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생 시절 소풍 스케치

by 그루터기


한뙈기의 땅도 바다 와 맞닿는 곳이 없는 내륙지방의 작은 분지가 나의 고향이다. 이 사실을 나는 숨길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다. 오늘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머슴아들은 ‘나의 성장기’란 걸 여러번 쓸 기회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 때마다 서두를 "산 좋고 물도 맑으며 인심이 특히 좋은 고장~"으로 장식하곤 했다.


매년 봄과 가을마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 장소의 후보지가 너무나 많은 것도 즐거운 고민 중의 하나이다. 우리와 바로 이웃한 면소재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초 중 고생을 가리지않고 우리 구역으로 거의 매년 원정소풍을 오는 것만으로 이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1차 성장기인 초등생시절은 저학년생과 고학년생 간의 체격이나 체력 조건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그래서 단골 소풍장소는 대개 학년마다 그 에 맞추어 관행으로 정해져 있었다. 1학년은 송호리솔밭 2학년, 수두리 밤나무밭, 3, 4학년, 자랫펄, 자풍 5, 6학년, 비봉산, 영국사가 단골 행선지였다.


초등학교 소풍날은 온 동네 잔치였고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관내 또는 인근에 다른 초등학교가 두군데 있기는 하였지만 면소재지 초등학교는 ‘1,000명의 건아’라는 말이 있었듯이 당시로선 결코 작은 규모는 아니었다. 면 전체 인구 최고치가 7,000 명 시절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한꺼번에 이정도 인구가 움직이는 것은 결코

작은 축제는 아니었다.


송호리 솔밭으로 가장 햇병아리들이 생애 첫소풍을 나섰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지도 않았다. 남녀 어린이가 각각 이른바 수건 돌리기 대형으로 동굴게 큰 원을 만들었다. 부모님이 정성스럽게 마련해준 도시락을 먹게 되었다. 김밥 한 조각이든 다른 밥 한 숟가락이든 60번은 씹어야 건강에 좋다고 담임선생님은 알렸다. 이는 반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나름 상당한 혜안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2 ~ 4학년은 자랫펄 ,자풍, 소골 미류나무숲, 수두리 밤나무밭를 다녀왔다. 자유시간에 광종이는 소주병 나발을 불었다는 무용담도 돌았다. 당시 농촌에선 벼농사 보리농사는 큰 돈이 되지 않아 특산물인 인삼이나 담배 등 재배로 농가소득을 레벌업시켰다. 등하교길 코스 가까운 담배밭에 아주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가공하지 않은 오리지날 생 담배잎을 말아서 쉽게 필 수 있었다. 그러니 ‘소주병 나발’ 정도는 별게 아닐 수도 있었다.


보물찾기 놀이는 소풍에 꼭 등장하는 필수 프로그램 이었다. 보물을 찾기만 하면 공챽이나 연필 등 부상을 조건 없이 주는 것이 아니었다. 2절까진 아니라도 반드시 노래 한곡을 불러야만 부상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소리를 주로 다스리는 나같은 어린이에게는 하나의 ‘적폐’였다. 시력이 최소한 양쪽 모두 2.0인 초롱초롱한 눈을 가진 나 정도이면 어렵지 않게 보물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노래를 불러야하는 트라우마 때문에 아예 보물찾기를 미리 포기했다. 아마 지금의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등이 당시에 있었으면 나도 몇개의 부상을 챙길 수 있었겠지만 시대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6년 간 12번이나 되는 소풍에 개근하였으나 부상 수상 실적은 당연히 꽝이었다.


가끔 두 개 학년 동행 소풍도 있었다. 양질의 모래밭이 널려 있는 비단강을 끼고 있는 천혜의 자연 환경 덕분에 임시 경기장을 쉽사리 만들어 즉석 씨름대회를 열었다. 아래 학년 선수가 선배 선수를 이기면 이변으로 보아 뉴스거리가 되기도 했다.


가을소풍엔 특식 반찬으로 메뚜기볶음이 등장했다. 이는 지금도 고급주점에서나 맛 볼수 있는 고단백 건강식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중국과 교역이 전혀 없었던 시절이라 정말 순토종 고급 음식이었다.


매년 한번 열리는 운동회나 두 번 다가오는 소풍날엔 불청객인 비가 자주 내렸다. 학교 소사(전달부)아저씨가 담을 잘도 넘어 다니는 구렁이나 이무기등의 생명을 빼앗은 업보라는 전설적인 말이 내려왔다. 이런 일은 다른 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주로 저학년 시절엔 어머니 할머니 누나 삼촌까지 동행하는 이른바 가족나들이가 되었다. 이는 대부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안의 어린이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당시 직업 사진사 것이 아닌 개인소유의 카메라가 등장했다. 형편이 되지않는 대부분의 어린이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될 수 밖에 없었고 빈부차니 위화감, 이런 말도 떠올랐다. 주로 이런 어린이집에선 부모가 담임선생님은 물론 다른 선생님의 김밥 등 도시락까지 챙겨 어린이, 어린이 가족들과 겸상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여기저기 널린 것이 음료수이지만 소풍날 같은 날에나 맛을 볼 수 있는 것이 사이다나 콜라였다. 그나마 좀 레벨이 되는 칠성이나 코카 같은 고급브랜드는 언감생심이었다. 25원짜리 ‘금강사이다’나 펩시콜라 정도로 만족해야만 했다.


