 해 4월 초엔 코스피 시장이 최초로 역사적 고점인 1,000포인트를 찍었다. 주식시장은 활황을 이어갔다. 어떻게 해서든 500만 원이란 생존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급여를 받으면 ‘적립형 주식’이라는 수익증권을 꾸준히 분할 매수하는 방법을 택했다.
당시 우리 회사는 너무 많은 당기순이익을 내다보니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다. 신입사원 연수 기간 동안 교수에게 전해 들었다. ‘너희들만 잘 먹고 사느냐?’는 시기 등을 무마시키기 위해 수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방법을 고민할 정도라 했다.
수탁고가 1조 단위로 늘어날 때마다 ‘특별상여금’이란 이름으로 직원들은 보상을 받았다. 납입자본금이 500억에 불과한 회사가 법인세 납부 실적에선 4 내지 5위에 랭크되는 기염을 토했다.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박 선생님, 현금 시재 은행에 입금하지 말고 지점으로 도로 가져오세요, 오늘 특별상여금 나온답니다.”
신입사원 시절 첫 업무는 출납이었다. 우리 영업점과 거래 은행 간의 자금의 입출금을 주로 몸을 움직여 해결해야 하는 일이 출납 업무이다. 오늘도 회사 수탁고가 1조 늘어나서 마감 시간이 되어서야 본부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었다. 통상의 정기 급여와 달리 특별상여금의 지급 철차는 독특했다. 지금처럼 급여를 계좌 이체하는 것이 아니라 급여 봉투에 빳빳한 신권으로 채워 직원 개개인에게 건넸다. 이는 급여명세서가 사전에 세팅되어 있어서 가능했다. 이와 달리 특별상여금은 팩스 등을 이용하여 직원 개개인마다 실수령액만을 먼저 알렸고 급여명세가 적힌, 보통 우편 봉투의 2배 크기인, 봉투는 나중에 건네거나 때론 건너뛰었다.
지점장은 직급별로 자신의 방으로 직원들을 호출했다. 현금이 담긴 얇고 누런 색 편지봉투를 일일이 건네며 등을 토닥이는 격려 절차가 늘 동반되었다.
“이번 이 특별상여금 이야기는 보안을 잘 유지해주세요, 경쟁사에 이 사실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텐데...’라고 생각하는 것은 책임자는 물론 사원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나는 입사 후 만 1년이란 세월 동안 그저 솔잎을 먹으러 갈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차곡차곡 진도를 나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학 동기 선후배의 도움을 받아 자취(하숙) 방은 어디로 할 것이며 도서관은 어떻게 이용이 가능한가 등 나름 치밀한 구상을 착착 진행했다. 간간히 주위 동문들의 각종 국가고시 합격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송충이인 나는 어서 빨리 솔잎을 먹으러 가고 싶은 욕구가 솟았다.
확정금리를 지급하는 은행권의 정기적금과 달리 우리 회사의 적립형 수익증권은 상당히 다른 점이 많았다. 그중 후자는 원금손실이 가능한 실적배당형 상품이라는 것이 첫 번째 특징이었다. 또한 자유적립식이라서 정해진 납입 기일이 아니라도 입금이 가능했고 최초 약정 범위내에서 납입회수에도 제한이 없었다. 불입액 단위로 선납도 가능했다.
40만 원을 월 단위 불입액으로 정했다. 당시 내 월급은 세전 60만 원을 턱걸이 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다른 회사에 비해 급여 수준은 상위권에 랭크되었다. 저소득 봉급생활자의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 각종 세제혜택을 장착한 ‘재형저축’의 가입 자격의 한도인 60만 원을 넘어섰다.
별정직원의 신분이 마감되고 정규직원이 되면 급여가 오르게 되어 재형저축에 가입할 수 없으니 서두르라는 최차장의 권유를 나는 따를 수 없었다. 재형저축은 3년 5년 만기 두 가지 선택지 밖에 없었다. 나는 1년이란 단기간에 승부를 걸어야 할 절박한 형편이었다. 1년 내에 어서 종잣돈 500만 원을 모아 숲 속으로 돌어가야 하는 나에게 이 최차장의 권유는 ‘그저 지나가는 한줄기 바람’에 불과했다. 입사하던 해는 어느덧 저물고 새해 1월이 밝았다. 이 투자상품에 가입한 지 겨우 10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12회인 480만 원을 모두 불입했다.
한 달에 3회나 불입하는 초유의 실적을 쌓는 괴력도 발휘했다. 정기상여금과 특별상여금이 잇따르는 달엔 추가 납입이 가능했다. 상여금은 기본급이 배이스가 되었다. 그래서 40만 원 단위 배수의 재원이 부족할 때는 비상 수단을 썼다. 신용카드로 현금 서비스를 받아 부족분을 메워 3회의 불입에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최종 목표한 500만 원에 약간 모자라는 자금이 모아졌다. 여기서 과감히 현금화했다. 어서 하루라도 이른 시일 내에 숲 속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었다. 입사 이래 나의 이 ‘다시 솔잎 먹으러 가기 프로젝트’를 회사 내 동네방네 거리낌 없이 떠들고 쏘 다녔다. 그러다 보니 나는 1년 후에 다시 얼굴을 볼 수 없는 송충이로 낙인찍혔다.
1년 내 500만 원 모으기 미션 때문에 나의 직장생활은 원만히 굴러갈 수가 없었다. 본디 엄청난 애주가인 나는 지점 내 공식 비공식 회식이나 술자리의 2차엔 절대로 얼굴을 내밀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정했다. ‘나의 사전에 2차는 없다’를 내세우고 이를 어김없이 실천했다.
“박한구 씨 지점장님이 오라고 하시는데요?”
“저는 빼주세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지점장이 불러도 상관없어요. 2차는 가지 않습니다”
감히 지점장의 분부도 무시하고 나는 독신자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간이 큰 임원급 신입 사원’이었다.
당시 500만 원이면 최소한 2년간의 수험생활 동안 버틸 수 있는 자금이었다. 주거비, 책값, 용돈 등 모두를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송충이의 ‘숲 속으로 다시 돌아가기 프로젝트“는 결국 안타깝게도 무산되었다. 만 30세란 나이가 부담스러웠다. 2년간 솔잎을 먹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만약 2년 안에 사법시험 최종 합격이라는 목표가 불발되었을 경우엔 그다음이 문제였다. 그 이후에도 수험생활을 계속하는데 생명줄을 이어 줄 이른바 독지가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장담할 수 없었다.
누구는 2차 시험 문제를 많이 적중해서 수석도 기대해 본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또 다른 누구는 취업 후 짧은 직장 생활을 접고 다시 솔잎을 먹은 대가를 충분히 보상받아 차석이란 영광을 얻기도 했다.
당시 내가 다시 솔잎 먹기를 택했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를 상상해 본다. 고시 낭인이 되어 폐인이 되었거나 아니면 어엿한 법조인의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투자 상품에서 당연히 리스크는 따른다. 수익은 리스크에 대한 대가임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문제는 리스크를 과감하게 테이킹 하는가 여부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나는 최근 32년이란 직장생활을 정년으로 마감했다. 한 때 송충이였던 나는 유명 시인의 시구를 떠올린다. ’ 가지 않은 길‘ 의 ‘다른 길을 택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가 그것이다. 나는 다시 태어 날 수 있다면 솔잎을 먹으러 숲 속으로 기꺼이 돌아갈 것이다.
“가장 먼저 직장을 접을 것 같았던 놈이 제일 오래 다녔다.”라고 대학 절친으로부터 자랑스러운 훈장을 최근에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