귀한 음료수 대신 집에서 미리 재래식 우물물 등을 준비하여 집을 나서는 것이 보통이었다. 본래부터 물통의 용도로 제작된 용기도 드물게 있기는 했다. 프라스틱 용기라도 있으면 감사할 따름이었다. 나는 그래도 중간 레벨인 회심의 비밀병기를 준비했다.


어린이들의 영양제로 당시 각광을 받던 원기소(에비오제) 빈통이 바로 그것이었다. 고소한 맛 때문에도 하루의 적정 용량을 무시하고 어린이가 마음 놓고 맛 있게 과용할 수 있었던 건강보조식품이었다. 에비오제의 빈통에 좌우로 약 2내지 3센티 미터의 브라운색 앏은 프라스틱 끈을 두줄로 잘 엮어서 물통을 고정시킬 수 있도록 작업을 하면 그런대로 훌륭한 물통 지참용 케리어가 되었다. 그걸 목에다 걸고선 보무도 당당히 나는 집을 나섰다.


우리집은 따로 가구 단독의 재래식 우물이 없었다. 그래서 마을 공동 우물물을 길어다 썼다. 공동 우물물도 넣지 않고 아예 내용물이 없는 빈 물통을 어께에 크로스로 걸치고 설레는 소풍여정에 나서는 것이 많았다. 3 ,4 학년 이후엔 소풍목적지로 가자면 강을 건너야 했다. 지금과 달리 잠수교 등 어떤 교량도 없었기 때문에 박태환 같은 세계적인 수영선수를 제외하고는 평상시 특히 어린이들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나룻배 양쪽 사이드 중 편한 곳에서 전혀 가공되지 않은 ‘맹물’로 통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요즈음은 당연히 상상도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흔하디 흔한 생수 보다 오히려 품질이 낫다고 볼 수 있었다. 비가 그친지 얼마 되지 않은 흙탕물이 아닌 바에야 무공해 청정지역의 청정수 였던 것이라 마음껏 마셔대도 배탈에 대한 염려가 아예 없었다. 다목적댐이란 이름으로 자연스러운 물길을 막을 일이 없어 ‘정말 고이지 않고 물 흐르듯이 흐르는 물’ 이었던 것이다.


직선 거리론 불과 100여미터 정도지만 제대로된 좁은 오솔길을 돌아서 큰고모네 앞을 경유하여야 학교로 가는 지름길이 열렸다. 소풍날이라도 이는 다를 게 없었다. 고모네를 지날 즈음이었다. 고모는 나를 반드시 불러세우고선 5원짜리 동전이 아닌 꼬깃꼬깃한 종이돈 한 장을 나의 고사리 같은 손에 꼭 쥐어주었다, 고모의 당신 생질들에 대한 사랑은 유난히 각별했다.


가로 세로 5× 7센티 정도 사이즈의 비닐 봉투로 포장된 여러가지 원색의 분말 쥬스는 평소엔 그림의 떡이었다. 봉투를 개봉하여 입안에 윈샷으로 털어 넣어도 완전히 소진되지 않아 여분을 훑어서 달디단 맛을 되도록 오래 천천히 음미하려 했다. 혀바닥이 각자의 고유한 윈색으로 제대로 염색되었는가 확인차 서로 혀내밀기 경쟁이라도 했다. 이게 단가가 바로 5원이었다. 1년에 두 번은 이 분말 쥬스를 흡입할수 있는 행복한 기회를 누렸다.


3남 3녀인 6명의 자식을 키워내느라 살림살이가 녹록치 않았음에도 어머니는 소풍날에는 최소한 김밥을 챙겼다. 어머니는 때론 5원내지 10원의 용돈을 추가로 마련해 주었다. 김밥 만들 때 아껴서 사용하려고 미리 마련해둔 오징어포의 소재를 귀신같이 알아낸 나는 도둑 고양이 처럼 정지(부엌)의 문턱을 넘나들며 많은 양을 축내곤 했다. 지금 제품 대비 두께는 얇고 로울러 작업은 한번 정도에 그친 것으로 보였다. 촘촘하지 않고 얼기설기 한 조직였지만 나의 군침을 모으기에는 충분했다. 훔친 사과가 더 맛 있다는 말도 떠올랐다.


김밥을 만들기 바로 전에야 오징어포의 일부 도난(?) 사실을 알았지만 매번 같은 장소인 찬장가장 안쪽 귀퉁이에 계속 보관하였던 어머니의 그 깊은 뜻을 알아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초등학교 소풍 전날의 설레임이란 손으로 꼽을 정도의 큰 즐거움이었다.


5살 아래인 막내 남동생은 형이나 누나들 소풍날을 본인 생일 다음으로 학수고대했다. 김밥을 손수 만드는 어머니 곁에 바짝 붙어 까만 눈동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큰 눈을 동그랗게 더 키웠다. 혹시 떨어지는 콩고물(?)이 없을까 하고 사주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형이나 누나들이 소풍에서 얼른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바람에 우리는 막내 선물용으로 도시락을 모두 비우지 않고 몇 조각을 남겨 돌아왔다. 막내의 기대를 결코 저버린 적이 없었다.

평상 시의 금색 또는 은색 알루미늄 도시락과 달랐다. 소풍날에는 특별한 용기가 준비되었다.일반 도시락 대비 둥글고 사이즈가 보다 크며 재질도 더 두꺼웠다. 꽃무늬가 멋 있게 그려진 고급 금색 찬합을 2층 정도 포개서 보자기로 쌌다. 나는 부피가 부담이 되고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양하곤 했다.


부모가 모래밭을 많이 가지고 있던 어린이들은 부식(반찬)이 아닌 주식으로 땅콩을 김밥 대신 싸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여물(쇠죽)을 끓이는 좋은 화력에다 커다란 솥뚜껑이 달린 무쇠솥 한쪽에 같이 삶은 것은 아닌가 할 정도의 원시적인 야성이 넘치는 메뉴였다. 줄기도 제거하지 않은 땅콩찜이었다.


소풍날 도시락 메뉴도 어린이에 따라서 다양했다. 김밥, 보통 쌀밥, 혼합곡밥, 꽁보리밥 중 정말 가정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은 마지막 메뉴였다. 반찬으론 김치는 언감생심이고 고추장 등겨장 중의 하나를 곁들였다. 그 것도 도시락 한쪽 귀퉁이에 투박한 사기 종지를 짱박아 온 친구의 도시락을 보며 비록 어렸지만 코끝이 찡했다. 난 부모님께 감사해야하겠구나하는 기특한(?) 생각도 했다.


소풍 목적지를 오고 가는 중 징검다리도 없는 어중간한 개울을 만났다. 이런 경우엔 신장 체격 체력 등에서 상위 1% 정도 남자 어린이의 도움을 받아 동행한 선생님, 특히 여선생님들은 안전하게 장애물을 통과했다. 하위 20% 수준에 간신히 턱걸이했던 나는 선생님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지 못해 매우 안타까웠다.


어린이에겐 소풍날이 잔치이지만 또 어떤 이들에겐 이른바 성수기의 다른 이름인 대목이었다. 기념사진 촬영차 사진사 아저씨가 동행했다. 관내에 사진관이 두곳에 불과했다. 오늘 사진사는 주로 고학년 소풍지로 따라 나섰다. 두명 이상의 단체 사진은 1인당 30원이고 혼자서 찍는 독사진은 60원의 대가를 지불했다. 추억의 순간을 보다 많이 남길 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화물용 짐자전거에 약간 색이 바랜 초록색의 커다란 네모난 모양의 나무 박스를 아이스께끼로 하나 가득 채운 이도 단골 등장 인물이었다. 아이스께끼를 파는 것 말고 아주 돈되는 부업이 따로 있었다. 길고 짧은 두개의 시커먼 고무줄을 고리처럼 엮어 두개의 고무줄 끄트머리 중 한쪽에 베팅하여 긴 쪽이 나오면 풍선이나 사탕 쥬스 등의 경품을 받아가는 게임이었다. 긴 고무줄의 두 끄트머리를 어린이가 원천적으로 볼 수 없도록 항상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하기 때문에 이는 베팅자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100전 100패 일종의 사기 행각이었다. 70년대 말대도시의 으슥한 도로변에서 이루어지던 ‘야바위 게임’보다 어찌보면 죄질이 훨씬 더 불량했다. 어린 동심을 후려쳐 금전적 이득을 취득하는 몰염치한 짓거리였다.


보물찾기와 연계된 숙제 성격의 노래 부르기가 아닌 정말 실력으로만 자웅을 겨루는 노래자랑도 가끔 있었다. 여기선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이런 범생이들이 부르는 관제 성격의 노래보다는 당시 핫한 트랜드를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대중가요(유행가)른 불러 제낀 친구들이 상위에 랭크되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6 남매중 유일하게 나는 모든 단계의 학교 소풍은 물론 수학여행도 계속 완주하는 엄청난 행운과 혜택을 누렸다. 고교 시절 독일어 선생님이 " 학창시절의 수학 여행은 빚을 내서라도 꼭 가는게 좋다"라고 한 깊은 의미 있는 말을 되새긴다.


소풍날 벌어지는 노래자랑이나 보물찾기와 연계된 숙제성 노래부르기 대신 누군가의 확실한 주특기인 제트기싸움(닭싸움)을 정식 종목으로 채택했더라면 나는 아마 이미 상류사회로 진입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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